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를 위한 기도 마태복음 6:9-13(2012. 4. 13. 금요예배 설교)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기도해야 꿈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도해야 믿음이 자란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마음이 뜨거울 수 없다. 헌신도 열정도 없다. 그러나 기도하기 시작할 때 불붙은 사람이 되어 신앙이 성장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해야 인생의 문제가 해결된다. 문제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사람이 기도할 때 우선 그 마음이 새 힘을 얻고 마침내 늪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해야 교회가 부흥한다. 기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게 되기 때문이다.
기도해야 가정이 평안해진다. 지금 당장 무언가 변화가 나타나진 않을지라도 기도할 때 가정에서 역사하는 어둠의 영들이 떠나가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가정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래도 기도하지 않겠는가? 내가새벽기도를 해 보리라. 정말 좋은 목표이다. 내가 개인기도 시간을 가지리라. 멋진 목표이다. 은밀하게 주님을 만나는 시간을 통해 여러분은 예수 닮은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다. 올해는 금요기도회에 나와 통성기도를 배워보겠다. 합심기도의 위력을 체험해보겠다. 굿이다. 꼭 한번 해보시기를 바란다. 교회가 성령의 불로 타오르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병고침의 역사와 하나님의 각종 은사를 맛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할까 네 번째 시간이다. 무엇을 기도할까? 1)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하라. 2)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 3)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 오늘은 “용서를 위한 기도”이다. 다같이 따라해보자. “용서를 위한 기도”
1. 용서를 위한 기도
1) 왜 우리는 용서를 위한 기도가 필요한가?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왜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는 기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가? 무엇 때문에 우리는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하는가?
간단하다. 나와 여러분 모두가 죄를 짓고 사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9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장)
그런데 우리가 죄인이라고 말할 때 이건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그러나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이기적이지 않는가?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지 않는가?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죄라고 하지 않을지라도 성경은 이런 삶을 죄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남에게 쉽게 상처를 주며 고통을 주고 있지 않은가? 물론 문제는 자신이 남에게 고통을 주면서도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든 말이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음란한 생각들을 품지 않은가? 마음이 내 아내, 내 남편 외에 다른 사람을 향해 나아가는 적도 있지 않는가? 주님은 말씀하셨다.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장)
우리는 남의 것을 탐내거나 욕심내는 적이 있지 않은가?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이 무엇인가?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출 20장)
우리는 좋은 의도에서든 좋지 못한 의도에서든 거짓말을 할 때가 있지 않은가? 정직하지 못하게 자신을 포장하고 거짓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할 때가 있는 것이다. 상대방을 향한 언짢은 마음에 있지도 않은 일을 떠벌릴 때가 있는 것이다. 위기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속임수를 쓸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계시록에 거짓말에 대해 경각심을 주는 말씀이 있다.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장)
우리는 다른 사람을 질투하거나 시기하지 않았는가? 남이 나보다 잘되면 왠지 마음이 편치 못하고 언짢은 마음이 들든지 그런 상대방을 은연중에 깎아 내리든지 하지 않는가? 자꾸만 자신을 다툼 속에 몰아넣지 않는가? “14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약 3장)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기억하거나 그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도 않은 채 우리 삶의 주인이 우리라고 생각하면서 멋대로 많은 세월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사람의 모든 죄중 가장 근원적인 죄인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죄를 짓지 않았는가? 성경은 말씀한다.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장)
결국 우리의 삶은 죄를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삶이요 하루하루 죄를 추가하는 삶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만 하는 것이다.
2) 용서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응답하시는가?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가? 당연히 그렇다.
성경은 말씀한다.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1 1장)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장)
-다윗의 죄악과 회개
밧세바와 간음
“2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 3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4 다윗이 사자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 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5 여인이 잉태하매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잉태하였나이다 하니라”(삼하 11장)
우리아를 죽게함
“14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부쳐 요압에게 보내니 15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하라 하였더라 16 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의 있는줄을 아는 그곳에 우리아를 두니 17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신복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삼하 11장)
다윗의 회개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장)
하나님은 다윗을 어떻게 하셨는가? 용서하셨는가? 용서하지 않으셨는가? 용서해 주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다.
