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마태복음6:9(2012. 3. 4. 오후예배 설교)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어느 날 새벽예배 후 차량 운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이다. 집 앞에 와서 열쇠를 꽂고 문을 열었는데 문이 열리지를 않았다. 한참을 문밖에서 씨름을 했는데 그래도 문이 열리지를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집안에 들어는 가야겠기에 자고 있는 아내를 깨우려고 문을 두드렸다. 드디어 문이 열리는 순간 웬 남자가 집안에서 나왔다. 알고 보니 한 층을 덜 올라가고 아랫집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집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 아무 집 문이나 두드려선 안 된다. 정말 열심히 문을 두드려 설사 문이 열렸다 하더라도 엉뚱한 집 문을 두드렸다면 우리는 그 집에 들어가지를 못한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원리이다. 문을 두드리듯이 무조건 아무에게나 기도한다고 해서 그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아니다. 번지수를 잘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하는가?”이다. 이 말씀을 통해 기도의 대상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우리의 믿음이 더하여지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1. 기도의 대상을 바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함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다른 말로 하면 “우리 기도의 대상은 누구인가?“이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있어 너무나도 쉬운 질문일 것이다. ”그것도 질문이라고 하십니까?“라고 반문할 만하다.
그러나 실상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기도의 대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 잘못된 기도의 대상이 있음
이것은 사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수능을 앞두고 불상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본적이 있다. 빼곡하게 모여서 간절히 기도들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대단했다. 어떤 사람은 천배를 했다고 한다. 허리가 남아나지 않을 텐데도 자식 위하는 마음에 불상 앞에 빌고 또 비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묻는다. 사람이 만든 불상 앞에 기도하는 것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잘못된 기도의 대상이다.
어떤 분들은 반문할 것이다. “왜 다른 종교를 비방합니까? 왜 그렇게 배타적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사람이 돌로 불상을 만들었다면 그 불상의 창조주는 사람이다. 안 그런가? 불상은 사람의 피조물이다. 안 그런가? 그런데 사람이 자신의 손으로 만든 피조물 앞에 기도하다니 우스운 일 아닌가?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발견할 수 있을 터인데 여전히 사람들은 불쌍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잘못된 기도의 대상을 가진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고 그 역사와 전통도 길다.
토테미즘-부족마다 자신들의 조상으로 간주한 짐승을 섬겼는데 그것을 토테미즘이라 한다. 우리나라-단군신화도 같은 맥락.
에니미즘-모든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것. 모든 자연만물이 기도의 대상이 된다.
무속-쉽게 생각해서 무당을 염두에 두면 됨.
조상숭배-이 역시 우리나라에서 뿌리 깊은 신앙이었다. 조상들은 죽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귀신으로 남아 있어 후손들에게 복을 줄 수도 있고 벌을 내릴 수도 있는 존재로 믿어져왔다. 그런 조상은 기도의 대상이 된다.
종교다원주의-산에 가는 길은 여럿이듯이 구원의 길도 여럿이라는 그럴듯한 이론으로 무장한 현대의 사상중 하나이다. 이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석가나 무하마드나 공자나 별 차이가 없다. 그중 누구에게나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라. 사람들이 무엇이라 하든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기도드리는 것은 잘못된 기도이다. 아무리 독선적이라 비난해도 할 수 없다. 기도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이것이 명확하지 않으니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무당 찾아다니고 점을 보러 다니고 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그들은 신자가 아니다. 교인 시늉만 하고 있을 뿐이다.
분명히 기억하라. 하나님 이외의 모든 기도 대상은 다 잘못된 것이다.
2) 응답할 수 있는 대상에게 기도해야 함.
솔직히 말해서 기도를 왜 하는가? 단순히 마음의 위로 차원인가? 그건 아니지 않는가? 사람들이 기도할 때 그 속에는 기도에 대한 응답을 염두에 두지 않는가? 응답되지 못할 기도란 것은 솔직히 말해 얼마나 의미 없는 기도인가?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도 기도는 하나님께 해야 한다. 하나님 이외의 것은 우상이며 우상은 사실상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도응답을 할 수도 없는 존재 앞에 기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우상의 무익함을 분명히 선언하였다.
