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환 금요설교

납득할 수 없을지라도 사사기 7:1-8

안희환2 2012. 5. 25. 20:18

납득할 수 없을지라도 사사기 7:1-8

 

1.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3.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4.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 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5.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더니

6.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7.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8. 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각각 그의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그 삼백 명은 머물게 하니라 미디안 진영은 그 아래 골짜기 가운데에 있었더라

 

 

오늘 본문에 이렇게 시작한다.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이 일찌기 일어나서 하롯샘 곁에 진 쳤고 미디안의 진은 그들의 북편이요 모레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이제 이스라엘군과 미디안군이 각지 진을 치고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 전쟁은 매우 중요한 전쟁이 될 것이다. 승리할 경우 7년간 식민지하에서 압제를 당하던 모든 굴레를 끊고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패배할 경우 7년에 이어 또 다시 종살이를 해야만 한다. 굶주림과 학대, 절망과 고통,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패배감으로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도 이제 또 다시 지면 얼마나 긴 세월을 고통 속에 지내야 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스라엘은 이번 전쟁에 이길 수 있는 확률보다 질 확률이 높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1) 첫째로 군대수의 차이이다. 미디안, 아마렉, 동방 사람의 연합군에 비해 이스라엘 군대는 너무 그 수가 적다. 고대의 전쟁에 있어 군대수는 곧 전쟁의 스패를 좌지우지 하는 중요 요인이었다. 몇 만 대군 혹은 몇십 만 대군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냐 하는 것이 곧 그 나라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데 이스라엘군은 미디안 연합군에 비해 완전히 새 발의 피인 셈이다.

 

(2) 둘째로 훈련의 차이이다. 전쟁에 능숙한 적군에 비해 이스라엘 군대는 도무지 훈련되어 있지 못하다. 그들은 기드온의 나팔 소리를 듣고 즉흥적으로 몰려든 사람들이고 그런 그들이 훈련을 받았을 리가 없다. 더구나 훈련을 시킬 시간도 없다. 이제 곧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훈련되지 않은 군사를 오합지졸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곧 오합지졸인 셈이다.

 

(3) 셋째로 무기의 차이이다. 무기를 가진 자와 무기를 가지지 못한 자의 싸움은 비교가 될 수 없다. 또 무기를 양쪽 다 가졌다 할지라도 성능이 좋은 무기를 가진 쪽과 성능이 별로인 무기를 가진 쪽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7년간 좋은 것은 다 빼았겼다. 먹고 살 것도 없는 이스라엘이 차분하게 앉아서 무기를 만들 수 있었을까? 어려운 이야기다.

 

(4) 넷째로 사기의 문제이다. 자신들이 늘 당하던 대상을 향하여 큰 소리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동네 싸움도 한번 누군가와 싸워서 여러차 례 깨지면 다음엔 아예 굽히고 들어간다. "나는 저 애를 이길 수 없어"라는 패배의식이 자리잡 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말뚝에 매여 자란 거대한 코끼리가 큰 통나무를 옮기면서도 그 말뚝은 뿌리뽑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이다. 고정관념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처럼 군대수의 차이, 훈련의 차이, 무기의 차이, 사기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이 마지막으로 붙들고 있는 것은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뿐이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하리라"(616). 그리고 어쨋든간에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기드온의 나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싸우러 가겠다고 몰려들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시다.

 

1. 납득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

 

1) 납득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납득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드온에게 들려온다. "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라".

 

자 생각해보라. 미디안 군사에 비해 턱없이 적은 군사를 거느린 기드온이다. 이제 진을 치고 싸우기를 기다리고 있다. 기드온의 군사가 진을 친 북편엔 미디안이 진을 치고 있다. 서로 상대방의 진을 쳐다보면서 각기 다른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미디안 군사들은 사기가 등등하다. 척 보아도 군대수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상대방은 그 동안 자신들이 우습게 여기고 괴롭히던 대상들이다. 한 마디로 우스운 존재들이다. 그러나 기드온의 군사들 입장에서 보면 미디안은 무서운 사람들이다. 그 동안 그들이 무서워 얼마나 피해 다녔는가? 더구나 미디안의 진을 척 보니 도대체가 인간이 너무 많다. 이번 전쟁은 해보나마나인 것으로 보일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돌아가라"고 말하라 하시니 아마 하나님은 제정신이 아닌 듯하다. 대장인 기드온이 가도 좋다고 허락하니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한들 군법에 회부될 염려도 없는 것이다.

