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장춘아지매의 탈북일기(4) - 리수희
6.25 전쟁이 터지던 그 해 봄에 나는 양강도 산골의 어느 학교에 신입교원으로 배치되었습니다. 당시 우리학교에는 교장이 없어서 교무주임이 밤낮으로 학생들의 식사를 운반하며 학교일에 열중하다 ‘말라리아’에 걸려 앓아 눕게 되었습니다. 학교 숙직실에 사람이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보니 교무주임이 방바닥에서 뒹굴고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윗사람이란 생각이 들어 방으로 들어가 이불과 베개를 내려 바르게 눕혀주니 교무주임이 희미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혹시 누가 이 광경을 볼 까봐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 나왔습니다. 그리고 한 여학생에게 교무주임에게 찬물수건으로 머리를 식혀드리라고 했습니다.
이 일이 학교내에 소문이 퍼져 주위 교원들이 교무주임과 나를 중매하려고 달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군사학 선생은 빈 교실로 나를 부르더니 백지 한 장과 연필 하나를 책상 위에 놓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처녀 때는 수줍어서 말을 못 할 수도 있으니 교무주임이 마음에 들면 동그라미를 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승표(엑스표)를 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나는 큼직한 승표(엑스표)를 똑바로 치고는 책상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하루는 조용한 기회가 있어서 교무주임을 찾아가 우선 내 자신은 월남자의 딸이며 아직은 어린 나이기 때문에 부모도 없이 출가할 수 없음을 이해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부터 교무주임은 정신이 이상해져서 대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미친 사람처럼 학교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괴성을 지르는 바람에 남학생들이 달려들어 밧줄로 묶어서 사택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다음날부터 나는 학교와 온 마을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여자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이렇게 아까운 사람을 희생시키는가 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며칠 후 군(君)정치보위부까지 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독방에 가두어 놓고 48시간 동안 재우지도 않으면서 심문했습니다. 때리지는 않았으나 매질 못지않게 고통스러웠습니다. 별의별 질문을 다 했습니다. 산보는 몇 번이나 했는가? 교무주임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편지는 몇 번이나 했는가?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악이 오르고 독이 올랐습니다. 모든 것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는 교무주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내 모든 것을 인정하겠으니 그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종이에 썼습니다. 그제서야 보위부에서 풀려 났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발걸음 마다 억울하고 분통터져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또 울었습니다.
교무주임은 보위부에 불려간 자리에서 “리선생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고, 그저 나 혼자 짝사랑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의 누명은 벗겨졌습니다. 하지만 이후로 교무주임은 완전히 미쳐서 밤이고 낮이고 맨발로 온 마을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 마저 나에게 “리선생님, 김 미치광이가 찾아왔습니다!”하며 놀려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대형사고가 터졌습니다. 어느 야심한 밤에 뒷문 변소에 갔던 우리 언니가 사람 살리라며 소리를 질러 온 마을 사람들을 다 깨우게 된 것입니다. 교무주임은 우리 집 모퉁이에 칼을 들고 숨어 있다가 내가 나오면 나도 죽이고 저도 죽으려고 하다가 언니를 나로 잘못 알고 칼부림을 했던 것입니다. 언니는 다행히 손에 상처만 입고 무사했습니다.
교무주임은 평양에서 친척들이 올라와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훗날 교무주임은 나에게 미안하다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나는 편지를 읽자마자 아궁이 불 속에 던져 버렸습니다.
재회
교무주임 소동이 잠잠해지자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모든 여자 교원들은 인민군대에 나가는 청년들에 대한 환송행사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만 교무주임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너무나 당황해서 교무주임이 내 손을 잡는 것도 모른 채 멍청히 서 있었습니다. 그는 집결소로 뛰어가면서 고래고래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잘 있으라 말했습니다. 옆에 있던 마을 사람들은 저 선생이 이 여자 때문에 미치광이가 됐다가 병을 다 고친 모양이라며 소근거렸습니다. 나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 숨고 싶었습니다. 환송식에 나간 것을 가슴을 치며 후회했습니다.
낙동강까지 진격했던 인민군대가 패배를 거듭하면서 물러서자 학교도 문을 닫게 되었고 나는 고중학생들로 구성된 선전대를 인솔하게 되었습니다. 함경북도 어느 마을에서 어느 부대를 마주치게 되었는데 우리를 보더니 위문공연을 보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우리 선전대의 임무이기에 먼저 합창으로 공연을 시작했는데 이 자리에서 또 교무주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몸도 많이 좋아 지고 소대장이 되어서 옷차림도 군관복이었습니다. 사람이 몰래 도망치다 들킨 것처럼 민망스럽고 쑥스럽고 부끄러운 일은 없습니다. 나는 그저 가슴만 두근거리고 얼굴만 화끈화끈 달아올라 빨개진 얼굴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 전선으로 나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편지하면 꼭 회답해달라는 것, 자기를 꼭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말이 많았습니다. 내 손을 붙잡더니 꼭 기다려 달라고 재차 다짐을 했습니다.
나는 “당신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아는가?”라고 반박하며 매정하게 그를 외면했습니다. 둘의 말다툼에 주위의 군인들이 곁눈질로 우리를 훔쳐보았습니다.
“소대장 동지, 행군준비 끝났습니다!”
이 말에 체념한 듯이 그는 군화를 무겁게 끌며 머리를 푹 숙이고 벌판 길을 등지고 맥없이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가 개미 알만 해질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며 원망과 부끄러움에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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