"21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을 일으키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22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의 어떠한 것도 고하라 우리가 연구하여 그 결국을 알리라 혹 장래사를 보이며 23 후래사를 진술하라 너희의 신 됨을 우리가 알리라 또 복을 내리든지 화를 내리라 우리가 함께 보고 놀라리라 24 과연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며 너희 일은 허망하며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사 41장)
"20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아 너희는 모여 오라 한 가지로 가까이 나아 오라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능히 구원치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니라 21 너희는 고하며 진술하고 또 피차 상의하여 보라 이 일을 이전부터 보인 자가 누구냐 예로부터 고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느니라"(사 45장)
"1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리웠으니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은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 2 그들은 구부러졌고 그들은 일제히 엎드러졌으므로 그 짐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 자기도 잡혀 갔느니라"(사 46장)
예레미야 선지자도 우상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선언하였다.
"8 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도는 나무 뿐이라 9 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과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으로 꾸미되 공장과 장색의 손으로 만들었고 청색 자색 감으로 그 옷을 삼았나니 이는 공교한 사람의 만든 것이어니와 10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열방이 능히 당치 못하느니라 11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렘 10장)
"15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으며 16 그가 목소리를 발하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17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의 만든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18 그것들은 헛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시는 때에 멸망할 것이나"(렘 51장)
위의 구절들을 보면 우상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1) 우상은 천지를 만들지 못했다.
(2) 오히려 우상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3) 우상은 장래 일을 고하지 못한다. (귀신들도 현재와 과거의 일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은 있다. 그러나 미래는 아니다. 더 나아가 해결책은 주지 못한다)
(4) 우상은 화도 복도 내리지 못한다.
(5) 우상은 사람들은커녕 스스로도 구원해내지 못한다. (불이 나봐라. 사람들을 살리기는커녕 우상이 타죽는다).
어느 추운 겨울밤이었다. 떠돌이 고행자가 절에 와서 잠자리를 청했다. 그 가엾은 사람이 눈을 맞으며 떨고 서 있는 것을 보고 승려는 내키지 않았으나 그를 들어오게 하면서 말했다.
"좋아요. 하룻밤만 묵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는 절이지 여인숙이 아니오. 아침에는 떠나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그네가 묵게 되었다. 한밤중에 탁탁하는 이상한 소리에 스님이 놀라 법당으로 갔더니, 어처구니없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그네가 법당에 있던 목조 불상을 쪼개서 불을 지펴놓고 편안하게 쬐고 있었던 것이다.
승려가 소리쳤다.
"정신이 나갔소? 당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나 알고 있소? 그건 불상이오. 당신이 부처님을 태우고 있단 말이요?"
그러나 불이 서서히 커져갈 때까지 나그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작대기로 불을 쑤시기 시작했다.
승려가 거듭 화가 나서 말했다.
"이제 또 무얼 하는 거요?"
나그네는 말했다.
"부처님을 태웠다고 하시길래 그 부처님의 뼈를 찾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를 불사르는데 꼼짝 못하고 따버리는 존재가 무슨 구원을 베풀 수 있으며 무슨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런 우상 앞에 기도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 아닌가? 깨달으시길 바란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기도는 기도응답을 줄 수 있는 분에게 해야 한다. 그래야 기도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눅 11장에 기도에 대한 비유가 나온다.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눅 11장)
이 말씀의 중심은 강청하는 기도이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떡을 얻으려면 떡을 줄 수 있는 이에게 가야 한다는 것이다. 떡이 없는 이에게는 아무리 강청해도 줄 수가 없다.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실 수 있는 분에게 우리는 간구해야 한다. 그분이 바로 나와 여러분이 섬기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할렐루야.
2. 우리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전능하신 분
그러면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어떤 분이시기에 응답하실 수 잇는가?
주기도문에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하시면서 그 기도의 서두에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첫 번째로 우리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시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말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들리시는가? 구름 위에 계시다는 말인가? 아니면 우주에 계시다는 말인가? 아니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하늘에 실재하신다는 말인가?
다 아니다. 사실상 하나님이 계시다는 하늘은 우리가 이해하는 물리적인 하늘이나 천체가 아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은 우리가 헤아리거나 염두에 둘 수 있는 한계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지금 다 할 수는 없고, 어쨌든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분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성경에서 하늘은 창공을 의미하기도 하기만 또 다른 면에서 인간의 한계와 부족과 대비된 완전한 지혜와 능력의 영역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장)
"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장)
여기에서 하늘이 언급된 것은 사람과 대비한 하나님의 질적인 차이를 드러내는데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유한한데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며, 우리는 한계가 있는데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이름중 하나가 엘샤다이 아닌가? 전능의 하나님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전능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기도할 대상이 되실 수 있는 것이다.
1)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전능의 하나님이시라고 할 때 그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상황과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상황과 우리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믿으시는가? 다시 말해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믿으시는가?
