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사람과 변치 않는 사람 삼상20:24-34
24. ○다윗이 들에 숨으니라 초하루가 되매 왕이 앉아 음식을 먹을 때에
25. 왕은 평시와 같이 벽 곁 자기 자리에 앉아 있고 요나단은 서 있고 아브넬은 사울 곁에 앉아 있고 다윗의 자리는 비었더라
26. 그러나 그 날에는 사울이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생각하기를 그에게 무슨 사고가 있어서 부정한가보다 정녕히 부정한가보다 하였음이더니
27. 이튿날 곧 그 달의 둘째 날에도 다윗의 자리가 여전히 비었으므로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 묻되 이새의 아들이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 식사에 나오지 아니하느냐 하니
28. 요나단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다윗이 내게 베들레헴으로 가기를 간청하여
29. 이르되 원하건대 나에게 가게 하라 우리 가족이 그 성읍에서 제사할 일이 있으므로 나의 형이 내게 오기를 명령하였으니 내가 네게 사랑을 받거든 내가 가서 내 형들을 보게 하라 하였으므로 그가 왕의 식사 자리에 오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
30.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31.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32.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33.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한지라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줄 알고
34. 심히 노하여 식탁에서 떠나고 그 달의 둘째 날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
오늘날 세상 사람들을 보면서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 많은 사람이 변한다고 하는 것. 이것은 좋은 의미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좋지 않은 의미에서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임.
맘 바뀌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됨.
그런데 이런 세상이기에 오히려 더욱 신뢰를 느끼게 되며 더욱 더 사랑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 변치 않는 모습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오늘 본문에서 대비되는 두 인물이 있음. 한명은 사울이고 다른 한명은 그 아들인 요나단이다. 이 두 사람에게는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해당하지 않는다.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사울은 변질된 모습의 사람을, 요나단은 변치 않는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변질된 사람은 어떻게 변질되었으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 살피면서 우리 자신의 경계를 삼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란다. 변치 않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것임을 살피면서 우리 자신이 닮을 모법으로 삼기를 원한다.
1. 변질된 인물-사울
먼저 변질된 인물인 사울에 대해 함께 살펴보자.
1)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는 사울의 문제점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는 사울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울은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에 사로잡혀 있다.
24. 다윗이 들에 숨으니라 초하루가 되매 왕이 앉아 음식을 먹을 때에
25. 왕은 평시와 같이 벽 곁 자기 자리에 앉아 있고 요나단은 서 있고 아브넬은 사울 곁에 앉아 있고 다윗의 자리는 비었더라
26. 그러나 그 날에는 사울이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생각하기를 그에게 무슨 사고가 있어서 부정한가보다 정녕히 부정한가보다 하였음이더니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마음이 비뚤어진 자의 특성이다. 매우 못된 습성인 것이다.
이런 사람이 교인들 가운데 있으면 교회가 어수선해진다. 매사를 삐딱하게 보고 받아들이고 반응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 주일예배를 못나왔다. 그 사람을 향한 두 종류의 반응. “도움이 더 필요한 사람이구나. 믿음이 자라도록 더욱 기도해주고 격려해주어야겠다”. “또 빠졌군. 늘 믿음이 저 모양이야. 하나님도 저 사람은 짜증이 나실 거야”. 전혀 다르지 않은가?
이런 태도는 설교를 들을 때도 나타난다. 믿음이 좋은 성도를 대할 때도 열심히 충성하며 봉사하는 사람을 대할 때도 나타난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나타난다. 혹시 여러분에게는 이런 습성이 없는지 돌아보시라.
-이성을 압도해 버린 감정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는 사울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울은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에 사로잡혀 있다. 둘째로 사울은 감정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을 압도하고 있는 상태다.