여러분은 존 뉴톤이라는 사람에 대해 아시는가? 이 사람은 방탕했던 사람이다. 사람을 노예로 팔아치우는 노예상인으로 살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뉴톤이 예수님을 만났고 삶이 변화되었다. 그는 후에 자신을 용서하신 주님의 사랑을 찬양시로 노래하였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 찬양의 원제목을 아시는가? amazing grace(놀라운 은혜)이다. 어떤 놀라운 은혜인가? 죄인을 용서해주신 놀라운 은혜이다.
이 찬양은 후에 많은 사람을 회복케 하는데 쓰임 받는데 그중 한 사람을 소개하겠다.
캐롤 버리스라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다. 캐론은 주부였다. 그런데 그녀가 근육무력증에 걸린다. 이 무서운 병은 온 몸에서 점점 근육이 무력해져서 죽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40대 초반에 6명의 자녀를 두고 변호사 사무실의 비서로 일하면서 무용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충만하고 풍요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의 모습은 끔찍하게 변했다. 머리카락은 모두 빠지고 스테로이드 과다투여로 얼굴과 몸 전체가 부어 있었다. 마치 낡은 담요같은 느낌이었다. 자존심을 버린 지도 오래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들 기도를 하지만 마음속으로 "오래 살지 못할 텐데"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읽으면서 그녀는 더욱 자기 연민에 빠진다. 심장이나 호흡 장애가 일어날 때마다 그대로 죽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된다. 주변 사람들의 짐이 된 느낌은 무서운 것이었다.
그런 나날을 보내던 중 부활절을 맞아 성가대원들이 그녀의 집에 몰려 왔다. 그들은 그때 찬양을 불렀는데 바로 "나같은 죄인 살리신"이란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 간절히 통성으로 기도하였다. 그때 그녀는 하나님을 느꼈다. 그리고 오랜만에 참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병을 위해서 그리고 살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다.
그들이 돌아간 다음, 다시 그녀는 원상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다시 무력해지면서 비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백부장을 생각하며 자신도 행동하였다.
우선 자리에 누워있지 말아야 하겠다고 결심한다. 일어나서 움직이기는 너무 힘이 들었다. 그러나 거기서 물러 설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꾸만 마음속에 들어오는 자멸감의 어두운 그림자를 물리쳐야 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들을 생각했다. 남편, 자식, 친구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 사람들의 기도와 자신의 기도를 믿으면 그만큼 마음이 밝아졌다.
몸이 불편하고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라고 남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친절을 베풀지 못할 것은 없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세상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담을 쌓은 것은 자신일 뿐이었다. 이제 차츰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녀는 병 때문에 어둠에 빠진 다른 이들을 방문했다. 휠체어에 앉은 채 집이나 요양원이나 병원의 환자를 찾아 용기를 주려고 하였다.
그러던 와중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차츰 몸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다시 글을 쓰고 연단에서 강의를 하고 50중반의 몸으로 교회 사무직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무용 강습도 다시 시작했다. 병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오히려 비전속에 전보다 더욱 건강한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알았다. 기도를 사용하련다. 마치 은행에 맡긴 돈을 찾아 쓰듯, 하나님께 드린 그 수많은 기도의 말을 나는 실천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언제인가 다시 오더라도 나는 상처받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며 내 생명의 마지막 촛불을 사를 것이다."
용서받은 감격으로 지은 하나의 찬양이 한 여인으로 이토록 놀라운 축복을 받게 하다니 감격스럽지 않은가?
