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정죄와 용서 요8:1-11(2011. 7. 13 수요예배 설교)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사람이 사람을 정죄할 수 있는가? 없다.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이다. 판단과 비판은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이다.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약1장.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7장.
다른 사람보고 사랑이 있네, 없네.
영성이 있네, 없네.
사람 됨됨이가 이렇네, 저렇네.
왜 저 모양이야? 틀려먹었네. 기타 등등.
많이 언급되는 주제이면서 중요한 주제 몇 가지를 다루고자 한다. 죄와 정죄와 용서라고 하는 주제이다.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이해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1. 죄를 지은 여인
1) 간음죄.
시대적인 배경. 간음죄는 돌에 맞아 죽는 상황.
마리아의 믿음이 대단한 이유.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
가브리엘의 수태고지. 두 가지 면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a. 처녀가 잉태하는 것은 불가능
b. 정말 창피한 일이 될 수 있음.
C. 처녀가 잉태하면 죽임을 당함. 배우자 외의 남자에 의해 아이가 생긴 것이기에.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 드러내지 않고 파혼하려 함. 분노할 만한데 복수심에 의해서라도 드러내서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마리아를 살리기 원한 것임. 이 때문에 상대적인 면에서 의롭다라고 평가받은 요셉.
천사가 설명을 해주었기에 요셉은 안심하고 마리아를 데리고 옴.
2) 오늘날에는?
큰 문제가 안 되는 상황.
유부남 혹은 유부녀와의 간음이 아닌 이상.
간통죄가 있기에.
그런데 이 조항을 없애려는 움직임이 일어남.
남녀간의 사랑인데 왜 그것을 법으로 금하느냐는 것임.
한심한 일. 가정 파괴인데...
물론 들키지 않고 바람 피는 사람들이 많긴 하다.
아무튼 음란한 문화. 더 이상 죄로 여기지 않는 상황.
최근에 썼던 글.
동거생활하는 젊은이들 / 안희환
최근에 인터넷 상에서 [동거 커플의 성 트러블]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 글을 읽는 동안 마음이 착잡하였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도덕성이 이 정도로 추락했는가 하는 속상함 때문이었습니다. 결혼을 하기 전에 쉽게 동거생활을 하는 모습도 좋아보이지 않고, 그렇게 살다가 헤어진 후에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는 모습도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특히 끔찍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쾌락을 위해 동거하다가 실수로(?) 생긴 태아를 죽이는 낙태행위입니다.
아래는 올라왔던 몇 개의 글 내용입니다. 실 내용은 글로 읽어보시기 바람. 실제 인용하기에 낯부끄러운 내용들이 많음. 대략만 소개하면.
영국에서 어학연수 중. 하우스 메이트인 일본 남자와 함께 동거 생활. 그런데 그것이 소문나서 골치아프다는 이야기. 한국 가면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피임을 안해서 낙태 수술. 그런데 또 남자가 피임대비 안해서 고민.
역시 낙태 수술. 그런데 두 번째 낙태라서 의사가 하는 말이 임신이 더 이상 어렵다고. 남자에게 말했더니 부모님 핑계대면서 여자를 차 버림. 그 때문에 힘들어서 하소연.
위의 글 내용들이 모두 사실인지에 대한 확인은 해볼 수 없었습니다. 실명이 올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주소나 전화번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위의 글 뒤에 그 글에 대해 조언을 해주는 내용들이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상담하는 내용인가보다 하고 추측할 뿐입니다.
그리고 저의 솔직한 생각으로는 다 사실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제가 경험한 어떤 일들 때문입니다. 예전에 충주에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한 대학교 학생들이 자취생활을 하는 곳이 제가 머무는 곳 가까이에 있었는데 꽤 많은 학생들이 무척 가까운 사이로 보였습니다. 농도 짙은 스킨십의 모습도 볼 수 있었고 밤 늦은 시간에 꼭 붙어다니는 모습들도 볼 수 있었습니다.