하나님을 경외했던 다윗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다.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장)
이처럼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 명확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하나는 그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며 하나님을 속이는 것을 두려워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두려움이란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두려움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모가 노여워 할 때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자녀들이라면 그것도 문제이다. 그만큼 자녀들에게 있어 부모란 존재가 그리 비중 있는 존재는 아닌 것이다. 부모가 공포의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때로 징계를 내리는 부모가 두렵기도 해야 자녀들은 부모의 말에 보다 더 잘 순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을 향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바로 그 경외란 말 속에 두려움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워낙 크고 놀라우신 분이기에 그 사랑 속에 두려움도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함부로 행동하거나 죄를 짓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상황과 우리들에 대한 것을 다 아신다고 할 때 우리의 반응중 하나가 두려움이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는 기도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부끄러움 없이, 숨길 것 없이 아뢸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전지하시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기도한 다음에야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그제야 응답하시기 위해 뒤늦은 준비를 하시는 분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하나님은 여러분이 무엇 때문에 가슴앓이하며 고통스러워하는지 아신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신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도우심이 꼭 필요한 분야가 무엇인지 다 아신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가족과 이 교회 속에 얽히고설킨 사연들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장래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고 계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마음껏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의 사정을 아시지 않습니까? 나의 고통을 아시지 않습니까? 나의 눈물을 아시지 않습니까? 나의 필요를 아시지 않습니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오니 응답하여 주옵소서”
2) 환난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전능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 또한 전능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당하는 모든 환난을 벗어날 수가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환난과 풍파를 겪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단 한 번도 환난과 풍파를 겪지 않고 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놀랄만한 일이다. 그만큼인생에는 환난과 풍파가 많다.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은가? 그러한 순간에 바로 전능의 하나님께서 우리로 환난과 풍파를 벗어나게 하실 수 있다.
성경에서 환난과 풍파를 가장 많이 겪은 사람 중 하나는 바로 야곱일 것이다.
하나님이 야곱으로 환난을 벗어나게 하심
라반에게서 야곱을 건져주심
"17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약대들에게 태우고 18 그 얻은바 모든 짐승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얻은 짐승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 아비 이삭에게로 가려할쌔 19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하고 20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고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더라 21 그가 그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산을 향하여 도망한지 22 삼일만에 야곱의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23 라반이 그 형제를 거느리고 칠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산에서 그에게 미쳤더니 24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창 31장)
에서에게서 야곱을 건져주심
"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3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창 33장)
가나안 족속에게서 야곱을 건져주심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5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창 35장)
이 세 가지 기사에서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야곱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환난을 하나님께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것이다.
예전에 친구 목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 교회 목사님이 신서교회 이야기를 하더라고 했다. 그래서 친구 목사가 신서교회 설교 목사로 간 사람이 자기 친구라고 했더니 그 목사님이 걱정을 하더라고 한다. 그러면서 친구도 걱정이 되서 전화를 했다고 한다. 차라리 모른 척 가지 말지 왜 갔냐고 했다.
전화를 끊고 기분이 언짢았다. 왜 관심이 자기의 안전에만 있을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것이 우선은 아닌가? 정말 좋은 친구라면 용기를 주고 하나님의 뜻이면 담대하게 해 나가라고 말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쨌든 친구도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는 나를 위해 한 말이겠지만 내 맘을 오히려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와중에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기쁘게 해준 일이 있다.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하던 전종수 목사님이 내 아버지께 전화를 하셔서 이제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내가 신서교회에 가서 설교하도록 해야겠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3천만원 건축헌금도 해주셨다.
하나님께서 내 나름대로 겪은 어려움에서 나를 건져내신 것이다. 이러니 기도할만 하지 않은가? 모든 환난을 벗겨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니 말이다.
3. 우리의 기도 대상은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그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다같이 따라해 보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을 믿으시는가?
여러분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주님으로 영접하셨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그리하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장)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장)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은 바로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신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은 바로 나와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다.
1) 자녀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진 아버지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고 할 때 아버지가 자녀들에 대해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에 대하여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아무리 상대방이 능력이 있고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가 무자비한 자이며 사랑과 관심이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그 앞에서 두려워 떨 뿐 그에게 무엇을 마음 편히, 기대를 가지고 구할 수 있겠는가?