원하기는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으시고 사죄의 은총에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함에 있어서 두 가지 극단을 주의해야 한다. 하나는 함부로 죄짓고 용서를 구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멸시하는 태도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얄팍한 마음을 다 아신다. 그 사람은 자신이 심은 대로 거두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를 믿고 죄짓는 것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은 큰 코를 다치게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어떻게 염치없이 또 용서를 구하느냐고 양심적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상 교만이다. 엄청난 영적 교만이다. 하나님은 용서해주시겠다고 회개하라고 하셨는데 자기가 뭐라고 자기 임의로 회개치 않는가? 자신이 하나님보다 큰 자인가?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용서를 구할 때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라. 그러나 그 용서를 믿고 함부로 죄짓는 어리석은 자는 되지 마시라.
3) 용서를 위한 기도는 영안이 열린 자의 몫이다.
이 시간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용서받았는가? 또한 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복 있는 자이다.
용서를 위한 기도는 영안이 열린 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모르는 탓이다. 영의 눈이 어두워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죄가 없는 것과 있는데 보지 못하는 것은 큰 차이이지 않은가? 그런데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보기 못하기에 용서받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사실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본 사람이라면 죄 없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자신을 본 이사야의 고백
“1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장)
여러분은 어떠하신가? 자신이 죄들이 보이는가? 그것이 얼마나 추악하고 형편없는 것인지 보이는가? 자신의 전 존재가 죄로 오염되어 있음이 보이는가? 이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예수를 떠나지 않는다. 자신이 죄인이며 그 죄로 인해 심판 받아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고, 그 심판을 피할 유일한 길이 예수 믿고 죄 사함 받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떠날 수 있는가?
교회 다니다가 마는 사람은 결국 영안이 열리질 못한 사람이다. 자신의 죄인 됨을 보지도 못한 사람이고, 그 죄를 사하실 유일한 능력자가 예수 외에 없음도 모르는 자이다. 결국은 곡식의 형태를 띠고 있을 뿐 쭉정이인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시는가? 그러기에 예수님이 꼭 필요한 사람임을 인정하시는가?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시고 있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복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 죄가 있다면 품어두지 마시고 회개하여 죄사함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한다.
2. 용서를 위한 기도의 전제 조건
그런데 오늘 본문인 주기도문을 보면 용서와 관련하여 조금 특이한 기도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용서의 기도를 드릴 때 그 앞에 전제 조건이 붙어있는 것이다.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라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먼저 용서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용서의 기도를 드리는 전제 조건인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죄짓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은가?
말로 혹은 행동으로 우리에게 잘못과 실수를 범하는 사람들이 늘 있는 것이다. 물론 생각으로도 죄를 짓겠지만 생각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염두에 둘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말과 행동으로 우리에게 죄를 짓거나 잘못을 범한 그들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절대 싸우거나 충돌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충돌이나 싸움이 전혀 없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요는 그 다음이 문제이다. 마음에 묻어두지 말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꽁한 상태로 미움을 품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하신가? 나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다투는 일은 종종 발생할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인데 여러분은 그 후에 용서하시는가 아니면 용서하지 않으시는가? 만약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혹 아직도 용서하지 않으신 것이 있다면 오늘의 말씀을 유념하여 들어야 할 것이다.
2) 왜 용서해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분명이 있다.
-주님의 명령이기에
먼저 용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기에 우리가 마땅히 용서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최우선이 아니겠는가? 다른 모든 이유가 없다하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그 자체로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하기에
더 나아가 우리가 용서해야 할 이유를 더 찾는다면 우리가 용서하는 삶을 살 때 우리도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장)
오늘 주기도문에서도 이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지 않은가?
