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외에는 없다 막9:14-29
14.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전** 목사님이라는 선배가 있다. 이분은 지금 대구에서 단독목회를 하고 계신다. 그런데 그전에 군산에서 **교회라는 1000명이 넘게 모이는 교회의 부목사로 있었다. 그때 나는 그 교회의 중등부 수련회와 청년부 수련회의 강사로 가 있었는데 전** 목사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사실 제법 규모가 있는 교회의 부목사는 상당히 바쁘다. 그것도 조금 목회와는 상관없는 일로 바쁘다. 그러다 보니 몸이 피곤하고, 그러다 보니 기도할 시간도 없이 지냈다고 한다. 기도를 안하니 목사님이라고 해도 영력이 없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런데 그 교회에 귀신들린 처녀가 있었는데 전** 목사님을 보고는 조롱을 하기 시작했다. “야 네가 목사냐? 돼지 새끼지. 네가 목사냐? 돼지새끼지?”. 체격이 뚱뚱한 편인 그 목사님은 챙피해 죽는줄 알았다고 한다. 더구나 주변에 교회 성도들도 있었는데 망신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퍼져서 부목사로 생활하는데 큰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가뜩이나 대접 못받는 것이 부목사라는 위치인데 귀신들린 처녀에게 조롱받은 부목사를 누가 대접해 주겠는가? 그렇다고 귀신이 목사대접을 해주는 존재도 아니고 결국 그 목사님만 큰 손해를 보고 말았다.
유익을 주지 않고 사람들에게 손해를 주는 존재 그것이 바로 귀신의 존재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마귀가 있다.
또 하나 이야기를 해 드리겠다. 내 친구 가운데 전영생 목사사님이 있다. 이 목사님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들었던 이야기이다. 전영생 목사님은 그때 오산리기도원에서 사역하고 있었는데 그 기도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하루는 기도원의 강사 목사님이 설교를 유창하게 잘 하고 한 귀신드린 사람을 위해서 공개적으로 기도를 해주게 되었는데 그게 문제가 되었다.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귀신이 나가기는커녕 당당하게 있는 것이다.
목사님이 얼마나 창피했겠는가? 그래서 더욱 소리 소리 지르며 귀신에게 명령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 이때 귀신이 나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여기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귀신들린 사람이 한 마디를 한 것이다. “나갈만해야지 나가지.”
결국 그 목사님은 망신은 망신대로 당하고 유창하게 설교한 것도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로 유익한 일이 하나 발생했다. 내 친구인 전영생 전목사님을 비롯해서 기도원의 사역자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 것이다. 영력 없으면 귀신에게 조롱당하는 것을 보고는 3시간씩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은 어떠하신가? 여러분은 영력이 있는가? 다시 말해 여러분은 기도하는 삶을 사시는가? 아니면 마귀에게 조롱당하는 삶을 사시는가? 여러분은 귀신의 역사를 이기며 사시는가? 아니면 어둠의 영들에게 끌려 다니며 사시는가?
오늘 “기도 외에는 없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눌 터인데 이 말씀을 통하여 회개하고 돌이키는 시간, 도전받고 기도하기로 결단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란다.
오늘의 본문 이야기로 돌아오자.
1. 변화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
1) 변화산에 올라가신 예수님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변화산 사건 이야기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산 밑에 이르셔서는 모든 제자를 다 데리고 올라가지 않으시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명의 핵심적인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가셨다.
그때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셨다.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그것만이 아니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여러분은 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생각하시는가? 그 두 사람이 예수님과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셋 다 율법과 관련이 있다. 모세는 율법을 선포한 자요, 엘리야는 무너지는 율법을 다시 수축한 자요, 예수님은 그 율법의 완성자이시다. 그리고 이 세분이 동시에 보여진 것은 참으로 놀랄만한 사건이었다.
2) 변화산에 계속 있기를 원했던 베드로
그것을 본 베드로는 그 영광스러운 모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예수님께 변화산에 계속 있자고 했다.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아마도 베드로의 눈에 변화산의 은혜스런 모습이 좋아보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베드로의 모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도원 같은데서 큰 은혜를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은혜의 자리가 좋아서 자꾸만 찾아가지 않는가?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알 듯이 은혜도 은혜를 받은 자가 은혜의 맛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보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
그러면 변화산에 계속 간청한 베드로의 간청에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가? 초막 셋을 지으라고 하시고 그곳에서 신선처럼 천년 만년 사셨는가?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오신다. 다시금 사람들이 사는 곳, 온갖 문제와 말썽이 있는 곳, 지지고 볶는 세상을 향해 제자들을 데리고 나오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신령한 은혜를 체험해야 한다. 놀라운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은혜의 자리를 또 사모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왜인가? 세상 속에는 하나님의 종들이 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기도원에 혹은 기도의 자리에 정기적으로 가는 것이 정말 유익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도 그렇게 하시라. 그러나 기도원 같은 데 죽돌이로 있는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은혜를 사모하여 기도 동산에 늘 머물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현실의 도피자들이요 사명의 회피자들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전부다 기도원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세상의 소금 역할은 누가 하는가? 은혜의 자리라고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으면 세상의 빛 된 역할은 누가 하는가? 누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주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겠는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에서 해야 할 일들이 있는데 그 일들을 다 방치한 채 내버려 두어도 된다는 말인가?