네로는 로마의 황제이다. 그에겐 절대 권력이 있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무엇이든지 줄 수 있을 만큼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힘이 있는 반면 무자비한 자였다. 자기 어머니까지 죽인 인물이다. 이런 인물에게 누가 가서 쉽게 도움을 구하겠는가? 두렵고 떨려서 그 앞에 나아가지도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에 분봉왕이었던 헤롯은 잔혹한 인물이었다. 이두메 출신인 그는 혈통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마리암네라는 왕족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그녀로 말미암아 두명의 아들을 낳는다. 그런데 자신의 아들들이 자신보다 더 많은 사람을 백성들에게 받자 아들들을 사형시켜버린다. 나중엔 아내인 마리암네마저 사형시켜 버린다.
어디 그뿐인가?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나타나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한 말을 듣고는 나중에 베들레헴의 영아들을 학살하기도 한다.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마 2장)
이런 헤롯에게 무언가를 구한다는 것은 참 어려울 것이다. 공연히 구하러갔다가 해만 받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우리의 사랑 많으신 아버지이시기에,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 아버지시기에 우리는 그 앞에 간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라고 하는 것, 자식을 낳아 기르다 보니 참 대단한 위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내가 하는 날. 효원이 예쁘지요? 효빈이도 예뻐. 효빈이도 예쁘죠? 효원이 예쁘죠?
왜 묻는가? 내가 아이를 예뻐하는 게 보이는 것임.
물론 아이는 잘 받아들이지 않음.
아내가 효원이 보고 아빠가 효원이를 엄청 사랑한다고 함.
효원이 사랑은 하지만 엄청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함.
이유? 힘들다고 하는데도 한문 시험 본다고. 에고~~
아무튼 아이들 사랑. 그러면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도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아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라고 할 때 이게 실상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구나”하고 말이다.
하나님은 바로 나와 여러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게신 분이시라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 속에 들어있다는 것, 이 놀라운 사실을 잘 깨달으시길 바란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능력으로 창조하신 후 인간을 그 속에다 집어넣으시고 무관심하게 내버려두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가 사소하게 생각하는 부분, 그래서 어찌 하나님께 이런 것까지 아뢸까 하는 부분까지 우리 이상으로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도와주기 원하시는 분인 것이다. 온 우주를 통할하실 만큼 크신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우리 심령 속에 거하실 만큼 구체적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은 바로 그런 아버지이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에게도 아버지가 되어 주십니까? 보다시피 난 형편없는 사람인데요”.
그렇게 묻는 사람에게 이야기 하나를 해드리겠다.
어릴 때부터 체구가 작고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항상 동네에서 따돌림을 받으며 비웃음과 멸시를 받으며 어렵게 소년시절을 보낸 벤 후퍼란 소년이 있었다. 참으로 벤후펴는 힘들게 어린 시절을 지났다. 그런데 그가 12살이 되었을 때 그 마을의 교회에 한 젊은 목사님이 새로 부임해 왔다. 소문에 그 목사님은 어느 누구든지 사람을 그대로 받아주며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벤 후퍼는 교회에 가본일이 없었다. 그러나 새로 오셨다는 그 목사님의 소문을 듣고는 교회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날 예배시간에 교회로 갔다. 가긴 했지만 일부러 늦게 가서 살며시 뒷자리에 앉았다가 축도를 할 때에는 아무도 모르게 살짝 빠져 나와 집으로 갔다. 이렇게 몇 주 동안을 교회에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목사님의 설교에 벤 후퍼는 너무나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넋을 잃고 있다가 보니 축도까지 끝나버린 것이다. 나오려고 하니 벌써 사람들이 통로에 죽 늘어서 있었다. 그래서 벤후퍼는 사람들을 따라 나오면서 목사님과 악수를 하게 되었다. 그때 목사님은 벤후퍼를 보고 물었다.
"네가 누구 아들이더라?"
주변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때 목사님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번지더니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 나는 네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겠다. 네가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지“!
주변의 사람들은 더욱 표정이 굳어지는데 목사님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거든!"
후퍼가 당황하며 빠져 나가는데 목사님은 다시 그의 등을 향해 말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아들답게 훌륭하게 살아야 한다!"
여러 해가 지났다. 벤 후퍼는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직무를 너무나 잘 수행했으므로 재선까지 되었다. 주지사 벤 후퍼는 훗날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날, 젊은 목사님을 만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바로 그 날이 테네시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묻는다. 젊은 목사는 초라하고 꾀죄죄한 소년에게 거짓말을 했는가? 아니다.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도 분명하지 않은가? 그리고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기에 우리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계신 분임이 확실하지 않은가?
