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복 받은 기자입니다. 중동에서 가장 가기 힘들다는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두 나라를 다 다녀온 기자가 됐습니다. 이란은 조만간 경제 제재가 풀리면 가기 힘든 나라에서 빠지겠죠. 가기 힘들다는 의미는 비자가 쉽게 안 나온다는 말이죠. 사우디는 관광 목적으로는 성지순례객 말고는 비자를 잘 내주지 않는 나라입니다. 생각보다 훨씬 폐쇄적인 나라죠.
이런 나라가 이번 지방선거를 취재하겠다니 일주일 만에 비자를 내줬습니다. 그만큼 사우디 왕정이 건국 이래 처음 여성이 참여하는 지방선거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성 참정권 허용은 2011년 아랍권에 몰아 닥친 민주화 시위에 대한 위기감 때문에 결정됐습니다.
이유가 어쨌거나 여성 인권 후진국이란 오명을 듣는 사우디로서는 달라진 모습을 세계에 알리고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리야드 랜드마크인 킹덤타워에서 찍은 야경● 사우디로 가는 여성
사우디로 향하는 여객기에 타기 위해 탑승장에서 기다리던 중 그동안 다니던 출장 때와는 뭔가 다른 점을 발견했습니다. 여성 승객이 너무 많았습니다. 탑승객의 4분의 3 이상이 여성, 아랍권 여성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절반은 갓난아기와 어린아이를 동반한 여성들이었습니다. 아기들에게 생애 처음 압력차로 귀가 먹먹해지는 현상은 큰 공포심을 안겨주게 마련입니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사우디 리야드로 가는 2시간 30분의 비행시간 동안 정말 동서남북으로 아기의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우연히 아기가 많은 날이겠거니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궁금해지더군요.
왜 이리 많은 아기들이 카이로에서 리야드로 향하는지…. 그래서, 탑승장부터 짐을 들어준 아기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어느 나라냐고? 이집트라고 하더군요. 근데 왜 아기를 안고 사우디로 가냐고 또 물었습니다. 남편이 사우디에서 일을 한답니다. 고향인 이집트에서 아기를 낳고 다시 사우디로 돌아가는 거였습니다.
살펴보니 함께 비행기에 탄 거의 모든 여성들은 이집트 방언인 ‘암미야’를 쓰더군요. 그때서야 “아… 그런 거였구나” 고개가 끄덕여지더군요. 사우디에선 같은 아랍어를 쓰면서도 인건비가 낮은 이집트인들이 상당수 일하고 있습니다.
그 가족들이 출산을 위해 고향을 찾았다가 다시 사우디로 돌아가는 길이었던 겁니다. 여성과 아기의 수로 짐작하건 데 정말 많은 이집트인들이 사우디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 사우디 여성과 사우디에 사는 여성
사우디는 이슬람의 발상지입니다. 그만큼 이슬람의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곳 중에 하나입니다. 여성의 사회활동 뿐아니라 옷차림까지 엄격히 규제합니다.
사우디 땅을 밟고 있는 여성은 국적을 불문하고 야외나 공공장소에선 한결 같은 옷차림을 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아바야’입니다. 아바야는 손과 얼굴을 제외한 온 몸을 가리는 검은 망토나 드레스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 사우디에는 사우디인보다 더 많은 아랍인들이 사는데 똑같이 아바야를 입은 여성들 가운데 누가 사우디 여성이고 누가 아닌지 구별을 어떻게 할까요?
선거에 처음 참여하는 사우디 여성의 기대감을 인터뷰해야 했던 저로서는 어떻게든 똑같이 아바야를 착용한 아랍여성 가운데 사우디 여성을 찾아내야 했기에 구별법이 필요했습니다.
제 나름대로의 분석으로는 ‘얼굴 가리개’가 다릅니다. 사우디는 엄격하기로 둘째가면 서러운 이슬람 국가라고 했죠. 그래서인지 사우디 여성은 열에 아홉은 머리카락과 얼굴을 모두 가리고 눈만 내놓은 ‘니캅’을 대부분 착용하더군요. 자신의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얼굴을 드러내는 걸 금기시 하는 탓에 최대한 자신을 감추는 것이죠.