2. 변화산 아래에서의 사건
1)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
실제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오셨을 때 산 아래에는 해결해 주어야 할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산 아래는 상당히 어수선했다. 수 많은 무리가 있었고 변화산에 함께 올라가지 않은 예수님의 9명의 제자가 있었고 웬일인지 서기관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를 어수선하게 만든 당사자, 즉 가슴 아픈 문제를 가지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귀신들린 아들과 아들 때문에 가슴앓이 하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의 증상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다. 아들의 아버지가 말하는 장면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
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아들이 귀신이 들렸는데 그 귀신들림이 얼마나 흉악한지 아들은 그만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말만 더디어도 부모 마음이 얼마나 애가 타는가? 그뿐이 아니다. 귀신이 아들을 잡으면 아들은 어느 자리에 있든지 상관없이 거꾸러진 채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죽어가는 사람처럼 파리해지는 것이었다. 경기내지는 발작. 간질 증세. 애간장이 녹을 수밖에 없음.
여러분. 잘 아시라. 귀신이란 존재는 절대로 사람을 이롭게 하지 않는다. 사람을 이롭게 하는 귀신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간혹 텔레비젼이나 영화 같은데 보면 착한 귀신이 나와서 주인공을 돕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다 엉터리다. 사람들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속지 마시라.
그리고 귀신들린 사람의 증상 중 대표적인 것 하나는 자기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치 않는 일을 자꾸만 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데 자꾸만 그 일을 하게 만들고 벗어나려고 애를 써도 벗어나지 못하게 사람들을 옭아매는 것이다.
혹은 원하지 말아야 할 것을 원하게 만든다. 그것이 귀신이 넣어준 생각인데 마치 자기 생각인줄 착각하게 하면서 말이다. 그 극단이 바로 자살이 아닌가? 자살하고 싶은 충동, 그것은 사단의 역사인 것이다. 그리고 정말 문제는 인간적은 방법으로 이런 문제점이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점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제자리에 머물 뿐 늘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 힘들어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러면 해결책은 없는가? 있다.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께 나와서 철저히 매달릴 때 원치 않는 사단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사야는 그런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장)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참으로 예수님만이 사단의 모든 구레에서 자유케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으시는가?
그런 면에서 볼 때 귀신 들린 아들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온 아버지는 참 잘한 것이다.
2) 그들을 고쳐주지 못한 제자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 산 밑에 당도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산 위를 올라가신 후였고 산 밑에는 9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의 아버지는 9명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사실 이런 부탁은 부질없는 부탁은 아니었다. 예수님만큼은 아닐지라도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가 있음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셨는데 그 목적 중 하나가 제자들로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가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막 3장)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가서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었다.
“7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10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막 6장)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도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막6:14).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내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자들은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얼마나 민망하고 창피스러웠을까?
앞에서 말했던 두 분의 목사님 같은 처지가 아니겠는가?
내 경우라고 생가해 보면 나도 아찔하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그런 상황이 아닌가?
3)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산 밑에서는 바로 그런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고 모든 정황을 아셨을 때 예수님은 이미 부끄러움을 경험한 제자들을 보시고 더욱 더 부끄럽게 하신다. 그들을 공개적으로 책망하시는 것이다.
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기껏 사명을 주었지만 사명을 감당할 만한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제자들을 냉혹히 질타하시는 이 책망에는 상당한 안타까움 또한 담겨져 있다.
여러분. 만약 말이다. 만약 오늘날의 목회자와 성도들을 보시면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말씀을 하실까? 예수님이 칭찬하실만한 믿음과 능력을 오늘날의 교회는 갖추고 있을까? 우리 교회는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원하기만 나와 여러분 모두가 그런 능력을 갖출 수 있기를 축원한다.