 

실제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명이요 남은 자가 일만명이었더라"(3) 이젠 끝장났다. 떠나간 사람들도 그렇지 영 양심 불량이다. 어차피 싸우려고 나왔으면 겁나더라도 끝까지 해볼 일이지 갈 사람 가라는 말 듣자마자 그냥 도망가 버리다니 어쩜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가득이나 적은 군대가 3분의 일로 줄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일차적인 원인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왜 그런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단 말인가? 이기게 하시겠다는 말씀과 정 반대되는 조치를 취하시는 하나님은 이제 연세가 너무 들어서 노망이라도 났단 말인가?

 

2) 때로 납득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

 

그런데 성경을 보면 때로 하나님께서 그처럼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실 때가 있다.

 

(1) 아브라함에게

 

그 한 가지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22).

 

여러분이여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이 어떤 아들인가? 100세가 되어 겨우 낳은 아들이다. 눈에 집어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고 소중한 아들이다. 자신이 죽은 후에 자신의 가업을 이러나갈 후계자이기도 하다. 자신의 그 동안 모은 모든 재산과 수 많은 종들을 소유하고 관리해야할 바로 그 이삭이다.

 

더구나 그 이삭을 주신 분이 누구인가? 더 이상 아내 사라를 통하여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사라를 통하여 아들을 주시겠다고 먼저 말씀하신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 아니신가?

 

창세기 15장에 이렇게 말씀한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너의 후사가 될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151-4)

 

17장에는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찌라 그가 열 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1715-22)

 

그런데 그렇게 해서 주신 이삭을 이제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이다. 갈가리 찢어죽이기 위해서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시란 말인가?

 

(2) 호세아에게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은 호세아게도 주어졌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12)

 

여러분이여. 호세야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선지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선지자는 자신의 삶을 성결하게 지켜나가야 함은 물론이고, 자기의 가족도 성결하게 지켜나가야만 한다. 자신의 삶과 자신의 가족을 돌아볼 줄 모르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전파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아내를 얻을 때도 경건한 여인을 얻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선포할 호세아에게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녀를 낳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이 참 순종하기에 어려운 말씀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어떤 남자가 음란한 여자를 좋아하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어려운 말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가버린 것이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호세아에게서 도망하여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겼을 때 호세아는 정말 답답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 하나님께 따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거보세요 하나님.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으라더니 결국 이렇게 되었잖아요. 애초에 하나님이 잘못 말씀하신 겁니다. 아내가 음행했으니 이젠 이혼할 겁니다. 그리고 정결한 여자를 아내로 맞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31). 참 환장할만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완전히 떡이 되게 하시려고 작정하신 말씀이다. 호세아는 어떻게 했는가? "내가 은 열 다섯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32-3). 나는 호세아가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은 호세아를 비찬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납득할 수 있는가?

 

(3) 여호수아에게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은 여호수아에게도 주어진다.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느리고 가나안 정복전쟁을 치러내야만 했다. 그런데 요단을 건넌 후 그들 앞에는 큰 장벽이 하나 있었다. 여리고성이라는 견고한 성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요단 건너 첫 번째 전쟁이니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만약 여리고 정복에 실패하면 가나안 족속들이 자신감을 갖고 떼거지로 몰려들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다.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 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찌니라"(63-5)

 

견고한 성을 무너뜨려야 하는데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것은 다 성을 무너뜨리는 것하고는 상관이 없다. 하루에 한번씩 성을 도는 것이 성을 무너뜨리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부는 것이 성을 무너뜨리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성을 도는 동안 아무 말 없이 온 백성이 침묵하는 것이 성을 무너뜨리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마지막 날인 일곱째 날에 특별히 성을 일곱 번 돌라고 했는데 그것이 도대체 성을 무너뜨리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 날에 온 백성이 여리고성을 향해 소리질러 외치는 것이 성을 무너뜨리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여리고성이 종이라로 만든 성이라도 되는가? 입바람으로, 공중에 울리는 소리로 무너질만큼 허술한 성이라도 되는가? 부실공사한 집이라도 고함 소리에는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왜 하나님은 그토록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시는 것인가?

