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조국 / 안희환
화성님의 글을 읽고 서글픔이 마음이 스며듭니다. 그 무엇이 한 나라 국민들 간에 이토록 긴 평행선을 만들게 했는지요? 그 무엇이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상대를 향해 적이라 규정하게 만들었는지요? 이런 우리나라의 지난 역사가, 현실이, 그리고 아직도 불투명한 미래가 마음 한 구석에 먹구름을 드리웁니다.
화성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아래는 화성님이 제게 쓰신 글입니다. 논의에 해당하는 부분만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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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나와 싸우고 싶지 않다고 손 내미는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고 싸우자고 하는 것인가? 나한테 호감이 간다고, 나를 인정하고 칭찬까지 하는 사람이 내민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며 그의 글에 시비와 태클을 걸고, 그의 글에 반박성 트랙백을 거는가?
혹시, 코지토님이 말한 그 '슬픔의 힘' 때문은 아닐까?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내 삶의 전환점이 되게 한 네크라소프 시의 한 구절이다. 안희환님과 나의 차이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 슬픔은 있어도 노여움은 없다.
판잣집을 철거당해야 하는 슬픔과 고학을 하며 학교를 다녀야 했던 슬픔은 있어도, 단순히 그 철거반이 미웠을 뿐, 그 가난이 싫었을 뿐, 그래서 지금은 주먹으로 내리쳐도 괜찮은 집이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이 있을 뿐, 그것들에 대한 분노는 없다.
하루종일 추위에 떨며 과일을 팔아도 남는 것 없는 아버지와 같은건물 아저씨의 슬픔은 있어도 왜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제기가 없고, 단순히 퉁명스러웠던 아저씨가 밑져가 면서까지 감 세 개를 더 주신 사실에 고마워하는 따뜻함은 있으나, 그 아저씨의 슬픔에 대한 분노는 없다.
단순히 여기까지라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는 그의 신앙심을 감안해서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그의 노여움은 엉뚱한 곳에서 분출되었다. 뉴라이트를 지지하는 글에선, 노무현정부와 개혁,진보세력을 똑같은 좌파로 규정하며 그들에 대해 노여워 하였으며, 전교조를 다룬 글에선 노동자와 전교조를 싸잡아 비판하며 그들의 행동을 마치 조폭의 그것과 동일시 하며, 나라의 미래를 위해 전교조를 해체해야 한다는 분노를 드러냈다.
즉, 그에게 있어 슬픔은 슬퍼해야 하는 것이고, 분노는 분노해야 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슬픔과 분노의 인과관계는 전혀 없으며, 둘은 모두 똑같은 선 상에서 각기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는 별개의 점일 뿐이다.
왜 그럴까? 나는 그 이유를 코지토님의 '슬픔의 힘' 이란 글에서 찾았다. '이 세상에는 정말로 많은 슬픔과 아픔이 있다. 내 슬픔과 아픔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슬픔과 아픔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의 슬픔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어야 타인의 슬픔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는 스스로의 슬픔을 진정으로 느끼지 못했기에 타인의 슬픔을 진정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슬픔에 대한 진정성이 없기에 그에 대한 노여움도 없고,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진정성이 없는 슬픔은 더이상 슬픔이 아니다. 감사와 축복이고, 추억거리며 따뜻함이다. 따라서 철거의 기억도, 장학금으로 어렵게 다녔던 학교시절도 그에겐 이미 기쁨으로 승화된지 오래인 것이다.
그러니,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으로 태어났으면, 거기게 만족하며 감사하게 살아야 하고, 거지는 거지대로 노숙자는 노숙자답게 살아야 하는 것처럼, 선생님도 조용히 가르치면 될 것을 '노동자처럼' 거리로 나와 구호를 외치고, 무슨무슨 투쟁을 하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이렇게 기쁘고 아름다운 세상을 바꾸자고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 수 밖에. 감옥에 갇힌 선생님들의 슬픔을, 분신을 하고 농약을 먹어야 하는 노동자 농민의 슬픔을 어찌 진정으로 느낄 수 있겠는가?
그가 왜 그의 슬픔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으나, 거기엔 아마 그의 하나님이 많은 작용을 했을 거란 생각은 든다. 그는 나에게 묻는다. 생각이 다르면 모두 적이 되어야 하느냐고?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고, 좋은 관계가 될 수도 있지 않냐고?
어떤 분들은 또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착하신 분 같은데, 순수한 분 같은데 왜 굳이 그를 적으로 모냐고? 다양한 생각들을 말할 수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고?