27. 이튿날 곧 그 달의 둘째 날에도 다윗의 자리가 여전히 비었으므로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 묻되 이새의 아들이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 식사에 나오지 아니하느냐 하니
28. 요나단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다윗이 내게 베들레헴으로 가기를 간청하여
29. 이르되 원하건대 나에게 가게 하라 우리 가족이 그 성읍에서 제사할 일이 있으므로 나의 형이 내게 오기를 명령하였으니 내가 네게 사랑을 받거든 내가 가서 내 형들을 보게 하라 하였으므로 그가 왕의 식사 자리에 오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
30.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사울은 감정이 극해져서 아들에게 해야할 말과 하지 말아야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아들을 향해서 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라고 욕할 수 있을까?
감정은 소중한 것. 표출이 되어야 함. 눌러만 놓아서는 안됨. 정신적으로 건강해지지가 않음. 그러나 통제 또한 필요함. 해야 할 말과 해선 안될 말을 구분해야 함.
이것은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 해야할 말이 있고 절대로 해서는 안될 말이 있다. 극해진 감정에 사로잡혀서 해서는 안될 말을 할 때 그것은 서로의 관계를 깨뜨리고 사단이 교회를 무너뜨릴 구실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정 내에서도 마찬가지. 해야할 말이 있고 절대로 해서는 안될 말이 있다. 극해진 감정에 사로잡혀서 해서는 안될 말을 할 때 그것은 서로의 관계를 깨뜨리고 부부 사이에는 건너질 못할 강이 생겨나는 것이다.
감정적인 상처가 미치는 영향은 사실 심각함. 감정에 상처를 받게 되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다.
먼저 감정에 상처를 받게 되면 두려운 마음이 생겨 불안하게 된다고 한다. 두 번째는 분노심이 생긴다고 한다. 미움, 시기, 반항, 질투 등도 모든 감정의 상처 때문이다. 셋째로 실패의 감정이 생겨 좌절감, 열등감, 죄책감 등에 사로 잡힌다.
물론 요나단은 사울이 감정적으로 내뱉은 말에 정서적인 상처를 크게 받아 삐뚤어지지 않았지만 사울의 모습은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넘어서는 이기심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는 사울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울은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에 사로잡혀 있다. 둘째로 사울은 감정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을 압도하고 있는 상태다.
셋째로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넘어선 이기심을 보여준다.
31.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사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사무엘을 통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려 하신 이가 누구인가? 하나님이시다.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삼상 16장)
“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8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의 앞을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9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11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12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13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 16장).
사울은 이제 막 나간다. 하나님의 뜻이고 뭐고 없다. 자기가 왕 노릇을 계속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기 아들들이 계속 이어서 왕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웠든 말았든 다윗은 왕권을 자손에게 이어가는데 걸림이 되니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기심이 하나님의 지엄한 뜻을 넘어서버리는 것이다. 참 두렵고 떨리는 현상이다.
-통제를 벗어나는 흉악한 행동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는 사울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울은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에 사로잡혀 있다. 둘째로 사울은 감정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을 압도하고 있는 상태다. 셋째로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넘어선 이기심을 보여준다.
넷째로 사울은 통제를 벗어나는 흉악한 행동을 하고 있다.
32.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33.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한지라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줄 알고
원래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 아들 요나단이 무사히 왕권을 이어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 요나단이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해서 단창을 던져 죽이려하는 것이다. 이게 제정신인 사람의 모습인가? 망가져도 완전히 망가진 사람의 모습이다.
사실 요즘에는 이처럼 안전히 망가진 사람의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거라사의 광인.
사실 사울도 악귀에 들림.
어쩜 이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기 아들을 단창으로 죽이려한 사울처럼 흉악한 행동마저 통제되지 않는 것이다.
2) 사울의 처음 모습은 어떠했는가?
그런데 여러분이여. 사울이 원래부터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원래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었다. 어떤 면에서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부모 말에 순종하는 사람
첫째로 사울은 부모의 말에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3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한 사환을 데리고 일어나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4 그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고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니되 없고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니라”
부모에게 순종할 줄 안다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이점을 매우 중요하게 보신다.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비결이 무엇인가? 바로 부모에게 효도하는데 있다.
성경은 말씀한다.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장)
“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장)
부모의 말씀에 최선다해 순종하는 모습이 원래 사울이 가진 멋진 모습이었다.