형편이 좀 되는 학생들은 작은 아파트를 얻어서 자취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아파트의 한 주민이 제게 해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입을 맞추는 광경도 종종 목격하게 되며 한 집에 남학생과 여학생에 함께 머무는 곳도 많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힘들게 돈을 벌어 자녀들의 학비를 대주는데 일부 학생들은 어이없게도 공부에는 전념하지도 않은 채 동거생활이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여학생이 낙태수술을 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도 들렸습니다. 그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었는데 지금은 보다 흔한 현상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몇 명 있으니 말입니다. 이미 저질러진 일이라 충고하거나 잔소리를 하는 것이 무의미했지만 내 일도 아니면서 그들의 삶의 모습 때문에 가슴앓이를 했습니다. 또 그들의 남편이 될 사람이 안됐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누군가는 절 보고 그러더군요. 그런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남자들이 안됐다고 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남자들 역시 매일반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 속고 속이는 결혼생활인 것인지 아니면 다 알고 이해하면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다 알면서 함께 부부로 사는 것이라면 참 속도 좋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또 한 면에서는 서로 간에 불신이 생기지는 않는 걸까 하는 마음도 듭니다.
좀더 신중했으면 좋겠습니다. 교제도 좀더 신중하면 좋을 것 같고 동거는 더더욱 심사숙고해야할 일인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지만 그런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문화 자체가 워낙 자유분방한 세상이 되었는지라 표현을 최대한 약화시켜서 했습니다만 사실은 더 강하게 말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도덕성이 무너져버리고 있는 우리나라입니다.
이 글에 대한 반응 중 놀라운 것. 학생들은 서로 사랑하면 안되 냐는 것. 그게 무슨 문제냐는 것. 낙태는 처녀만이 아닌 기혼자들도 한다고 하는 반응도 있음. 마음이 답답해짐.
그런데 이런 타락 현상은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님.
노아의 홍수 때
소돔과 고모라.
로마.
분명한 것은 그것이 죄라고 하는 것. 인정하기 싫더라도. 성경이 분명히 죄라고 하니 그게 싫어서 성경 자체를 없애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음. 성경의 신빙성에 대한 공격. 그런 일은 역사적으로 계속 있었고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함. 하나님의 말씀이니 사라질 수가 없는 것임.
3) 죽게 된 여인의 상황
다시 여인에게로 돌아오자.
그 당시의 문화. 간음하다가는 죽임을 당하는 처지.
항변하지도 변명하지도 못하는 여인의 상황.
죽음 앞에 놓인 여인의 형편은 곧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함.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 것임. 두 번에 걸친 죽음.
첫 번째 죽음은 육신의 죽음. 두 번째 죽음은 심판의 죽음.
이것은 협박이 아님. 사실임.
4) 예수님 때문에 살게 된 여인.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생명의 은인임.
일생 잊을 수 없는 감격이 있을 것임.
예수님 때문에 살게 된 우리들.
영국 학자들이 선다 싱에게 물었다.
"신약에 있는 예수의 피로 구원되었다는 말을 선생님은 어떻게 해석합니까?"
선다 싱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버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일이오. 어느 날 나는 '그리스도는 우리 죄인을 구하기 위해서 피 흘려 죽으셨다.'라고 말씀을 전했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질문을 하더군요.
그 때 한 신사가 나서면서 '이 사람이 하는 말은 참말입니다.'라고 말했어요. 처음에 나는 그가 기독교인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기독교인도 아니었소.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언젠가 그가 산 속을 걷다가 비탈에서 미끄러져 크게 부상을 입고 많은 피를 흘렸다는군요. 마침 그의 아버지가 그를 발견해서 급히 병원에 데려갔으나 그 땐 이미 거의 죽어 있었답니다.