나는 이런 다양한 생각들 안에 포장된 잘못된 슬픔과 분노를 경계한다. 스스로가 기득권 세력임을 표방하며,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적임을 커밍아웃 한다면 굳이 내가 그를 적으로 규정할 필요도 없고, 굳이 이런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 드러난 적들은 위험하지도 않기에 경계할 필요없이 맞서 싸우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서운 것은 내부의 적이며, 그중에서도 스스로가 친구임을 자처하는 적이다. 그 스스로가 정말로 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 위험은 더 커질 수도 있다. 그의 글을 읽는 사람중 단 한명이라도 그의 잘못된 슬픔과 노여움의 방식이 전염될까 두렵다. 아픔과,슬픔과,가난과,억압과 고통을 그저 아름다운 눈으로만 바라보려는 생각이 두렵다. 그것들에 대한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어 잘못된 분노로 변질될까 두렵다.
슬픔이 때로 힘이 되는 것을 감추고 슬픔을 슬픔으로만 간주하는 그 단순함이 본질이 다른데 생각만 다를 뿐이라는 그 가벼움이 무섭다. 한 나라안에 두 개가 아닌 여러 개의 국민이 있어도 된다. 동일한 사안에 대해 수십, 수백의 생각과 의견이 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본질이 다르고 목적이 다른 것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그들은 한 나라 안의 딴 국민일 뿐이고, 따라서 그들은 위험하다. 그리고, 스스로가 딴나라 국민임을 인정하지 않는 그들은 훨씬 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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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대한 논의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더 많은 논쟁거리만 가져올 뿐이겠지요. 화두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슬픔’에 대해서만 간단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마다 슬픔이 있을 수 있지만 사람마다 슬픔을 표출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슬픔을 안으로 삭일 것이고
어떤 이는 슬픔을 표출하려다가 포기할 것이고
어떤 이는 슬픔을 당당하게 밖으로 표출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슬픔을 가져온 이를 향하여 분노할 것이고
어떤 이는 그런 일을 겪는 자신 때문에 분노할 것이고
어떤 이는 분노할 줄도 모른 채 슬퍼하기만 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슬픔을 바탕으로 들고 일어설 것이고
어떤 이는 그 슬픔에 자족할 것이고
어떤 이는 그 슬픔을 다른 방식으로 승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요? 꼭 분노로 표출되어야 그 슬픔이 진정한 것이며 투쟁으로 이어지는 것만이 진정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일까요? 오히려 따스하게 감싸안는 것이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더 큰 위로와 격려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많이 경험한 사람으로써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한몫을 감당하는 것은 아닐까요?
더 이상 왈가왈부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화성님은 화성님 나름대로의 길을, 나는 나 나름대로의 길을 가야할 것 같습니다. 화성님은 나를 적으로 규정하셨고 그것 때문이 마음이 아프지만 나는 내 성향상 화성님을 여전한 벗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아래는 화성님의 글을 읽자마자 썼던 글인데 그 글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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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의 생각과 마음이 일치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지만 특별히 내가 마음을 열고 다가간 상대에게 그런 일을 겪는 것은 일종의 상처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누구를 원망할 생각도 나무랄 생각도 없습니다. 그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모습 중 하나일 테니까요. 그 하나하나를 부정하다 보면 나란 존재의 조각은 다 사라져버려 빈 공간을 남겨 놓고 말테니까요.
그처럼 함께 이 땅위에 서 있으면서도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는, 아니 가까워질 수 없는 아픔을 시로 써보았습니다. 철길이란 제목의 시인데 어쩌면 지금의 내 마음 상태를 잘 묘사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이 나라는 왼쪽과 오른쪽에 나란히 서 있으면서 오른쪽은 왼쪽에게 왼쪽은 오른쪽에게 다가가지 않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중심에 나 자신도 자리 잡고 있겠지요. 나만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측면이 분명히 있을 테니까요.
아무튼 서글픈 세상입니다.
철길/ 안희환
나란히 서 있으나
서로는 만나지 못하네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긴 거리였는데
산도 들도 강도
함께 건넌 긴 시간들
안에서 서로를 떨구지 못하는
질긴 인연이었는데
결국 만나진 못하네
용도가 폐기되어
정해진 길 위에서 뜯겨지면
한꺼번에 던져진
철공소의 창고 안에서
그제야 만나볼 터인가?
구태여 남겨둔
미움의 거리에 질려
살짝 상대에게 구부러질
요상한 날은 없는 건가?
이대로 가야겠지.
이것도 삶의 한 방식
서글픈 장마에 잠긴
너와 내 위로
기차가 울며 달려가도
그렇게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을 미래를 애달파하며
녹슬어가야겠지.
녹슬어가야겠지.
하루가 저물어갈 때면 지나온 시간을 뒤돌아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곤 합니다. 사랑하면서 살아도 아쉬운 세상 우리는 왜 이리 아웅다웅하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꼭 사랑하며 사는 것이 역사의식의 부재인 걸까 하고요.
어린 시절 종종 바라보던 철길은 사실 낭만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보여주는 거울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철길 속에서 인간의 비애를 보니 나도 이제는 조금이나마 나이라는 것을 먹나봅니다. 평범하게 지나치던 사물들 속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지금 철길 안에서 녹슨 심장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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