-경청할 줄 아는 사람
어떤 면에서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첫째로 사울은 부모의 말에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둘째로 사울은 다른 사람의 말에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5 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이 함께하는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부친이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6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 7 사울이 그 사환에게 이르되 우리가 가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드리겠느냐 우리 그릇에 식물이 다 하였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도다 무엇이 있느냐 8 사환이 사울에게 다시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내 손에 은 한 세겔의 사분 일이 있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려 우리 길을 가르치게 하겠나이다 9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 10 사울이 그 사환에게 이르되 네 말이 옳다 가자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 있는 성으로 가니라”(삼상 9장)
경청할 줄 안다는 것, 그것은 대단한 인격이다. 그릇이 크고 넓은 사람에게서 보여질 수 있는 성품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의 주관을 딱 정해 놓고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어떤 경우는 귀 기울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듣는 척만 할 뿐 결국은 자기 고집대로만 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경청할 줄 모르는 완고한 자가 되지 않도록 기도하시라.
-겸손한 사람
어떤 면에서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첫째로 사울은 부모의 말에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둘째로 사울은 다른 사람의 말에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셋째로 사울은 겸손한 사람이었다.
“20 사무엘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21 베냐민 지파를 그 가족대로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그를 찾아도 만나지 못한지라 22 그러므로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행구 사이에 숨었느니라 23 그들이 달려 가서 거기서 데려오매 그가 백성 중에 서니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나 더 크더라 24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삼상 10장)
사무엘은 이때의 사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17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삼상 15장).
스스로를 크게 생각하는 사람만큼 하나님 앞에 작고 초라한 사람은 없다.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은 사울 스스로 자신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숨었을 때 오히려 그를 왕으로 삼으셨다. 역설적인 진리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를 세우는 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는가? 겸손한 사람들이다. 자신의 부조함을 늘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하여 교회를 부흥케 하신다. 어떤 사람들이 교회를 허물어 뜨리는지 아시는가? 자기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교회를 섬기려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교회를 지배하며 자기가 좌지우지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망가뜨린다. 부디 이곳에는 교회를 부수는 이가 한 사람도 없이 겸손으로 섬기며 교회를 세우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3) 무엇이 사울을 변질시켰는가?
어떤가? 사울을 변했지 않은가?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사울은 변질되었지 않은가? 그는 좋지 못한 측면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면 그가 그처럼 변하게 되었던 요인들은 무엇일까?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세월
첫째는 세월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울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것이다.
요즈음에 내가 자주 듣는 것이 있다. 나이가 들면 사람이 변한다는 것이다. 젊을 때 패기 있고 올바르던 사람이 나아 들면서 탐욕적이 되고 이상하게 변질된다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다.
타락한 사람들. 처음에 안 그랬던 사람들이 많다. 젊을 때는 정말 괜찮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왜 이렇게 변해버렸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 상당한 경계를 하게 하는 말들이다.
처음 마음이 사라지거나 변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살피는 것은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처음에는 아름답고 멋진 모습이다가도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4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장)
-높아짐
둘째는 높아짐이라고 하는 요소이다. 왕이 되기 전 겸손하던 사울이 왕이 된 후에 변질되어버린 것이다.
사람은 왜 높아지면 변질될까? 풀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왕이 되기 전 사울은 아버지의 말씀에도 순종하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정작 왕이 된 후에는 왜 아버지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일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울.
“1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을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4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에서 계수하니 보병이 이십만이요 유다 사람이 일만이라 5 사울이 아말렉성에 이르러 골짜기에 복병하니라 6 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 내려가라 그들과 함께 너희를 멸하게 될까 하노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이에 겐 사람이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니라 7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8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삼상 15장)
높아질 때를 조심하라.
개척교회 목사일 때 가졌던 순수함과 열정을 대교회 목사가 되었을 때에도 변치 않아야 하는데...
가난할 때 보다 부유해질 때
어려울 때보다 잘 나갈 때
낮아졌을 때보다 높아졌을 때 조심해야 함. 그것이 사람을 변질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기심
셋째로 시기심이라고 하는 요소이다. 이것은 다윗과의 비교의식에서 시작된다.