의사가 그를 보고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하자 기가 막힌 아버지는 의사가 붙들어 '얘는 내 외아들인데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하겠습니다.' 라고 사정했다고 해요. 아버지의 애원에 못이긴 의사는 누구든지 피를 내어준다면 살릴 수 있다고 말했고 그의 아버지는 크게 기뻐하며 자기 피를 빼서 그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결국 '아버지는 죽고 그는 살아났습니다.'
이 버마 사람처럼 나는 산에서 떨어져 영의 피를 잃어 버렸소. 살아날 가망은 이미 전혀 없어 죽음에 다다랐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를 나에게 부어 주셨소. 그가 나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라오. 누구든지 그 마음을 기쁘게 바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구원받을 것입니다."
1.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2. 내 은혜로신 하나님 날 도와주시고 그 크신 영광 널리 펴 다 알게하소서
3. 내 주의 귀한 이름이 날 위로하시고 이 귀에 음악 같으니 참 희락 되도다
4. 내 죄의 권세 깨뜨려 그 결박 푸시고 이 추한 맘을 피로써 곧 정케하셨네 아멘
2. 정죄하는 사람들
1) 예수님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
a. 대중들이 추종하는 예수님의 인기.
b.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의 모습.
c. 자신들을 향한 예수님의 비판.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
처음에는 예수님과 어울리고 친하게 지내려는 시도를 했었는데 확실히 틀어져버린 것임.
2) 너무나 냉혹한 무리들
여인의 비참함은 생각해보지도 않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여인을 세움. 얼마나 창피할까? 여인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음.
돌을 들고 치려는 위협. 얼마나 두려웠을까?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여인을 이용.
여인을 죽어 마땅하다고 정죄하는 사람들.
이런 냉혹함은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일에도 일조함.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무리들. 그것을 조종하는 사람들.
3) 심각한 문제를 가진 사람들
a.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함
아버지의 마음은 무엇일까? 긍휼의 마음.
내게 이 마음이 많이 모자랐다는 것을 느낌.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한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탕자의 형.
그러다 보니 못마땅한 것이 많음. 탐탁하지 않은 것임. 동생이라고 생각하기 싫은. 아버지의 아들이라고만 부름. 아버지는 수정해줌. 네 동생.
안식일에 왜 병을 고치는가? 아픈 사람 입장은 생각도 안하고.
안식일에 왜 이삭을 비벼먹는가? 배고프던 말든 그것은 상관없음.
죄인이 손대는 것을 왜 용납하는가?(죄인 여자가 향유 부을 때).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 그 마음의 절박함은 헤아리지도 않은 채.
내 옛 모습이 생각남.
열심 있었음. 기도. 말씀. 충성. 봉사.
파트 전도사인데 교회에서 살았음.
학생회 교사 모임. 교사 선발. 16명까지.
성서대학을 열었음. 자원해서.
남전도회 교육을 맡았음. 23살부터. 정전도사님보다 3살 어릴 때부터.
금요기도회 전담함.
심방 다님.
그러면서 학교 공부. 부흥회 인도.
그런데 결정적인 결함. 내게 긍휼의 마음이 없었음.
대학 떨어진 셋째 동생. 방치함. 지금에 와서 일종의 한이 됨. 그때 시간 내서 먹을 것도 사 주고 대화도 나누고 위로도 해줄걸. 교회 일에 목매느라고 그냥 내버려 둠. 왜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기지 못했을까?
지각한 교사들. 한참 어린 내게 인사. 그 인사를 받지 않음. 예배 시간에 지각하는 교사의 인사 따위 받을 가치도 없다는 생각. 지금 생각하니 아찔함. 그런 교만이 어디 있나? 힘들고 어려운 와중에 열심히 교사로 봉사하는 건데 좀 더 품어주지는 못할망정 인사조차 안 받았으니. 긍휼의 마음이 없는 것임. 아버지의 마음이 없는 것임.
그때보다는 많이 성장.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음.
그러나 여전히 모자란 부분이 많음. 여러분들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음.
간단한 점검. 못마땅한 사람이 있는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 “아버지의 마음을 주소서”
b. 자신들도 죄인임을 알지 못함.
