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환의 칼럼

아내와 아이들이 다 죽었어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명/ 안희환목사(예수비전교회. 기독교싱크탱크 대표)

안희환2 2015. 8. 10. 10:56

아내와 아이들이 다 죽었어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명/ 안희환목사(예수비전교회. 기독교싱크탱크 대표)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고 고난 없이 영광이 없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아름다운 결실 뒤에는 남모르는 헌신과 희생, 수고와 땀과 눈물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고 보면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임과 동시에 영적인 법칙이기도 합니다. 진정 추수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울더라도 뿌려야 하는 것이겠지요.

아도니람 저드슨 선교사님은 미얀마어 성경번역을 완간한 위대한 역사를 이룬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선교 활동을 통해 미얀마에 21만 명 정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터전인 모국에서 목회를 해도 이 정도의 결실을 이루어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도니람 저드슨 선교사님이 이루어낸 열매들은 그야말로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아도니람 저드슨 선교사님이 선교사로 사역하기 위해 지불한 대가를 생각해보면 마냥 대단한 일을 했다는 식으로 결론 내리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는 한 영국 선교사의 선교사역 보고서를 읽는 중에 크게 감동되어 미국 최초의 해외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때 그는 막 결혼한 상황이었는데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을 겨를도 없이 인도 선교사로 나갑니다. 후에 그는 인도를 떠나 미얀마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인도에서의 사역이 동인도 회사의 방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미얀마에서의 사역은 결코 순탄하지가 않았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 선교사님 부부는 열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겨야 했습니다. 자녀들 역시 병으로 인해 사산되거니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곤 했습니다. 그토록 가슴 아픈 일들을 겪으면서 6년간 온 힘을 다해 선교한 결과 역시 신통치 않았습니다. 멍나우라는 사람 하나에게 세례를 주는 것뿐이었습니다(1819년 6월 27일).

질병과 자녀들의 죽음이라는 극심한 고통만으로도 견디기 힘든데 큰 고통이 다시 닥쳐왔습니다. 영국과 미얀마는 전쟁을 치르는 상황에서 아도니람 저드슨 선교사님이 간첩으로 몰리게 된 것입니다.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 그의 몸이 망가져갔습니다. 아내 역시 그 동안 앓던 병과 남편의 감옥살이 등 힘겨운 과정들을 겪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아도니람 저드슨 선교사님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얀마를 떠나지 않았고 오직 성경 번역과 전도 활동에만 매달렸습니다. 1834년에 그는 미망인인 사라 보어드맨 선교사님과 재혼했고 그녀와 함께 열정적으로 선교사역을 이어갔습니다.

미얀마어 성경을 다 번역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했던 아도니람 저드슨 선교사님은 1850년 4월 1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의학적인 그의 사인은 결핵이라고 합니다. 아무런 장례 절차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평소에 자주 입던 검정색 양복 차림으로 바다에 수장되었다고 하니 세상적인 시각으로는 초라한 장례식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영광스러운 죽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 선교사님의 생애는 제게 강력한 도전을 줍니다. 제 스스로에게 묻기도 했습니다. “안희환 목사야. 만약 네 아이들이 다 죽고 네 아내마저 세상을 떠난다 해도 너는 전력을 다해 목회를 할 수 있겠냐? 질병으로 온 몸이 망가지고 감옥살이를 하며 혹독한 고문을 당했어도 충성스럽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냐?” 결코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은 채 슬픔과 외로움 속에서 그래도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고백하며 사명을 감당해나가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골고다를 올라가시다가 쓰러지시던 예수님의 종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본받고 싶습니다. 편안하고 안락하고 보장된 삶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격미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