“6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7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8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삼상 18장)
물론 시기라는 것이 전혀 들지 않을 수는 없다. 훌륭한 사람들도 시기심이 그 속에서 일어나곤 하는 것이다.
옛날 영국 런던에 아주 유명한 목사님 세 분이 계셨다. 한분은 그리스도 교회의 목사님인 F.B 마이어라는 분이며, 또 한 분은 기독교 역사상 제일 설교를 잘 하시는 침례교회 스펄젼 목사님이며,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캠벨 몰간 목사님이시다. 그런데 세 분 중에서 몰간 목사님이 잠시 미국에서 사역하다가 영국으로 돌아와서 웨스트민스터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그 때 마이어 목사님은 이런 고백을 했다. 몰간 목사님이 미국에 있을 때는 기도하기 좋았는데 같은 도시에서 일하게 되니깐 그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게 되더라는 고백이었다. 시기 때문이었다. 훌륭하신 목사님의 마음 속에서 시기심은 싹틀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이 중요하다.
마이어 목사님은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제 마음 속에서 이 시기와 질투를 없애 주옵소서."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그 시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때 하나님께서 마이어 목사님께 이런 음성을 들려 주셨다. "네 기도를 바꾸어라. 질투를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들의 축복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음성이셨다. 그래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스펄전 목사님과 캠벨 몰간 목사님과 그 교회들을 축복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나니깐 마음 속에 평안과 기쁨과 자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자기 교회의 공개 기도삭상에서 마이어 목사님이 이런 유명한 기도를 했다. "하나님, 몰간 목사님의 교회를 축복해 주셔서, 사람들이 메워지도록 해주시고, 들어갈 자리가 없거든 우리 교회로 보내 주시옵소서," 이 세분은 아름답게 주를 위해서 사역했으며, 이 세 교회는 다함께 성장했다.
어쩌면 우리 가운데도 이런 시기심이 생길 지 모르겠다. 마치 자신이 밀리는 것 같은 위기감도 느낄 지 모르겠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에 굴복하지 마시고 기도록 이기시는 여러분이 되시라. 오늘 본문의 사울은 극복하지를 못했다. 그리고 결국은 다윗을 죽이려는 살의에 가득한 비극적인 인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2. 변치 않는 인물-요나단
이제 두 번째 인물인 요나단, 변치 않은 요나단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요나단은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는데 특별히 다윗이라는 사람과의 인간관계에서 아름다운 인격을 드러내고 있다.
1)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우정
먼저 다윗과 요나단이 어떻게 해서 서로 우정을 쌓아가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골리앗을 죽인 다윗을 향한 우정
그 첫 번째 만남은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윗은 블레셋의 골리앗으로 인해 위축되어 있고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에게 골리앗을 이김으로써 승리를 안겨다 주었다.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50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 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51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어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삼상 17장)
사울은 그런 다윗을 불러 대화를 나눈다. “55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나감을 사울이 보고 군장 아브넬에게 묻되 아브넬아 이 소년이 뉘 아들이냐 아브넬이 가로되 왕이여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매 56 왕이 가로되 너는 이 청년이 누구의 아들인가 물어보라 하였더니 57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그 손에 있는채 아브넬이 그를 사울의 앞으로 인도하니 58 사울이 그에게 묻되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뇨 다윗이 대답하되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삼상 17장)
그때 요나단과도 접하게 되고 요나단은 다윗과 마음이 통하게 된다.
“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삼상 18장)
이것이 우정의 시작이다.
-다윗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요나단
이처럼 좋은 친구의 관계를 시작하게 된 요나단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다윗에게 내어준다.
“3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4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삼상 18장).
자신의 군복과 칼, 활과 띠는 일종의 자기분신이다. 자신의 자존심이다. 그것은 절대로 함부로 다루어서도 안되는 것이고 함부로 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요나단은 자신의 귀한 것을 기꺼히 다윗에게 내어주고 있다.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을 내어주지 않는가?
자신의 아내와 남편을 사랑할 때 귀한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다. 자꾸 주기 싫어하는 것이 생기기 시작하면 둘 사이에 골이 생기고 있다고 보아도 무관하다.