사실 돌 들고 큰 소리 치지만 자신들도 죄인임. 그런데 그것을 잊고 있는 것임.
예수님이 말씀하심.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양심의 가책을 느낀 사람들. 그것을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더 역사하는 힘이 있었을 것임.
비판하지 말라. 그럴 자격이 없는 것임.
헤아리지 말라. 그럴 자격이 없는 것임.
왜냐하면 자기 자신도 따지고 보면 죄인에 불과하기 때문임.
나는 내 자신에게 탐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탐욕을 내는 목회자들을 보면 펄펄 뛰면서 비난하고 욕을 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런 비판의 소리가 내 입에서 많이 사라졌다. 왜? 나 자신 속에 더러운 탐욕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돈 남 말할 처지가 못 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단한 것들 때문에 그것을 느낀 것이 아니다. 사소한 것들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두 개만 언급하고자 한다. 추석과 관련된 것이다.
추석을 맞아 선물이 많이 들어왔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신 성경말씀대로 젊은 목사를 대접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감사를 드린다. 그런데 그것과 관련하여 일어난 창피한 일들이다.
-먼저 포도에 대한 것이다. 먼저 받은 포도. 참 맛있게 먹음. 아내가 나눠주기도 하고. 그런데 포도가 또 들어옴. 머루포도인데 포도를 워낙 좋아하는 내 입맛에 기가 막히게 잘 맞는 포도. 새벽예배 가다가 한 알 따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결국 한 송이 다 따먹고 나갈 정도로.
청년들이 찾아오기로 한 날을 앞두고 아내에게 한 말. 청년들 오면 다른 포도를 사서 주고 그 포도는 남겨두라고 함. 아내가 하는 말. 정말 좋은 것을 대접해야지 좋은 것을 안 줘요? 그런데 그 말이 하루 종일 귓가를 떠나지 않음. 저녁에 아내에게 말함. 당신 말이 맞아. 청년들 오면 꼭 머루 포도를 내놔.
결국 그렇게 하기는 했는데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함. 그게 내 수준이구나.
-다음으로 복숭아에 대한 것.
우전도사님 집에서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움.
그런데 택배가 옴. 복숭아 두 상자. 성도 중 한 분이 보낸 것임.
우전도사님. 한 상자 가져가라고. 됐다고. 가져가라고. 됐다고. 가져가라고. 그래서 가져갈 생각. 그런데 나중에 와서 말함. 목사님 못 준다고. 하나는 안 전도사님 것이라고. 순간 마음이 안 좋음. 잠시 동안이었지만.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 나는 더 풍성하게 받았으면서 겨우 그것 하나 가지고... 아~ 내게 더러운 탐욕이 있구나.
이렇게 자신을 보다 보니 남 말한 처지가 못 되는 것임.
한 면에서 감사.
자신이 죄인임을 알수록 가슴은 아프지만 다른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는 것은 중단하게 되기에.
c. 자신들이 수준 있다고 착각하고 있음.
스스로가 스스로를 탁월하다고 생각하는 것.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의 특징임.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생각함.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것임.
자기들과 비슷한 사람들과 끼리끼리 어울리는 것임.
교회 안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들. 새신자는 결코 아님.
봉사하지 못하고 기도도 잘 못하는 사람도 아님.
열심이 있고 나름대로 인정도 받고 영향력도 있는 사람. 그러면서 자기가 꽤 수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는 사람.
벗어나야 할 것임.
정죄는 마귀의 주특기. 그것을 따라 해서는 안될 것임.
3.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
1) 시험하는 줄 알고 계신 예수님.
사람의 생각을 아시기에.
나다나엘.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여기 오기 전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
대화 속에서 단 한 번도 사람의 말에 현혹되거나 속지 않으심. 마음을 아시기에.
그런데 왜 나를 시험하느냐고 묻고나 따지지 않으심.