하나님은 참으로 자녀 된 우리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계신 아버지이신 것이다.
2) 용서와 긍휼을 베푸는 아버지
하나님은 또한 용서와 긍휼을 베푸시는 아버지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유명한 비유인 탕자의 비유를 잘 알고 있다.
탕자의 비유.
아버지 생전에 유산을 요구한 탕자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허랑방탕하여 유산을 탕진한 탕자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비참해진 탕자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비로소 후회하며 아버지를 생각하는 탕자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돌아온 탕자를 환영하는 아버지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눅 15장)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아들의 간구를 보라.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참 불쌍하고 가련한 간구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간구에 응답 받을 만한 자격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다. 그런 꼴을 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온다고 하는 자체가 한심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들어줄 가치가 없는 아들의 간구에 아버지는 어떻게 응답하는가?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도대체가 납득할 수 없는 응답이다. 아들이 기대하고 상상한 것을 한참이나 넘어가 버린 놀라운 응답인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응답이 이러하다. 그러기에 성경은 말씀한다.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 3장)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하나님은 용서와 긍휼을 베푸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다. 우리가 조금 잘못 하면 그냥 벌을 내리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 것이 아닐까? 용서와 긍휼의 주님이 아닌 냉혹하고 무자비한 주님으로 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주님의 용서를 기대하지도 않고 스스로 생명을 끊었을까? 양심이 다른 사람보다 예민해서일까? 아무튼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로서 예수님을 그토록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놀랍다.
여러분은 어떠하신가? 주님께서 참으로 용서와 긍휼의 주님이심을 믿으시는가? 하나님께서 참으로 용서와 긍휼의 아버지이심을 믿으시는가? 혹시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3) 자녀를 생명과도 같이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또한 자녀를 생명과도 같이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이시다.
내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게 하는 아버지의 사랑이 있다. 가슴 찡하게 만드는 아버지의 애절한 사랑이야기이다. 바로 다윗의 압살롬 사랑 이야기다.
-압살롬의 반역
백성들의 마음 도적질
“1 이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전배 오십명을 세우니라 2 압살롬이 일찌기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서 이르되 너는 어느 성 사람이냐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3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4 또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공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5 사람이 가까이 와서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입을 맞추니 6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삼하 15장)
압살롬의 반역
“10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소리를 듣거든 곧 부르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11 그 때에 압살롬에게 청함을 받은 이백명이 그 사기를 알지 못하고 아무 뜻 없이 예루살렘에서 저와 함께 갔으며 12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삼하 15장)
다윗왕의 도망
“13 사자가 다윗에게 와서 고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 14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저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서 해하고 칼로 성을 칠까 하노라 15 왕의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우리 주 왕의 하고자 하시는대로 우리가 행하리이다 하더라 16 왕이 나갈 때에 권속을 다 따르게 하고 후궁 열명을 남겨 두어 궁을 지키게 하니라 17 왕이 나가매 모든 백성이 다 따라서 벧메르학에 이르러 머무니 18 모든 신복이 그 곁으로 지나가고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과 및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육백인이 왕의 앞으로 진행하니라”(삼하 15장)
다윗의 울음
“30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가니라”(삼하 1장)
전쟁을 앞두고 다윗의 부탁
“5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장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삼하 18장)
웬 정신 나간 소리인가?. 압살롬이 어떤 놈인가? 아버지인 자신에 칼을 들이민 놈이 아닌가? 지금 왕궁을 떠나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것도 다 그놈 때문이 아닌가? 그놈은 기회만 되고 여건만 되면 지금이라도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놈 아닌가? 그런데 다윗은 그런 불효막심한 아들놈과 싸우러 가는 자신의 군사들에게 아들을 위해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아버지의 마음이다.
압살롬의 죽음
“14 요압이 가로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15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 열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 죽이니라”(삼하 18장)
압살롬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반응
“31 구스 사람이 이르러 고하되 내 주 왕께 보할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장)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거두 절미하고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 아닌가? 그것도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면서 말이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고 할 때 그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말씀한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4)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요 3장)
결론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늘에 계신 분. 전능의 하나님.
또한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우리의 기도 대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신가? 그 아버지 앞에 아뢰시고 응답받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포기하지 말라. 절망하지 말라.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여러분의 마음이 냉냉해 지도록 버려두지 말라. 우리의 기도 대상이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씨름하시고 눈물지으시고 부르짖으셔서 응답을 체험하는 기적의 당사자가 되길 축원한다.
설교 제목/ 우리는 누구게 기도하는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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