 

아브라함에게도, 호세아에게도, 여호수아에게도, 그리고 오늘 본문의 기드온에게도 각기 다른 말씀이지만 공통적인 것은 그 말씀이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2. 더 납득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

 

1) 더 납득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

 

그런데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더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다.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무릇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가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는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4)

 

산너머 산 물 건너 물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보시고 백성이 아직도 많다고 하시는 것일까? 혹시 어차피 몰살 당할 백성들이니 차라리 적은 인원이 죽게 하시려는 방책이신가? 아니면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위력적인 신무기를 주시려는 것일까? 탱크라도 몇대 있으면 얼마든지 이길테니까. 그런 게 아니라면 왜 백성이 많다고 하시면서 백성들을 더 추려내시는 걸까?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이다.

 

2) 병사 구분의 원리와 그 결과

 

이제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을 거느리고 물가로 갔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어진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무릇 개의 핥는것 같이 그 혀로 물을 핥는 자는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무릇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도 그같이 하라"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남겨두실 백성들이 누구인지를 규정하시는 것이다. 손으로 물을 모아서 개처럼 핥아 먹는 사람과 그냥 무릎을 꿇은 채 물 속에 고개를 쳐박고 물을 마시는 사람을 구분해서 손으로 모아 핥아먹는 사람들만을 데리고 전쟁에 임하라는 것이다.

 

물을 마시는 백성들을 보면서 기드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무릎을 꿇은 채 물 속에 머리를 쳐박고 물을 마시는 것을 보면서 기드온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제발 손으로 떠서 먹어라. 제발 손으로 떠서 먹어라. 이제 겨우 만명인데 저 많은 미디안군을 어떻게 대적한다는 말인가? 발악이라도 할 수 있게 제발 손으로 떠서 먹어라".

 

그러나 결과는 참담하게 나타났다.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6).

 

300명 남았다. 300. 한명이 백명씩 상대해도 3만명밖에 대항할 수 없는데 적은 그 몇배가 된다. 이젠 어쩌라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은 다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 하나님 때문이다.

 

3.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의문이 든다. 왜 하나님은 그처럼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을까? 하나님이 작정하시는 계획은 무엇일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만약 여러분이 그와 같이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

 

1) 우리보다 크고 완전하신 하나님

 

말씀을 계속 이어나가기 전에 우리는 이것 하나를 기억하고 나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시고 완전하신 분이시며 그분의 모든 계획은 우리를 위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지 우리를 곤란에 빠뜨리고 그것을 즐겨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558-9).

 

다른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을 깊이 체험했던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1133-36)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 납득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유한한 인간이 가진 이해의 한계 때문인 것이다. 피조물이 어찌 자신의 창조주를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한때 파스칼은 자신이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무진 애를 썼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어린아이가 그릇으로 바닷물을 퍼서 다른 쪽으로 옮기는 것을 본다. 그때 파스칼은 그 아이에게 "지금 뭐하려는 거냐?"하고 물었다. 그 아이가 대답했다. "이 바닷물이 몇 그릇이나 되는지 세어보려고요". 그때 파스칼은 그 어린아이의 행동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유한하고 빈약한 자신의 머리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는 자기나, 그릇으로 바닷물을 헤아려보려는 어린아이나 결국은 같은 모습인 것이다.

 

어쩌면 여러분에게 납득할 수 없는 말씀만이 아닌 납득할 수 없는 어떤 일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갑갑하고 힘들고 짜증나고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왜 나에게 내가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은 왜 나에게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을 겪게 하시는 겁니까?" 하고 따져들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잘 기억하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시고 완전하며, 우리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미련함이 오히려 지혜롭다는 사실을 말이다.

 

2) 앞서 말했던 실례들에 대한 점검

 

(1)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말씀

 

여러분은 그 증거를 원하시는가?

우리는 앞에서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겨우 얻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것은 분명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하였다.