용서하는 것이 아무리 힘든 일이라 하더라도 용서하고 용서받는 것이 낫지 용서하지 않고 하나님께도 용서받지 못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처음 예수 믿을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맞아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지만 그 후에는 우리가 용서하지 않을 때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와 여러분 모두가 용서하는 삶을 살기 원한다.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도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용서할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그리고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가 용서받을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 유익한 영향이 있는데 용서를 통해 우리가 마음의 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여인이 병원을 찾아와서 가슴의 통증을 호소했다. 그러나 아무리 진찰을 하고 종합검진을 해도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남편이 잘 해주고 아이들이 그 어머니를 위해 효도했으나 여인은 항상 불안했고 삶은 파괴되어 갔다.
어느 날, 그 여인은 상담치료사를 찾아가 자신을 상담했다. 그는 상담치료사와 상담을 해 가는 동안 자신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았다. 술고래였던 아버지는 걸핏하면 집에 들어와 어머니를 때렸고, 아이들을 폭행했다. 동네 사람들 보기에도 부끄러웠다. 아이는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 결심을 했다. "죽어도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겠다!"
세월이 지나 성장한 아이는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잊고 살았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알 수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고, 그 증오는 독버섯처럼 자리 잡아 그 여인의 사람을 풍성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버지를 용서한다는 고백과 함께 여인은 고침을 받았다. 그의 삶이 풍성해졌고, 그녀의 교회 생활이 달라졌다. 용서야말로 내면의 병을 치료하는 가장 확실한 약이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용서하지 않는 독소는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의 사람들까지도 함께 파멸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실질적으로는 항상 원한을 사는 사람 이상으로 손해를 보는 자이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오직 육체를 따라 행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병든 내면을 치유하는 진정한 길은 모두를 용서하는 것이다.
3. 타인을 용서하기 위한 제언
그런데 이쯤에서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고민이 생긴다. 분명히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용서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도 알고 용서할 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용서할 때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굴레가 벗겨질 것이라는 것도 안다.
문제는 용서를 하긴 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잘 용서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여러분은 잘 용서할 수 있는 방법으로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는 더 잘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1) 면역력을 키우라(너무 민감하지 말라)
첫째로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다. 즉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도록 자신을 훈련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길이 생긴다.
우리가 분노하고 흥분하는 것들이 사실상 아무 것도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리라 하고 넘어가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 공연히 민감하게 반응함으로써 일을 커지게 만들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찰스 스윈돌은 면역력을 키우는 일에 대해 조금 달리 표현을 하는데 피부층을 두텁게 하라고 말한다. 웬만한 것으로는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 때 혁혁한 공을 세운 맥클란장군이 있다. 전쟁이 한창일 때 링컨대통령과 국방장관이 맥클란을 격려하기 위해 예고 없이 야전사령부를 찾았다. 그때 맥클란은 전장에 있었다. 링컨은 몇 시간을 기다려 그를 만났다. 그런데 뒤늦게 나타난 맥클란은 링컨대통령에게 의례적인 인사만 하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버렸다. 한참 후 맥클란의 부관이 내려와 대통령에게 말했다.
“장군은 지금 너무 피곤해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각하께 죄송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국방장관은 화를 참지 못했다.
“이런 무례한 장군은 당장 직위해제 시켜야합니다”
그러나 링컨은 고개를 저으며 장관을 타일렀다.
“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휴식이다. 아무도 그가 쉴 권리를 빼앗을 수 없다. 저런 소신 있는 장군이 진정 이 나라를 지킬 것이다”
결국 링컨은 조용히 되돌아갔다.
여러분이여. 생각해보라. 해석 여하에 따라서 링컨은 노발대발할 수 있다. 무시당했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당장에 명령을 내려 그 장군을 면직시킬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보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링컨은 그러리라 하고 넘겨버린 것이다. 충분히 민감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임으로서 앙심을 품지 않아도 된 것이다.
2)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어떻게 해야 우리는 더 잘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첫째로 면역력을 키우라고 말씀을 드렸다.
둘째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즉 역지사지의 사고를 할 때에 용서는 보다 쉬워지는 것이다.
