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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아지매의 탈북일기 - 리수희

안희환2 2009. 10. 15. 08:59

장춘아지매의 탈북일기 - 리수희

내 마음에 흐르는 눈물의 강
젊은 여성은 팔려가고, 어린이는 굶고

- 자강도 출생(1931)
- 남편 사망(1970)
- 외아들과 함께 탈북, 아들은 행방불명(1996)
- 현재 선교단체의 도움으로 중국 장춘 거주

저의 글은 대중들 앞에 내놓을 만한 것이 못 됩니다. 한 여인이 지나온 인생길의 한 부분에 불과할 뿐 교양가치도 없고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될 만한 내용도 없습니다. 그저 지난날 내 자신이 겪어 온 인생길을 다시 되새겨 보는 회상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저의 이야기를 통해 북조선의 현실이 있는 그대로 알려지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부끄러운 글을 남조선 대중들 앞에 내놓습니다.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넌 후 삼 년 째 되던 해에 중국의 000이란 마을에서 살던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너 어디가니?”
“나 북조선 사람 보러가!”

그날은 일요일이어서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나는 ‘북조선’이란 말에 흠칫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한참이나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앞선 여인들은 7~8명쯤 되었는데 손에 무엇인가 음식을 조금씩 싸들고 있었고 그 뒤에는 4~5명이 줄을 지어 갔습니다.

이곳은 중국땅입니다. 이곳의 조선족들은 북조선보다 특수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민족에 대한 애착심과 동포애적 정신이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날도 조선족 집에 잔치가 있어서 모였다가 북한 여자가 중국 사람에게 팔려와서 산다는 말을 듣고 모두들 그집으로 찾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산설고 물설은 이국땅에 와서 말도 통하지 않는 생활에 고생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여성은 임신한 몸에 결핵까지 걸렸다고 했습니다.

그 여성이 하는 말이 자신은 중국 돈 4천원(한화 약 80만원)에 팔려왔고 같이 탈북한 동무 셋은 처음에는 식당으로 데리고 간다고 했으나, 한 여자는 중국 돈 8천원에 절름발이 남자에게 팔려가고 두 여자는 5천원씩 또 다른 남자의 집으로 팔려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북조선 사람’이라는 말만 들어도 불쌍하고 불쌍합니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으며 얼마나 굶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묵묵히 집까지 왔습니다. 가지가지 피눈물 나는 나의 과거가 떠올랐습니다. 창문가로 먼 산을 바라보면서 좀처럼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김정일씨는 지금 나라의 장군으로서 조금이라도 자기 백성들의 희생을 가슴 아파해본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곳의 평범한 여인들도 자기 민족이라며 북조선 사람들을 동정하는데, 과연 김정일씨가 조선의 역사에서 빚어 놓은 비극과 상처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지금 북조선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는 천진난만한 어린애들입니다.

걸음마도 떼지 못하는 어린 것들이 “아버지 대원수님 어디 계셔요?” 하면서 기저귀를 차고 총총 걸음으로 고사리 같은 두손을 높이 들고 바람벽에 달아 놓은 김일성씨, 김정일씨 사진을 쳐다보는데, 그 어린 것들이 오늘날에 와서는 뼈에 가죽만 씌워놓은 모양으로 굶어 죽어갔습니다.

어린 것들이 '꽃제비'란 칭호를 받고 방랑생활을 하고 엄동설한에 옷도 변변히 못입고 맨발에 역전 대합실마다 여행객에게 얻어 먹기 위해서 줄을 섭니다. 행여나 떨어진 음식이라도 주워먹고 밥알이 한 알이라도 떨어지면 닭이 모이 쫒듯이 주워 먹습니다.

중국에 나오기 전에 마지막 기차를 탈 때 일이었습니다.

저는 역전 대합실에 웅크리고 있던 오누이를 불러 먹다 남은 떡 조각을 쥐어 줬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애들아, 아무쪼록 죽지 말고 살아서 먼 훗날에 이때의 고생을 이야기하면서 행복하게 살아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오누이는 내말을 알아듣기나 했는지 연신 “고맙습니다”며 수 십 번도 더 허리를 구부렸습니다.

