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조선일보DB
연합뉴스가 7일 국내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10여 곳의 법인영업 담당자 등을 취재한 결과 연기금과 공제회 주요 인사들에 대한 접대와 향응이 전방위로 이뤄지는 등 타락 수준이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연기금이 투자 상품의 수익률이나 안정성 등을 토대로 운용되지 않고 로비 등에 좌우된다면 회원들이 노동현장에서 땀 흘려 모은 자산 가치가 크게 훼손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근원적인 대책이 서둘러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 룸살롱ㆍ성매매ㆍ골프로 형성된 ‘갑을 관계’
증권사와 자산운용사의 주요 로비대상은 연기금과 공제회의 운용팀과 리서치팀 팀장들이다. 이들이 거래 증권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로비 방식은 골프와 룸살롱 접대, 성매매 접대, 현금ㆍ상품권 제공 등 다양하다.
한 증권사의 법인영업 담당자는 “골프나 술 접대를 하는 게 일반적이다. 비용은 법인카드로 처리한다. 회사에서 눈 감아 준다는 얘기다”고 말했다.
로비 대상이 골프나 술을 싫어하면 성매매 접대를 한다는 주장도 했다.
그는 “증기탕업소 목욕탕 침대에 누우면 젊은 여성이 온몸을 씻겨주고 나서 성행위를 해준다. 1인당 비용이 20만원 안팎이다. 불법 업소이기 때문에 법인카드를 사용할 수 없어서 현금을 지불한다”고 전했다.
다른 관계자는 “단골 룸살롱에서는 법인카드가 통한다. 업태를 음식점이나 카페로 해달라고 부탁하면 알아서 처리해준다. 연기금 관계자들이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어 저녁 식사 때 반주를 하고 룸살롱을 요구하면 거절할 수 없다”고 말했다.
‘특별한 골프’ 기회를 배려하기도 한다. 자산운용사의 한 관계자는 “연기금 담당자를 만날 때 프로 골퍼를 섭외해 골프장에 가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경조사비 형식의 금품 수수는 뿌리 깊은 관행이라는 증언도 나왔다.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연기금 고위직의 아들 결혼식이 있었는데 증권사, 자산운용사 사장부터 말단 영업직원까지 모두 참석했다. 금융투자업계의 웬만한 인사가 총출동하다시피 했다. 결혼식 축의금 전달을 빙자한 현금로비를 하는 현장이었다”고 회고했다.
기금운용팀의 과장과 대리도 로비 대상이다.
한 증권사 간부는 “고급정보를 얻으려고 연기금의 과장이나 대리급 직원들과 점심이나 저녁 술자리를 한다. 내부 운용전략을 알아야 로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4∼5인용 뷔페 티켓을 선물하기도 한다. 법인카드로 비용을 지급하기가 부담스러워 월 100만원 정도의 개인 돈을 쓴다”고 털어놨다.
중소형 증권사의 일부 계약직 직원은 금품로비를 서슴지 않는다는 주장도 나왔다.
증권사 관계자는 “계약직들이 연기금 등에서 자금을 유치해 수익이 생기면 비용을 공제하고도 한 달에 수천만원씩 벌어들이는 사례가 많다. 이들은 매달 1천만원 상당의 현금이나 상품권으로 로비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명품 선물도 흔한 일이다. 이 때문에 여의도 증권가에서는 패션만 봐도 증권가 큰손인지를 금방 식별할 수 있다는 농담이 있다. 와이셔츠나 바지는 저가품인데 넥타이나 벨트, 지갑 등 액세서리는 선물로 받은 명품이어서 쉽게 눈에 띈다는 얘기다.
◇ ‘연기금 낙하산 인사’도 심각
증권사들은 연기금에서 퇴직한 사람을 임원으로 채용하기도 한다. 많은 돈을 운용해 본 경험을 활용하겠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이지만 그 이면에는 연기금에 대한 로비창구를 만들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이는 금융기관들이 금융감독원 출신 인사를 감사로 활용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연기금 운용 부문에서 일하던 비정규직 직원이 계약의 종료와 함께 증권사 임원으로 내려오곤 한다. 40대 중후반의 이들은 연봉 2억~3억원을 받으면서 연기금의 팀장급 인사를 만나 로비한다.”고 전했다.
연기금 직원들이 향응이나 금품은 아니지만 부당한 요구를 하는 사례도 있다.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고객들에게 제공할 리서치 자료를 만들고 있는데, 연기금의 운용담당자로부터 자료를 먼저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거절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증권사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항변할 수 없다. 보복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한 대형증권사의 관계자는 “감사원 발표대로 모 증권사가 연기금의 리조트 회원권 강매를 국회에 제보했다가 거래관계가 끊기는 보복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억울함을 입에 올리기조차 두려운 실정이다”고 설명했다.
◇ ‘혼탁 로비’ 배경과 해결책은
증권사ㆍ자산운용사가 로비에 나서는 것은 연기금이 영업수입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2010년 말 현재 국민연금이 거래하는 국내 증권사는 주식 34곳, 채권 66곳 등 총 100곳으로 배정금액은 189조원, 연간 수수료는 471억원이다. 다른 연기금을 포함하면 시장은 더욱 거대해진다.
한 증권사의 법인영업 부장은 “어떤 등급을 받느냐에 따라 회사 운명이 달라진다. 1등급이면 2%이상 물량을 받고 2~3등급은 1% 이상이다. 1등급이면 월 수수료 수익이 3억~4억원 수준이다. 2등급은 2억원 안팎이다. 분기별 평가를 하는데 등급이 한번 낮아지면 최대 6억원 정도 사라진다”고 말했다.
증권업계 과열 경쟁이 이런 로비의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한 증권사의 리서치센터 관계자는 “인가받은 증권사들이 늘어나면서 출혈 경쟁이 이뤄지고 있다. 신설 증권사들은 지점 영업이 제대로 안 되자 본사 영업, 법인 영업에 주력한다. 63개 증권사가 경쟁을 벌이고 있으니 온갖 로비가 난무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증권사에서 법인영업을 하는 계약직의 급여가 인센티브형이라는 점도 이런 로비를 확대시키는 요인이다.
중소형 증권사에서 법인 영업 담당자들은 회사와 수익금을 5대 5 또는 6대 4로 나누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기금과의 계약이 많을수록 챙기는 게 많으니 필사적이라고 업계 관계자가 전했다. 모든 비용을 공제하고 한 달에 수천만원씩 버는 계약직도 많다.
이런 로비ㆍ접대 문제를 해결하려면 증권사 평가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주관적 측면이 강한 정성평가 위주에서 객관적 자료를 근거로 하는 정량평가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정성 평가가 적잖기 때문이다.
제도 개선보다는 투명성 강화가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제도는 잘 돼 있지만, 운영이 문제다. 평가 방법 등을 투명하게 공개한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연기금 운용직은 업계보다 소득이 낮고 고용이 불안정하면서 도덕성을 요구받는 자리다. 차라리 연봉을 많이 주면서 청렴성을 요구하는 것이 낫다. 연기금의 운용수익률이 떨어지면 국민적인 손해이기 때문이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