 

성경은 말씀한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223-12)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 장면이다. 여러분이여 생각해보라. 아브라함이 단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고향을 떠나 가나안을 향하였다는 것 하나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겠는가?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이삭을 눈물 머금고 하나님께 드리려 했던 이 사건 없이 아브라함이 그토록 존경받은 신앙의 인물이 될 수 있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결국 납득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을 위대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있는 것이다.

 

(2) 호세아에게 하셨던 말씀

 

호세아는 안 그런가? 경건해야할 선지자의 가정에 음란한 아내를 취하라고 호세아에게 하신 명령은 분명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호세아는 순종하였다.

 

성경은 말씀한다.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13-9)

 

후에 그 아내는 도망가버렸고, 이제 호세아는 아내를 버리고 다른 남자의 품에 가는 아내를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안다. 그런 아내를 찾아가서 빚을 갚아주고 다시 찾아오는 남편의 마음이 얼마나 서글픈지 이해한다. 한이 맺힐만큼, 정말 가슴에 못이 박히다 못해 뻥 뚫릴만큼 속상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리고 그런 아내를 찾아가서 또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알게 된다.

 

그처럼 가슴에 한이 맺힌 남편이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런 남편을 버리고 우상에게로 세상의 죄악과 쾌락으로 도망가는 아내가 누구인가? 이스라엘 백성이다. 그럼에도 그들을 찾아가셔 처량해 보일만치 사랑담긴 손길을 내미시는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호세아는 이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자가 되었다. 그의 메시지에는 눈물이 담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귀만 울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 되었다. 그는 더 이상 남의 이야기하듯이 설교하는 자가 될 수 없었다. 그의 외침은 이제 웅변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의 절규가 될 수 있었다. 호세아 6장에서 그는 이렇게 외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임하시리라 하리라"(6)

 

"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외치는 자 만건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

죄를 대속하신 주님 선한 일군 찾으시나

대답할 이 어디 있나 믿는 자여 어이할꼬"

 

결국 납득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를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선지자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3) 여호수아에게 하셨던 말씀

 

이것은 여호수아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여리고 성을 정복할 아무런 방책도 알려주지 않고 다만 아무 말없이 여리고성 주위를 빙빙 돌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하나님이 지금 병정 놀이 하시나? 우리들 데리고 꼭두각시 놀음이라도 하시는건가?" 그러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였다.

 

성경은 말씀한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행하라 하고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 행할지니라.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진행하며 후군은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더라.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찌니라 하고 여호와의 궤로 성을 한번 돌게 하니라 무리가 진에 돌아와서 진에서 자니라.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니라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그 앞에 행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니라. 그 제 이일에도 성을 한번 돌고 진에 돌아 오니라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66-14)

 

그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번 도니 성을 일곱번 돌기는 그날 뿐이었더라. 일곱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찌니라. 이에 백성은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니라"(615-20)

 

-더 놀라운 것은 납득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가 여리고성을 취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명성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627)

 

그렇다면 이제 정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왜 그처럼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을까?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것 이상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는 기회가 된다.

 

3) 기드온에게 하신 말씀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기드온에게로 돌아오자. 하나님은 서로 대적하여 진치고 있는 긴박한 상황에서 분명히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기드온은 겨우 32000명의 군사를 가지고 있는데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 겁나는 사람은 돌아가라고 선포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22000명이 가버리고 만명 남았다. 그러면 미디안 군사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지라"(712).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절대로 많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기드온은 그대로 순종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직도 너무 많다고 하신다. 그러더니 물가로 내려가서 각기 물을 마시는 방식이 다른 두 종류 중에 손으로 물을 떠서 먹는 사람만 남겨 놓으라고 하셨다. 그러고 나니 300명이 남았다. 정말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오늘 본문에 그 해답이 나타나고 있다. 2절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무슨 뜻인가? 군대가 그래도 어느 정도 되는상태에서 이기면 "역시 우리는 대단해. 이렇게 차이나는 데도 이겼잖아. 우리는 이제 이스라엘의 영웅들이야"하고 잘난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300명 가지고 이기면 그때도 그렇게 잘난체 할 수 있을까? 정신병자 아닌 이상에는 불가능하다. 그때 그들은 고백할 것이다. "이건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야. 이건 도대체가 우리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야.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자".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영광을 돌릴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기드온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귀한 것을 가르치신다.