반면에 이집트나 요르단, 팔레스타인 (사우디에서 일하는 아랍인의 대부분은 경제사정이 좋지 못한 이들 세 나라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여성의 경우 아바야에 목과 머리카락을 가리는 ‘히잡’을 착용합니다. 이들 나라의 여성들은 맨 팔과 다리를 내놓고 다니지는 못하지만 여성의 자유가 훨씬 많이 보장되는 나라입니다.
사우디에서 여성은 ‘아바야’로 온 몸을 가려야 합니다
이슬람권 여성이 가장 많이 착용하는 가리개 ‘히잡’또 다른 차이점은 사우디 여성들은 저와 눈이 마주치면 곧바로 시선을 돌리지만 다른 아랍권 여성들은 신기한 듯 저를 지켜본다는 겁니다. (물론 제가 든 카메라를 보는 거겠지만요) 아마도 관습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우디에선 여성들은 낯선 남성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물론 함께 자리를 하는 것도 금기시합니다. 그래서, 쇼핑몰이나 거리같은 공공장소에서 남성과 여성이 나란히 있는데 왠지 부부가 아닌 것 같으면 여지없이 종교경찰이 나타나 신분증 제시를 요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부가 아닐 경우 자국인은 철창행, 외국인은 추방을 당하기 일쑤라고 합니다. 나중에 사우디에 가시면 제 방법으로 한번 구별해보세요. 적중률 90% 이상입니다.
그러면, 비이슬람권 여성의 옷차림은 어떨까요? 그냥 ‘아바야’만 입습니다. 머리카락도 목도 가리지 않고 드레스 입듯이 아바야만 착용하고 자유롭게 다닙니다. 물론 이것도 차별이다 규제다라고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사우디에서 비이슬람권 여성이 누리는 특권아닌 특권인 셈입니다.
● 사우디 여성의 쇼핑법 ‘일단 구매’
사우디에선 여성의 운전이 금지돼 있습니다. 남성 보호자의 허가가 없으면 사회활동도 안 됩니다. 그러다 보니 길거리에서 사우디 여성을 보는 건 하늘의 별 따기 수준으로 어렵습니다. 사우디 여성을 촬영해야 하는 입장에서 잔머리를 굴린 게 쇼핑몰 방문입니다.
리야드의 랜드마크인 99층 짜리 킹덤타워에는 고급 쇼핑몰이 있습니다. 그 안에 가면 온갖 명품 매장이 가득한데 검은 아바야와 니캅 차림의 사우디 여성들이 한가롭게 쇼핑을 즐기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드넓게 펼쳐진 흰 대리석 바닥에 이와 대비되는 검은 아바야 차림의 여성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다니는 모습은 중동에 사는 저에게도 이국적인 풍경이었습니다.
사우디 쇼핑몰
대놓고는 못하고 멀찌감치 서서 사우디 여성들을 촬영하고 있는데 문득 궁금하더군요. 아바야에 니캅까지 쓰고서 나한테 어울리는 옷을 어떻게 고를까? 옷이 나한테 어울리는 지 내 몸에 맞는지 입어봐야 할 텐데 불편하지 않을까?
그래서, 제 일을 도와준 교민 여성께 물어봤습니다. 답이 의외로 간단하더군요. 안 입어보고 그냥 산답니다. 맘에 들면 일단 산답니다. 왜? 매장에 여성 탈의실이 아예 없답니다.
옷을 갈아입고 그 옷이 어울리는지 지켜보는 것조차 금지하는 거죠. 일단 사놓고 집에 가서 입어본 뒤 마음에 안 들거나 사이즈가 다르면, 환불하거나 교환을 하러 또 와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번 살 때 여러 벌을 사이즈도 다양하게 구매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 뒤 불필요한 건만 다시 환불하는 방식을 쓰더군요. 정말 사우디에서 여성으로 사는 건 쉽지 않더군요. 쇼핑몰에 오려면 남성이 운전을 해줘야 올 수 있는데 옷이 안 맞으면 또 남성에게 부탁을 해야 하고….