여러분 이해한다는 말이 영어로 understand가 아닌가? 무슨 뜻인가? 상대방의 아래에 서는 것이다. 즉 상대방의 입자에서 서는 것이 바로 이해하는 것이란 말이다. 이해가 될 때에 용서도 되지 않겠는가?
다일 공동체의 최일도 목사님이 있다. 이분이 총각시절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연사의 수녀였다. 전도사가 수녀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이루어진다는 게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러나 최일도 청년은 정말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도전하였고 마침내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기적적인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날이다. 결혼하지 3개월이 채 되지 않은 신혼시절이었는데 첫부부싸움이 발생한다.
그 발단은 이렇다. 아내가 쪽문을 열고 부엌으로 내려가서 백혈등늘 켜다가 으악하고 비명을 지른 것이다. 남편은 너무 놀라서 비몽사몽간에 아내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옆에 있는 베개를 안고 부엌을 향해 있는 힘껏 돌진했다고 한다(강돈줄 알고). 그러다 꽝. 부엌이 워낙 낮아 머리로 받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기절. 의식을 찾고 깨어보니 아내가 상처 부위에 얼음찜질을 하고 있었다.
깨어난 남편이 물었다.
“지금 밖에 아무도 없는 거지요?”
“아뇨. 아직도...”
깜짝 놀라 문을 열고 누구냐고 소리쳐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알고 보니 지렁이 한 마리에 놀라서 비명을 지른 것이었다.
이때 지렁이 한 마리 때문에 머리가 다 깨지고 혹이 나고 이래도 되는건가 싶어 열이 받은 최일도 남편은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이 지렁이가 싫은 겁니까?”
아내가 고개를 돌리고 다른 말로 답했다.
“아이. 여보 학교 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여보. 지렁이가 싫은 겁니까?”
“왜 그래요? 별걸 다 묻네. 어서 서둘러요 그러다 늦겠어요?”
“이 지렁이가 싫은 겁니까?”
“아니 당신은 그걸 지금 말이라고 묻고 있어요. 왜 자꾸 미안하게끔 묻고 또 물어요?”
“당신 대답이 듣고 싶어서 묻는 거지요. 묻는 말 잘 듣고 대답해봐요. 지렁이가 싫은 겁니까?”
아내는 챙겨놓았던 가방을 방바닥에 던지며 울먹였다.
“나 오늘 학교 안가요”
“학교 가고 안가고는 당신 자유야. 내가 궁금한 것은 당신 자유야. 내가 궁금한 것은 지렁이가 정말 싫은가를 알고 싶은 거요. 여보 당신 정말 지렁이가 싫은 거야?”
“그럼 지렁이가 좋은 겁니까? 어어엉...”
“내가 언제 지렁이는 좋은 것입니까하고 물었나? 지렁이가 싫은 것입니까 하고 물었지요”
아내 왈. “그럼 지렁이가 좋은 거냐?”
결국 반말에 손찌검까지 해댔고 그날 출근도 안한 채 종일 싸웠다. 최일도 남편은 일부러 부엌에 가서 지렁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여주고, 귀엽다는 듯이 쓰다듬기도 하고, 일자로 세우기도 하고, 가지고 놀다가 방바닥에 놓으려고 했다.
아내는 분에 겨워 외마디 소리를 외쳤다.
“나쁜 놈”
지렁이 한 마리에 머리까지 깨진 마당에 아내에게 처음으로 “나쁜 놈”이라는 욕까지 먹고 보니 까짓 거 갈 때까지 가자는 심정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지렁이를 끊어서 두 토막을 냈더니 아내는 자지러지고. 결국 그날 새끼를 꼬박 굶고...
한참의 침묵 후에 대화.
최일도 남편의 말.