 

(1) 승리는 외형적인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님.

 

무엇을 가르치시는가? 첫째로 승리가 외형적인 조건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신다. 이것이 자기 힘으로 사는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여러분에게 학식이 없는가? 여러분에게 재력이 없는가? 여러분에게 든든한 백이 없는가? 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너무 가슴 아픈 사연이 있는가? 여러분의 미래가 불투명해 보이는가? 그러나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 안에 있다면 이런 좋지 않은 조건들 때문에 망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외형적인 조건이 더 이상 밑바닥에 내려갈 수 없을 만큼 좋지 않았던 기드온과 300명의 군인을 통하여 큰 일을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면 여러분의 모든 좋지 않은 조건들을 뒤집어 엎으시고 승리의 찬양을 부르게 하실 수 있다. 믿으시는가?

 

(2)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을 요구

 

둘째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이라는 것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이 아쉬워 돈을 요구하는 분이 아니다. 천지만물이 다 하나님의 뭐 때문에 우리 돈이 필요하시겠는가? 다만 우리가 드리는 예물은 우리의 감사를 표현하는 여러 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어떤 대단한 지위나 사회적 배경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다. 모든 자를 높이심과 낮추심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는데, 세상에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냐가 하나님께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만 철모르고 사람들 앞에서나 건방떨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 요구하는 분이 아니다. 다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생각해보라. 300명이 바다의 모래같은 적군을 향해 담대히 전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을 때 뿐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만 믿고 전진해 보겠느냐? 분명히 객관적으로는 힘들다. 아니 힘든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를 믿고 나아가 싸울 수 있겠느냐?". 어쩌면 우리 교회가 기드온의 300군사만큼이나 작고 초라할 지 모른다. 그러나 감사하게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요구하시는 것은 다만 하나님 당신을 향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각자가 처한 환경 속에서 신앙의 싸움을 싸울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영적 전쟁을 벌여 나갈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전도하며 수 많은 영혼들을 붙잡고 있는 사단의 세력에게 선전포고할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만큼 놀라운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축원한다.

 

(3)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드려야 함

 

셋째로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결코 자신의 능력이나 지혜, 수단과 노력으로 일을 이루었다고 자만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귀가 얇다. 그래서 누군가 자꾸 칭찬하고 부추기면 자기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도 믿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가 몰락을 향해 달음질하는 시기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1618). 그가 아무리 대단한 일을 이루어냈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기에 위대한 바울은 많은 사람들의 추앙에도 불구하고 "나의 나된 것은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였다. 또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박해했기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았다. 그러기에 지금 놀라운 일을 이루어도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이 다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 때문임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리는 것이다.

 

기드온과 300명의 군인도 마찬가지이다. 승리는 순전히 하나님 때문이다. 그러기에 아무도 그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된다.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도 잊고 살던 백성들이 하나님께만 영광돌리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이것이 하나님이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다.

 

우리 교회도 그와같이 되자. 우리 교회는 놀랍게 부흥할 것이다. 이 교회가 비좁아져 이전하게 될 것이며, 이전한 교회도 좁아서 새 장막터를 구하게 될 것이다. 이 교회를 통하여 지역의 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게 될 것이고, 많은 어려운 사람이 도움받게 될 것이다. 이 교회를 통하여 수 많은 선교사가 파송되어져 나갈 것이며 그들을 위한 후원과 중보기도가 놀랍게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것이다. 아멘이신가?

 

 

결론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납득이 되지 않는 것들이 있는가? 납득할 수 없을지라도 순종하는 여러분되시길 바란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무엇인가? "납득할 수 없을지라도"이다.