3. 안타까운 아버지의 간구
1) 예수님의 질문과 아버지의 간구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신 후 그 아이를 데려오라고 명하신다. 그래서 그 아이를 데려왔더니 난리가 벌어졌다. 그 아이가 예수님을 보는 순간 아예 발작을 일으키는 것이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희한한 일이다. 귀신이 예수님을 보았으면 끽 소리 못하고 주눅이 들어야지 왜 더 발작을 일으킨단 말인가? 상황이 좋아진 것이 아니라 더 악화된 것이다. 여러분은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사단의 역사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다가 예수 믿고 해결 받으려고 한다. 그런데 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더니 귀신이 더 역사해서 상황이 더 어려워진다. 전에 없던 고통까지 겪는다. 그러면 지레 겁을 먹고 예수님을 안 믿어 버린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다. 사단의 역사 때문에 예수님께 나왔음에도 상황이 급작스럽게 더 나빠지기도 하는 것은 예수님이 능력이 귀신보다 약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또는 예수 믿은 것이 손해를 끼치는 행위이기 때문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럼 왜 귀신이 더 역사하는가? 귀신이 자기의 쫓겨날 운명을 알고 마지막으로 발악하기 때문이다. 여기 계신 여러분은 이런 사실을 지혜롭게 파악하시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아이의 발작에 당황하지도 않은 채 아이의 아버지에게 차분하게 물으신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막 9장)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대답한다.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막 9장)
아마도 이 아버지의 마음은 슬픔으로 꽉 차 있을 것이다. 그 심장을 꺼내 볼 수 있다면 안타까움으로 새까맣게 타버린 상태가 아닐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아들의 고통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 자신이 대신 그랬으면 하는 생각을 수없이 했을 것이다. 그 아들을 고쳐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모두다 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고 절망감만 날이 갈수록 진해졌던 것이다.
그러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마침 산 밑에 있던 제자들에게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 달라고 했는데 제자들은 그 아버지에게 실망감만 안겨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조차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을 아닐까?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말한 것을 보면 말이다.
아이의 아버지의 말 속에는 믿음이 도무지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이다.
2) 예수님의 믿음에 대한 도전
예수님은 아이 아버지를 향해 즉각적으로 도전하신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여러분. 이 말씀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나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말씀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실패를 경험한다. 원치 않는 고통을 겪는다. 그것은 긴 세월 동안 말이다. 이번에는 해결되겠지 하는 기대감을 처음에는 가질 수 있었지만 차츰 그런 기대감조차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젠 예수님에게 조차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정말 예수님이 나의 삶에 역사하실 수 있을까 하는 회의와 불신앙으로 꽉 차 있다.
여러분 이런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어쩌면 여러분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의심말라 하시고 물결 위를 걸라 하시네
할 수 있다 하신 주 할 수 있다 하신 주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3) 아이 아버지의 절규와 간청
아이 아버지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난리가 났다. 자신의 아들을 고칠 수 있는 마지막 찬스를 놓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강하게 솟았을 지도 모른다. 그는 예수님께 소리 질러 외친다.
24절을 보자.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이것을 절규라고 부를 수도 있으리라. “예수님 이젠 당신 밖에 안 남았습니다. 당신이 마지막 보루입니다. 당신마저 고쳐주시지 않으면 내 아들은 끝장입니다. 그렇지만 내겐 믿음도 모자랍니다. 주님 제발 도와주세요. 저에게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세요”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사실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우리도 예수님께 절규가 담긴 기도를 드려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아이의 아버지처럼 예수님께 부르짖지 않는다. 자신은 이 아이의 아버지처럼 그리 절박하지는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절박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정말로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문제점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여러분. 문제가 없는 것과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커다란 차이다. 여러분. 병이 없는 것과 병이 있는데 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동일할 수 있는가? 병이 없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병이 있는데도 그 병을 못 느끼는 것은 병이 있으며 또 그 병을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심각하다. 더 이상 고치지 못할 상황으로 그 사람을 몰아가기 때문이다.
영적인 문제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자신의 문제를 알지 못하는 사데교회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장)
자신의 문제를 알지 못하는 라오디게아 교회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장)
여기 계신 여러분.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혹시 자신이 귀신들리지는 않았을지라도 악한 영들에게 끌려 다니지는 않는가? 하나님보다 세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지는 않는가? 세상 일, 세상 친구들 때문에 끌려 다니느라고 자신의 영혼을 버려두고 있지는 않는가? 그런데도 자신의 영혼이 황폐해진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심각한 상태는 아닌가? 그저 괜찮으려니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인생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뒷전에 둔 채 그보다 훨씬 덜 중요한 돈 문제, 이성 문제, 직장 문제, 진학 문제, 취업문제, 친구문제에만 매달리고 있지는 않는가?
이것은 돈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직장이나 대학, 이성 친구가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덜 중요한 것들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는 모습에 안타까워하는 말이다.