2) 여인의 죄를 추궁하지 않으심.
여인을 향한 태도.
사람들이 다 떠나고 여인에게 하시는 말.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인의 말. 주여 없나이다.
예수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사실 예수님은 정죄하실 자격이 있음.
감히 정죄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죄가 하나도 없어야 함.
그런데 예수님은 그처럼 죄가 없으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정죄할 자격이 있는 예수님은 정죄하지 않으심.
역설. 정죄할 자격 없는 사람들은 정죄하고 정죄할 자격 없는 예수님은 정죄하지 않으시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정작 예수님은 정죄하지 않으시는데 사람들이 서로를 정죄하는 일이 종종 발생함. 우리는 그와 같은 삶의 모습을 당장 중단해야 할 것임. 나부터도 이 부분을 위해 계속 기도하고 있음.
3) 예수님의 용서의 위력
사람을 자유하게 함.
변화되게 함.
사실 오늘 본문에서 이 여인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대한 언급이 없음.
그러나 그 여인이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으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음.
요즘 들어 정말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 그래서 기도하게 되는 것.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정죄가 아니라 용서라고 하는 것. 그 용서가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일 수록 역사도 크다고 하는 것.
a. 수전노 삭개오를 변화시킨 것은? 질책이 아닌 다가섬. 오늘 네 집에 유해야 하겠다.
b. 수가성의 죄 많은 여인을 변화시킨 것은? 책임 추궁이 아님. “왜 그렇게 살았어? 앞으로는 똑바로 살아”가 아님. 그 여인을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시고 사랑으로 대하신 것임.
c. 죄 많은 여인이 머릿결로 발을 향유에 젖은 발을 씻을 때. 바리새인은 못마땅함. 예수님은 거부하지 않으시고 받아들이심. 역시 있는 모습 그대로.
1.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 하시사 날 받으옵소서
2. 큰 죄에 빠져 영죽을 날 위해 피흘렸으니 주 형상대로 빚으사 날 받으옵소서
3.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주 이름으로 구원해 날 받으옵소서
4. 내 주님 서신 발앞에 나 꿇어 엎드렸으니 그 크신 역사 이루게 날 받으옵소서
[후렴]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아멘
결론
죄와 정죄와 용서.
a. 죄. 모두가 관련.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음. 모두가 죄인.
b. 정죄. 사단의 주특기. 사람들도 정죄. 정죄할 자격이 없는데도.
c. 용서. 정작 아무 죄 없는 예수님. 정죄할 자격이 있음. 그러나 정죄하지 않으심. 용서하심.
이제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까?
a.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 이제 죄를 멀리하는 삶. 약해서 넘어지는 즉각 회개.
b. 정죄하기를 중단하는 삶. 판단과 비판 수근거림의 중담. 못마땅하게 여기는 마음이나 자세를 버리기 위한 기도. 다가가는 삶.
c. 용서를 실천하는 삶. 용서받은 자의 사명. 용서. 이젠 용서할 때 용서받음. 용서할 때 주변에서 변화의 역사를 일으키는 삶이 가능.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용서받은 우리. 이제 자유하자. 더 이상 정죄 받으며 살지 말자. 죄를 떠나자. 이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삶을 살자. 판단도 정죄도 버리고 이젠 주님을 본 받아 용서하되 주님처럼 무조건적으로 무제한적으로 용서하는 삶을 살아나가자.
'안희환 수요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시편24:1-4(2011. 8. 3 수요예배 설교) (0) | 2011.08.03 |
---|---|
벧엘의 하나님 창세기35:1-15 (0) | 2011.07.27 |
예수의 재림 징조들 마24:3-14(2011. 7. 3. 주일오전예배 설교) (0) | 2011.07.03 |
주님이 미워하시는 외식을 버리라 마23:25-36(2011. 6. 29. 금요예배 설교) (0) | 2011.06.29 |
택함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마22:1-14(2011. 6. 15. 수요예배 설교) (0) | 2011.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