“여보 난 말야. 어릴 때부터 지렁이를 보면 반가운 마음이 먽 들곤 했어. 당신은 직접 본 일이 없는 당신의 시아버지가 되셨을 우리 아버지는 말이야 낚시를 참 좋아하셨지. 아버지가 낚시 갈 때면 호미를 들고 지렁이를 잡아 아버지에게 드렸는데 아버지가 참 좋아하셨어. 그래서 난 어린 시절 지렁이를 보면 무척 반가웠거든. 달팽이도 그렇고, 도마뱀도 그렇고. 단 한가지 예외가 있다면 쥐였어. 웬지 모르지만 쥐가 너무 싫었어”
아내의 말
“참으로 기쁘네요. 그 말을 듣고 참으로 나와 다른 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당신은 쥐가 싫다고 하지만요, 나는 쥐가 그렇게 싫다는 생각이 안 들거든요. 쥐는 털로 덮여있잖아요. 송충이도 털리 촘촘히 난 건 그런대로 귀엽던걸요. 하지만 어릴 때부터 털없이 매끈 매끈한 뱀, 지렁이, 도마뱀 등을 보면 전 정말 몸서릴 치곤 했어요. 그래서 오늘 지렁이를 보고도 비명을 지른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내가 옳고 네가 틀리고가 아니다. 서로 다른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너무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상대방 입장엣 생각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놀라운 용서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3) 성령으로 충만하라
어떻게 해야 우리는 더 잘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첫째로 면역력을 키우라고 말씀을 드렸다.
둘째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고 말씀을 드렸다.
셋째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다. 우리의 심령에 성령께서 충만히 거하실 때 우리는 그 능력으로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셨다. 그것은 예수님이 사역을 하실 때 뿐만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성령충만하신 예수님은 고난과 치욕의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조롱하는 무리를 위해 놀라운 기도를 드리신다.
"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장)
이 예수님을 본받았던 한 인물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스테반이다. 스테반도 성령이 충만했던 사람이다.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행 6장)
이 스테반은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는다. 그의 죽는 모습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장)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와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하여 아예 제쳐두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스테반의 그 위대한 용서는 바로 성령의 충만으로 가능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는가? 성령께서 그 안에 역사하시니까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도 용서할 힘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정말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우리 힘으로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4) 자신이 용서받았음을 기억하라
어떻게 해야 우리는 더 잘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첫째로 면역력을 키우라고 말씀을 드렸다.
둘째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고 말씀을 드렸다.
셋째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을 드렸다.
넷째로 내가 용서받은 자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 12장)
무슨 말인가? 누군가로 인해서 우리 맘이 상할 때, 너무 지쳐버릴 것 같을 때, 그만 포기하고 싶어질 때, 용납이 되지 않을 때 거역하는 우리를 참으신 주님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 앞에 허물 많은 사람이었다.
외할머니 손에 너무 곱게 자란 나는 어릴 때부터 무척이나 이기적이었다.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심부름을 시켜서 과자를 사오라고 하면 봉지를 다 뜯어서 내 봉지에 쏟아질 때까지 채우고는 적게 든 과자를 다른 애에게 주던 사람이었다.
나는 지독하게 고압적이고 군림하던 사람이었다. 내 동생들이 내게 덤비는 꼴을 못 보았다. 얼마다 동생들을 혹독하게 다루었는지 모른다. 내 바로 밑 동생은 주먹으로 볼을 얻어맞아 며칠간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 밑에 동생은 뚝길에서 복부를 얻어맞아 길바닥에 쓰러지기도 했다.
나는 손버릇도 참 안 좋았었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 아이의 지갑을 훔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돈만 빼내고 지갑은 쓰레기장에 버린 것이다. 그리고 신문을 돌리면서 신문 대금을 멋대로 쓰면서 신문사에 제대로 갖다 주지 않았다. 대신 도장을 새겨서 신문대금을 갖다 준 것처럼 위장하였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말하자면 내 허물과 죄악은 한도 끝도 없다.
그런데 내가 예수께 나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의 죄를 용서해주셨다. 나를 나쁜 놈이라고 외면하거나 내치지 않으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다.