간암말기인 사람이 발에 난 무좀 때문에 고민 고민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백혈병 걸린 사람이 얼굴에 난 여드름 때문에 잠 못 자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무슨 말을 하는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것이다. 마귀에게 끌려 다니면서 다른 걱정할 때는 아니란 말이다. 여러분은 먼저 사단의 모든 굴레를 끊어달라고 예수 앞에 나와 부르짖어야 한다.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다만 자신의 처지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을 뿐이다.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분명히 파악했다면 그 누구라도 아이의 아버지처럼 예수 앞에 나와 절규할 것이다.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역사해 주세요. 제발 저를 붙들어주세요. 더 이상 유혹에 끌려다니지 않도록 제발 저에게 능력을 주세요. 더 이상 사단의 하수인으로 살지 않도록 저에게 힘을 주세요”.
이것은 내 자신이 내 자신의 실체를 보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내용이기도 하다.
4. 귀신을 내어 쫓으신 예수님
1) 귀신을 꾸짖어 내어 쫓으신 예수님
예수님은 아이 아버지의 절규를 들으시고 어떻게 했는가? 아이 아버지의 절규를 못들은 척 하셨는가? 아니 그럴 수 없다. 예수님은 분명히 들으셨다. 그리고 그 아이도 아이의 아버지도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고 그아이를 고쳐주신다.
25-27절을 보자.
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능력이다.
그리고 성경에는 이런 예수님의 능력이 곳곳 마다 증언되고 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21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막 1장)
수로보니게의 딸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막 7장)
여러분. 왜 예수님께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한지 아시는가?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4대 성인 중의 한명으로 전락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심으로서 또한 많은 표적일 보이심으로써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며 위대한 증거는 바로 부활이다.
2) 아이와 아버지에게 임한 기쁨
어쨌든 이제 아이는 고침 받았다. 벙어리 들린 귀신이 나갔으니 혀문이 열리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말을 못했으니 말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겠지만 그래도 이젠 평생을 벙어리로 살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아이는 이제 불안감에서 벗어났다. 자기가 원치도 않는데 자꾸 불 속으로 물 속으로 자기를 해하는 곳으로 뛰어 들었었는데 이젠 그런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쳐다보는데서 거꾸러진 채 입에 거품을 무는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
그 동안 이 아들은 정말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을 살아왔을 것이다. 정말 죽지 못해 살았을 것이다. 거품 물고 쓰러지는 것을 한번만 보여도 미칠 일인데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랬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또 아버지는 어떨까? 모르면 몰라도 아버지의 기쁨은 아들 못지않았으리라. 이제는 몹쓸 꼴을 보지 않아도 좋으니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까.
그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은혜이고 그 은혜는 평생을 갚아도 갚지 못할 은혜이다.
결국 예수님은 아들과 아버지 모두에게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이웃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처럼 절망하는 자에게 기쁨과 소망을 불어 넣어주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모습이다.
3)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
귀신이 쫓겨나가고 모든 것이 정리 된 후에 집으로 들어가신 예수님께 제자들이 묻는다.
28절을 보자.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참 심각한 질문이다. 그런데 이 질문을 하는데 질문하는 제자들의 태도가 재미있게 묘사되고 있다. 예수님께 묻는데 “조용히” 물은 것이다. 여러분. 제자들은 왜 조용히 물었을까? 그 물음이 심각한 물음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창피스러웠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을 대하기가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질문은 꼭 해야만 하는 질문이었기에 조용히 예수님께 물은 것이다.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그때 예수님이 무어라고 대답하시는가?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여러분 기억하라. 기도외에는 없다. 바로 오늘 설교의 제목이다.
여러분. 사람들이 알든 알지 못하든, 인정하든 이전하지 못하든 이 세상은 사단의 권세 하에 있다.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물러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잠시 동안 허락하신 것이다. (왜 허락하셨는가에 대한 의문이 지금 다룰 주제가 아니니 넘어가겠다.) 그래서 사단을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혹은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바로 이 세상 임금인 사단에게 속하여 있다.
여러분 전도란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사단에게 속한 자들을 건져 내는 것이다. 마귀의 종노릇 하는 자들을 건져내어 하나님의 백성 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사명이다. 복음전파는 주님의 지상명령이 아닌가?
사단의 굴레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원수 마귀의 다스림 속에서 절망하는 영혼들, 악한 영들에게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사람들, 자기 마음대로 자기 멋대로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실상은 귀신들에게 사로잡힌 채 죄악된 삶을 사는 사람들을 건져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없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제자들처럼 무기력하게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해보자. “기도외에는 없다”. 그렇다 기도외에는 없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
“기도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날 수 없느니라”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라.
개인에게 역사하는 어둠의 영들을 제압해야 되지 않겠는가?
가정 속에 역사하는 사단의 세력을 결박해야 되지 않겠는가?
교회 속에 역사하는 원수 마귀를 내어쫓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 기도하시길 바란다. 기도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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