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도 죽고 여동생도 죽은 상황에서 일어난 사람(박정렬 사장)/ 안희환
어려운 과정을 겪지 않고 성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항해를 계속 하다보면 풍랑을 만나듯이, 길을 계속 가다보면 내리막길도 있듯이 인생살이에는 다양한 시련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 시련을 극복해가면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공동묘지에 누운 사람들이나 고난을 전혀 겪지 않는 것이지 살아 숨 쉬는 사람이라면 고난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겠는지요?
양복분야의 장인이라고 일컬어지는 박정렬 사장(명품 보령 양복)도 많은 역경을 뚫고 나온 사람입니다.
박정렬 사장은 군 장교로 근무하는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 후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는 군에서 퇴역하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때 여동생이 태어났고요. 그런데 아버지가 강원도 군부대에 근무하면서 생긴 감기와 천식, 폐의 질병으로 인해 3년간 투병생활을 하다가 돌아가시고 그는 11살의 나이에 가장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병으로 인해 논밭을 팔았기에 가진 돈이 없었던 어린 박정렬은 땔감을 얻기 위해 새벽마다 산에 올랐고, 우물을 파기도 하면서 돈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 했습니다. 그런데 시련이 또 닥쳐왔습니다. 3살 된 어린 여동생이 잠만 자는 날이 계속되다가 경기를 일으키고는 깨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돈이 없어 병원 한번 못 데려간 채 동생을 잃은 것입니다.
먹고 살 길을 찾던 박정렬은 외할머니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게 됩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했기에 외할머니가 무섭고 야속하기만 했습니다. 17살 때는 전주에 있는 친척집으로 갔고 그곳에서 재봉기술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다가 월급 500원을 받기로 하고 전주의 한 양복점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벽에 친척집에서 일어나 6km되는 거리를 걸어 다녔는데 양복점의 기술자는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고 종처럼 잔심부름만 시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정렬은 너무 배고픈 상황에서 분식집에서 찐빵을 얻어먹었는데 그 찐빵 때문에 분식집에서 배달된 짜장면의 양이 줄었다는 배달 소년의 말 한 마디에 양복점의 가술자에게 각목으로 두둘겨 맞습니다. 빨간 피가 흘러 바지를 적셨는데 화장실에 가서 피를 씻으며 혼자 울었습니다. 결국 그는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그 양복점을 나왔습니다.
갈 곳이 없는 그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고 한 양복점에서 일하게 됩니다. 양복 기술을 배우고 싶은 열망이 간절했던 그는 기술이 좋다는 곳 20여 곳을 찾아다니며 양복기술을 배웠습니다. 점점 실력 있는 양복 기술자로 인정받게 되었던 그는 초등학교만 공부한 것으로 만족할 수 없어서 검정고시 학원 야간반에 들어가 공부를 했습니다. 하루 4시간씩 자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는데 마침내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박정렬은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50만원인 가게가 나왔을 때 돈이 없으니 보증금을 줄이고 월세를 늘이기로 해서 계약을 합니다. 조그만 개인 양복점의 사장이 된 그는 아침 시부터 밤 9시가지 일을 했고 밤 9시 넘어서는 거래처를 찾아다녔습니다. 단골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단골의 소개로 새로운 단골이 늘어가면서 고객이 늘어갔습니다. 이렇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상황에서 아내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줄 오해하여 부부싸움을 많이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명품 보령양복은 작원 20명을 둘 정도로 성장하였습니다. 양복점의 평수도 넓어졌습니다. 그 와중에 또 문제가 생겼는데 건물 주인이 건물을 판다고 나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공들여 인테리어까지 한지 7개월 지난 후의 일입니다. 낙심 가운데 빠졌던 박정렬사장은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였는데 그 무렵 대기업의 기성 양복이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맞춤 양복이 사양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거기에다가 IMF 까지 터져버렸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박정렬 사장은 엉뚱한 발상을 합니다. 국민일보에 전화를 걸어 어려운 농어촌 목회자들에게 10만 원대 가격에 양복을 맞춰주겠다는 내용을 신문에 내달라고 한 것입니다. 20년 전 농촌의 한 목사님이 다 닳는데다가 계절에도 맞지 않는 양복을 입고 있기에 양복을 해주었는데 그 목사님이 기뻐하시던 모습이 떠올랐기에 벌인 일입니다. 그리고 매년 그와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좋은 길이 열립니다. 인터넷을 통한 맞춤양복 주문 시스템을 개발한 것입니다. 고객들이 인터넷을 통해 주문하면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의 양복이 배달되는 시스템인데 사용해본 고객들은 편리하고 신기한 나머지 방송국에 제보를 하였고 덕분에 공중파 뉴스에 소개가 되었습니다. 명품 보령양복은 지금 종로의 매장을 비롯해 서울 두 곳에 공장이 있습니다. 박정렬 사장은 국내 최고의 맞춤양복 브랜드로 키우기 위해 열심히 달리는 중입니다.
허중희님의 [대박 기업 대박 가게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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