“내 모습 이대로 날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너무나도 좋으신 주님이셨다. 정말로 추악하고 형편없는 나를 사랑과 용서로 사람 만들어 주신 것이다.
그 때문에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용납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영 못마땅한 사람이 생기면 내 자신에 말한다. “안목사.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잊었군. 너는 더 심했어. 너는 정말 형편없었어. 그런데 주님이 너를 용서하셨다고. 너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 주셨다고. 그 모든 것을 잊은 건 아니겠지?”
그러면 마음이 많이 풀린다.
미국의 어느 도시에서 한 젊은 부인이 번잡한 거리로 왔다가 어떤 흑인에게 큰 봉변을 당해 쓰러졌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현장을 달려와 부인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긴 사람입니까?"
부인은 신음하며 소리쳤다.
"흑인이에요, 흑인!"
그때 마침 얼마쯤 떨어진 곳을 지나던 흑인 한사람이 의심을 받고 경찰에게 붙잡혀 왔다. 뒤늦게 달려온 부인의 남편은 격분하여 다짜고짜로 그 흑인을 구타했다.
그러나 경찰에 끌려간 그 흑인은 조사 결과 아무런 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풀려나게 되었다. 집에 돌아온 흑인은 분해서, "두고봐라, 내가 이 놈을 요절을 내버리겠다."고 하자
그 어머니가 말렸다.
"그 사람은 너를 잘 모르고 그랬으니 용서해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죽인 사람들을 향해서도 용서를 빌었잖니. 용서해 주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니 네가 잘못이 없음이 들어난 이상 너는 벌써 이긴 사람이 된 것이다. 복수는 자칫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거란다."
그러나 아들은 쉽사리 마음을 바꾸려 들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는 아들을 곁에 두고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 제발, 제 아들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끔직한 죄를 저지르고 말 것입니다."
애타게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 아들은 어머니의 목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드리며 소리쳤다.
"어머니, 제가 잘못된 마음을 가졌어요, 이젠 그런 마음을 버릴께요."
바로 그때 문이 덜컥 열리더니 한 사람이 쏜살같이 들어와 두 사람을 한꺼번에 끌어안고 통곡을 하였다. 두 흑인 모자는 갑자기 뛰어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살폈다.
"제가 바로 아무것도 모르고 당신을 죽도록 구타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은 차분하게 말했다.
"난 틀림없이 당신이 복수하기 위해 나를 죽일 거라고 단정했지요.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오늘밤 내가 먼저 당신을 죽이려고 당신의 집으로 몰래 숨어들었으나, 당신 모자의 눈물겨운 대화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을 알고 흑인 모자는 또 한 번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흑인 어머니의 말을 되새기라.
“"그 사람은 너를 잘 모르고 그랬으니 용서해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죽인 사람들을 향해서도 용서를 빌었잖니. 용서해 주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니 네가 잘못이 없음이 들어난 이상 너는 벌써 이긴 사람이 된 것이다. 복수는 자칫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거란다."
나와 여러분은 먼저 용서받은 자이다. 무조건적인 용서를...이것을 기억하면 용서하는 것이 수월할 것이다.
결론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용서를 위한 기도”를 가르치셨다.
그런데 용서를 비는 기도를 드리는데 따른 전제조건이 있다. 바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주는 것이다.
왜 용서해야 하는가? 먼저는 용서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도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고 용서할 때 우리 자신에게 큰 유익이 있는데 우리를 굴레씌운 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 바로 그럿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용서할까? 용서를 위한 제안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다.
-면역력을 키우라.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도록 훈련하라는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내 힘으로는 용서되지 않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능히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용서받은 자임을 기억하라. 이것만 잊지 않아도 용서는 수월하지 않을까?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용서하는 자가 되시고 하나님 앞에 자연스럽게 용서를 비는 자가 되시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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