 

여러분은 어떤 말씀이 납득할 수 없는가? 넓고 편한 길이 좋은데 넓을길로 가지말고 좁은 길로 가라는 말씀, 너무 어렵고 힘든데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 내성적이고 말주변도 없는데 예수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 당장 먹고 살 것도 없는데 십일조를 드리라는 말씀, 주일에 일하지 않으면 손해가 많고 생계에 위협이 오는데 주일을 지키라는 말씀, 지금 열받아 죽겠는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 지금 너무 가슴이 아파 울고만 싶은데 그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감사하라는 말씀, 지금 내가 처한 여건이 좋지 못한 것들뿐이라서 내 일만 해도 정신이 없는데 형제와 자매를 돌아보라는 말씀, 두루뭉술하게 적당하게 살고 싶은데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 이 모든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도대체가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인가? 납득할 수 없을지라도 순종해보시라.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납득할 수 없는 말씀만이 아니라 납득할 수 없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뜻과 섭리가 있음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란다.

 

감영원목사님

두살때 소아마비

여동생이 지적 장애인. 무시 많이 당함. 왕따.

고치기 위해 전재산 소비.

복지법인 3

직원270.

예산 200.

 

하나님을 정말 믿으면

다윗처럼

다니엘처럼

마리아처럼

스테반처럼

 

하나님이 험께 하심을 잃어버리면?

 

사울처럼 비굴

요나처럼 서명에서 멀어짐

아간처럼 이기적임

 

상처입어 죽는 사람. 극복하고 서는 사람.

 

 

나는 누구인가?

실수로 태어난 내가 아니라 사명자들.

 

사명자의 3대철학.

 

1. 하나님을 기쁘시게

1:10 14:18

 

장애인 시설. 120. 불이 남.

기도함. 내 이익 챙긴 게 아닙니다. 도와주세요. 다 탔습니다.

꺼주지 않고 태우신 이유가 뭡니까?

 

비닐 하우스 태운 것은 콘크리트 집 주려고.

 

알주일만에 주심.

 

2. 맡겨주신 영혼을 기쁘게

 

눈을 좀 감게 해주세요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음.

외면하지 않음. 하자. 스텝들은 괴로움.

 

30 년간 장애인 보면 외면하지 않음.

 

한기총인권 위원장. 국가 인권위원장.

 

12:31

요일3:18

 

사회복지. 사명자들. 입장 버꿔놓고 생각.

 

장애인을 이따에 보내신 목적.

 

진정한 감사를 알게 하려고

하나님 기쁘시게 할 기회 제공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축복의 도구.

 

25. 그들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다.

 

애 둘 데리고 찾아옴.

5. 다리 못쓰는 사동생 데리고. 속 옷 가라입으려면 화장실. 안방 시골길이다 주고 바깥돌아다님. 이혼 요청. 동생 보내자.

 

찾아옴. 법인. 정원 참. 수급자가 되야 들어옴.

울기 시작. 가슴 찢어짐.

화가 남. 하나님 저런 사람들. 땅 산 집들 있는데.

주실 줄 믿습니다. 나감. 50억에 나와 있음. 싼 매물.

 

돌아오는데 목사가 그냥 오면 어떻게 하냐?

목사입니다. 장애인 돕습니다. 땅 가지고 천국 가요.

전도함. 예수 믿음시다.

명함 던짐.

명함은 던져도 예수는 던지지 마세요.

40. 30. 20. 됐다.

다음날 새벽 5. 전화. 오세요. . 8일만.

누워서 벽에 의지해서 얼마나 있으세요. 있는 대로 주세요.

통장 다 털어 드리고 등기 이전. 엘리엘 동산. 22000. 대지 만명. 이천 요지에

 

왜 주었울까?

내 집이다...

나는 너를 구원할 여호와니라.

저녁 내 똑같은 음성. 보살인데...

 

남편 의사 43살 차이. 죽으면서 준 것.

자기 것도 아닌데..

 

아주머니의 어려움을 외면했다면?

 

 

대구 지하철. 방화. 장애 2. 죽으려고 함. 그런데 남만 죽임.

 

3. 동역자들을 기쁘게

 

1:17

4:3

 

자원봉사자. 씁쓸함.

후원해주는 분들. 우리의 동역사.

가쁘게. 보람을 느끼게 하자.

 

아파트 설 돈으로.

40평 건축을 해드림.

김부순 권사님이 주심. 개인에게로.

등기를 바꿈. 사랑과 평화복지 재단.

 

동역자. 돕자 기쁘게 해드리자.

 

납득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원하신대로 하자. 하나님의 반드시 역사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