두만강을 건너와 고개를 들어 북조선 땅을 쳐다봤을 때, 내 가슴속에 두만강보다 더 큰 눈물의 강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탁아소에도 갈 수 없었던 첫 손자

두만강을 함께 건너와 중국에서 떠돌다가 하나뿐인 아들과 헤어진 10년이 가까워 옵니다. 어디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를 모르는 아들의 얼굴만 생각하면 가슴이 콱 막혀 울다가 기도하다가 또 웁니다. 북조선에서 홀로 두 손자를 키우고 있는 우리 며느리를 생각하면 가슴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 같습니다. 내가 홀 여인의 몸으로 자식을 키워봤기 때문에 우리 며느리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있을까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승인 없이 손자를 보러 간 '죄'

86년에 며느리가 첫 손자를 낳았을 때는 어찌나 기쁘고 반갑던지 하루 종일 미친 사람처럼 웃고 다녔습니다. 당시에 아들네는 여섯 정거장 떨어진 곳에 살았는데 “아들을 낳았다”고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빨리 아들네로 가야 하겠는데 나 같은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평생 ‘월남가족의 딸’이라는 출신성분이 뒤따라 다녔기 때문에 증명서를 해 줄리 만무했습니다.

며느리가 아이를 낳으면 먹이려고 안 먹고 매달 조금씩 모아둔 입쌀이 6kg정도 됐습니다. 2kg은 애기 옷과 포단과 미역으로 바꾸고 4kg의 쌀까지 한 봇짐을 꾸리고 작업반 세포비서를 찾아갔습니다. 역시나 세포비서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손자 얼굴이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을 짜냈습니다. 밤일을 하고 교대를 바꿀 때면 옹근 하루 정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먼 길을 새벽부터 걷기 시작해서 어찌나 빨리 걸었는지 오전에 도착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할머니가 되었다는 생각에 참 기뻤습니다. 죽은 나무에 꽃이 피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만이라도 손자와 함께 있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들네 집에 두 시간쯤 있다가 인차 또 떠나왔습니다.

공장에 돌아오니 이것이 또 ‘죄’가 되었습니다. 공장의 직맹(직업총동맹) 책임자 여자가 나를 데리러 왔습니다. 회의실에 가라고 하기에 올라갔습니다. 이상한 회의라는 것을 감지했으나 나는 알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저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는 판에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안전원과 보위지도원도 그 자리에 참가했습니다. 사람들 잡아가는 회의였습니다. 듣자하니 공장에서 물건을 훔친 놈, 경사스러운 김일성 장군님 생신날 술 먹고 싸운 놈, 나는 증명서 없이 타군(他君)에 다녀 왔다는 것이 죄였습니다.

모두 이름을 불러서 앞에 세웠습니다. 군중들 가운데서 “저 어머니는 걸어서 갔다 왔는데 그게 무슨 죄람?”하는 말이 나왔습니다. 군중들 앞에서 잘못했다고 자아비판을 하고 다시는 승인 없이 돌아다니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손자는 탁아소에 받아줄 수 없다"

몇 해가 흘러 며느리가 둘째 손녀를 낳았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나는 원래 아들 하나만 키우며 살아와서 본래 딸이 그리웠습니다. 며느리는 손녀를 낳고 몸조리를 잘 못해서 자리에 일어나지 못한다고 소식이 왔습니다. 하는 수 없이 큰 손자를 내가 키우지 않으면 안되는 형국이었습니다.

내가 공장 탁아소에 맡길 생각으로 손자를 데려왔습니다. 손자를 업고 탁아소 소장에게 탁아소 수속을 하려고 하니 승인이 안 떨어졌습니다. 탁아소 규정은 직접 노동 여성들이 낳은 자식들만 맡기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따졌습니다. “그렇다면 00작업반장은 왜 손녀를 받아 주는가?” 미운 풀 죽이려다 고운 풀도 죽이는 판이었습니다. 00작업반장도 손주를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말할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손자를 데리고 일을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돈이 없고 식량 배급도 끊기는 판이니 참 난감했습니다. 아침에 손자를 업고 가서 작업장에 놓고 일을 했습니다. 그때 나는 건설 작업을 했기 때문에 아이가 할머니 일하는데 지장이 되는 것은 없었습니다. 손주는 혼자서 수걱수걱 참 잘 놀았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때 우리 손자가 정말 고맙습니다. 말을 잘 못해도 어린 것이 눈치를 아는지 할머니가 놀이감도 주워다 주고 노는 장소에 깔개도 깔아주고 어디 가지 말고 꼭 여기서 놀라고 하면 머리를 끄덕끄덕 하면서 혼자서 참 잘 놀았습니다. 이렇게 며칠은 마음 놓고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내 생활은 참 즐거웠습니다. 건설작업은 힘겨웠으나 하루 일이 끝나면 저녘에는 손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