그래서, 쇼핑몰에서 아이디어를 낸 게 여성 전용 매장입니다. 쇼핑몰 한 층 전체를 여성만 출입가능한 매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선 여성들이 니캅과 아바야도 벗어 던지고 집에서처럼 자유롭게 매장을 활보하고 쇼핑을 할 수 있어 인기라고 합니다. 물론 그 곳의 매장은 그야말로 ‘명품’만 모아놨다고 합니다. 물론 전 들어가보지 못했습니다.
● “5분만 여성이고 싶어라”
사우디에서 여성과 남성의 공간은 뚜렷하게 구별돼 있습니다. 이슬람 사원에서도 남녀가 들어가는 출입구가 다르고 (상당수 이슬람사원에는 남성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성은 집에서 따로 기도를 드립니다.) 식당에서도 여성과 남성의 출입구가 다릅니다. 공간도 분리돼 있습니다. 남성 출입구에는 ‘싱글’이라고 적혀 있고 여성 출입구에는 ‘패밀리’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성’아니라 ‘패밀리’라고 적힌 이유는 여성이 남성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외출이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인지 사우디의 식당에서 여성 혼자 식사를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여성 전용 투표소에는 취재진도 여성만 출입이 가능합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여성은 남성과 별도 장소에 마련된 ‘여성 전용 투표소’에서 투표를 했습니다. 여성 전용 투표소에는 취재진도 남성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선거 당일 이른 아침부터 여성 투표소에는 투표장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정문 밖에서 투표를 하러 가는 여성만 열심히 촬영하는 ‘남성’ 취재진이 가득했습니다.
아바야를 걸치고 당당하게 웃으며 들어가서 여성 유권자를 자유롭게 인터뷰하고 촬영하는 여성 취재진을 마냥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옆에 있던 외신 기자의 농담이 기억 납니다.
“난 사우디 살면서 단 한 번도 여성을 부러워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 이 순간 만은 5분 만이라도 여성이 되고 싶다.” 그랬더니 그 옆에 있던 다른 기자가 한 마디 거들더군요. “여기 투표장 밖에 나가면 바로 생각이 달라질 걸?”
전 운 좋게 여성 교민의 도움으로 투표장 안을 촬영할 수 있었는데, 이러니 취재진들이 너도나도 이 분께 들어가서 자신의 카메라로 한 컷만 찍어줄 수 있냐며 애원하는 진풍경도 벌어졌습니다.
● 구별과 차별
사우디에서 여성이 겪는 사회적 제약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런 일들은 이번 선거를 통해 국내언론에서도 많이 보도된 만큼, 저는 이런 걸 좀 비껴가서 사우디 여성의 생활을 들여다보는 방향으로 글을 써봤습니다.
사우디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겪는 일을 누구는 ‘차별’이라고 하고 누구는 ‘구별’이라고 합니다.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자격을 가진 나라일수록 ‘차별’이라고 부르고 그 반대일수록 ‘구별’이라고 부릅니다.
원래 이슬람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없습니다. 그저 이슬람이란 종교가 태동할 시기 아랍권은 유목부족간에 내일을 알 수 없는 치열한 전투와 다툼이 이어졌고, 그 혼란기에서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여성은 몸을 드러내선 안 된다’와 같은 가르침이 생겨난 것이죠.
그런데데 이것을 일부 남성 우월주의적인 성직자들이 여성에 대한 규제로 재해석하고 확대하면서 사우디 여성과 같은 상황이 연출됐다고 봅니다.
이번 선거에서 저는 사우디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한 작은 희망을 봤습니다. 투표를 하겠다는 등록 여성은 2%에 그쳤지만 그 가운데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한 수는 80%가 넘었습니다. 남성 유권자의 두 배입니다.
이런 작은 노력이 쌓여가면 언젠가 사우디에서도 여성이 운전하고 마음껏 여행을 다니고 사회활동을 하는 그 날이 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세상의 반이 여성이듯 사우디의 반도 여성입니다. 사우디 사회는 지금 자신의 잠재력을 절반밖에 쓰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성의 권리 신장과 적극적인 사회활동 참여는 사우디의 인적 능력을 배로 키울 수 있는 지름길일 수 있습니다.
정규진 기자(soccer@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