자식을 소중히 여기기에 그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지 않는가?
교회를 사랑할 때 절대로 가만히 있지 못한다. 교회를 섬기며 봉사하며 자신의 귀한 것을 드리게 되어 있다.
-다윗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는 요나단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우정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1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하므로 2 그가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3 내가 나가서 너 있는 들에서 내 부친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부친과 말하다가 무엇을 보거든 네게 알게 하리라 하고 4 요나단이 그 아비 사울에게 다윗을 포장하여 가로되 원컨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5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6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 7 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알게 하고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여전히 있으니라”(삼상 19장)
요나단이 다윗을 다시금 사울 왕 앞에 서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2) 우정이 깨어질만한 요소
그런데 여러분. 이런 좋은 만남과 관계를 유지하는 요나단이지만 사실 그에게는 우정을 깨뜨릴만한 요소가 충분히 있었다.
-황태자라고 하는 기득권
첫째로 그것은 요나단이 황태자라고 하는 기득권이다. 우리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생명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의 예를 얼마든지 들 수 있지 않은가?
기득권을 침해당하자 시기심이 가득하여 예수를 고소한 종교지도자들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15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줄 앎이러라”(마 27장)
예전에 성경을 읽을 때엔 종교 지도자들이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음. 그러나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음.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됨. 자신의 기득권을 건드리면 양떼를 돌보아야할 영적인 목자들조차 양을 잡아먹는 늑대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점을 자꾸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별히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각하다. 권력의 맛을 아는 사람들은 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지 하는 것이다. 헤롯은 유아들조차 살해하지 않았는가?
“1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5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 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마 2장).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마 2장).
그런데 요나단은 황태자이며 장차 왕이 될 사람인데 그것을 위협하는 존재가 바로 다윗인 것이다.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 관계인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상황이 아닌가?
-왕으로서의 자질
어떤 것이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우정을 깨뜨릴 만한 요소인가? 첫째로 그것은 요나단이 황태자라고 하는 기득권이다.
둘째로 요나단이 가진 왕으로서의 자질이다.
요나단이 무능하고 다윗이 유능할 때 요나단은 까짓거 다윗이 왕하는 게 이 나라에 보탬이 되겠지 하며 넓게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실상 그렇지 않다. 다윗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기는 하지만 요나단 역시 다윗 못지 않게 뛰어난 인물인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승리를 가져다준 요나단.
“6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 병기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하여 따르리이다 8 요나단이 가로되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9 그들이 만일 이같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10 그들이 만일 이같이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하고 11 둘이 다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가로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12 그 부대 사람들이 요나단과 그 병기 든 자를 대하여 가로되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한 일을 보이리라 한지라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고 13 요나단이 손발로 붙잡고 올라갔고 그 병기 든 자도 따랐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매 병기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14 요나단과 그 병기 든 자가 반일경 지단 안에서 처음으로 도륙한 자가 이십인 가량이라 15 들에 있는 진과 모든 백성 중에 떨림이 일어났고 부대와 노략군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삼상 14장)
이것은 마치 골리앗을 이기고 이스라엘에 대승리를 안겨준 다윗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그런데 요나단은 내가 이처럼 뛰어나니 내가 해야만 해 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멋진 사람인가? 아까도 언급이 되었지만 내가 해야만 해라는 생각이 교회를 망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혈육으로서의 이기심
어떤 것이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우정을 깨뜨릴 만한 요소인가? 어떤 것이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우정을 깨뜨릴 만한 요소인가? 첫째로 그것은 요나단이 황태자라고 하는 기득권이다. 둘째로 요나단이 가진 왕으로서의 자질이다.
셋째로 혈육으로서의 이기심이라는 요소이다.
여러분이여. 요나단은 고아가 아니다. 세상에 가족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다윗만 친구로 남아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에게는 아버지가 있다. 동생들이 있다. 그리고 아내와 자식이 있다. 요나단이라고 가족애가 없었겠는가? 그리고 가족애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가? 사실 가족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가족을 위한 일에 도를 지나치는 일이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가족이 아닌 인간관계를 깰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할 여지가 많음.
사실 우리나라의 특징 중 하나. 가족이기주의. 이것 때문에 교회가 깨지기도 함.
3) 다윗을 향한 변치 않는 우정
변치 않는 모습으로 다윗을 향한 사랑과 우정을 베푸는 요나단. 그 실례가 어디에서 보여지는가?
-다윗을 위한 요나단의 배려
첫째로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배려에서 보여진다.
“24 다윗이 들에 숨으니라”
사랑은 배려임.
다윗은 지금 사울을 두려워하고 있음. 그런 다윗에게 왜 그러냐고 뭐가 두렵냐고 내가 도와주면 되지 않냐고 다그치지 않고 다윗의 입장에서 생각해줌. 다윗을 숨게 해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알아서 해 주겠다고 함.
이 배려라고 하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로 간에 더욱 배려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이기 원한다.
-다윗을 위한 요나단의 변호
둘째로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변호이다.
27. 이튿날 곧 그 달의 둘째 날에도 다윗의 자리가 여전히 비었으므로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 묻되 이새의 아들이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 식사에 나오지 아니하느냐 하니
28. 요나단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다윗이 내게 베들레헴으로 가기를 간청하여
29. 이르되 원하건대 나에게 가게 하라 우리 가족이 그 성읍에서 제사할 일이 있으므로 나의 형이 내게 오기를 명령하였으니 내가 네게 사랑을 받거든 내가 가서 내 형들을 보게 하라 하였으므로 그가 왕의 식사 자리에 오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
31.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32.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요나단은 사울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 요나단의 변호는 큰 위험을 감수한 상태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실 누군가 어려움을 겪을 때 관심 가져주고 그 사람 편에 서준다고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대개의 경우 다른 사람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그 일에 따르는 대가가 때로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강도 만난 사람을 비켜 가버리는 제사장과 레위인. 왜 그랬을까? 부담감이 있기에. 그와 대비되어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는 사마리아 사람.
사랑하는 여러분. 어쩌면 주일 예배만 딸랑 드리고 마는 것이 속편한 신앙생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부담을 짊어지더라도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요나단처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상대를 위해 변호해 주어야 한다. 우리 서로 간에 그런 모습이 있기를 원한다.
성도들은 자신들의 목회자를...목회자는 맡겨진 양떼들을... 성도들간에 서로
-다윗을 위한 요나단의 슬픔
셋째로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슬픔이다.
33.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한지라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줄 알고
34. 심히 노하여 식탁에서 떠나고 그 달의 둘째 날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함이었
친구가 모욕당한 것을 인하여, 그가 위기에 처한 것을 인하여 저녁 식사를 거름. 다음날도 안 먹음. 참 위대하다는 생각. 어떻게 밥을 안 먹을까? 친구를 위해서. 난 아무리 아파도 일어나 밥 먹고 누워 있는데...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사랑과 우정은 상대방이 슬플 때 함께 슬퍼하는 것이다.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성경은 말씀.
나사로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통분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심.
영혼들을 향하여 울며 편지를 쓰는 바울.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여러분에게 어려움을 당한 성도를 향한 눈물이 가득하시길 축언한다. 이제 한 공도체이다. 이 공동체가 함께 즐거워하는 공동체일 뿐 아니라 함께 울 수 있는 공동체이길 원한다. 다윗을 친구 요나단처럼 말이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우리는 두 사람을 살펴보았다. 상황따라 변해버린 사울과 어려운 상황임에도 변치 않는 신실함을 보여준 요나단이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 앞에 변치 않는 사람이 되자. 상황 따지지 말고
서로를 향하여 변치 않는 사람이 되자. 때로 충돌도 있고 서로 다른 모습들도 발견하게 될 것이지만 그럼에도 일관된 모습으로 사랑하며 섬기는 참사랑공동체이기 원한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함께 시간을 투자하고 손해보고 관심을 갖고, 무엇보다 함께 기도하기를 제안한다.
오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변치 않는 신실한 사람들로 서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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