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 위에 흐느적거리는 손가락 / 안희환
자판 위를 달리는 손가락은 이전처럼 빠르지도 힘이 있지도 못합니다. 흐느적거리듯이, 춤이라도 추는 듯이 힘겹게 미끄러지고 있을 뿐입니다. 머리는 몽롱하고 기침은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몸은 자꾸만 옆으로 기우뚱거립니다. 숨을 쉴 때마다 쇳소리가 들려옵니다.
진즉에 병원에 갔어야 했습니다. 감기는 초기에 잡으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었는데... 그러나 어릴 때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졌던 나는 병원 가는 것이 징글맞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웬만큼 아프지 않으면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이번도 그랬습니다. 잠이 모자라기는 하지는 물 많이 마시고 몸을 따듯하게 해주면 감기가 나으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원 일입니까? 어제는 밤새도록 기침을 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머리를 쇠망치로 두둘겨 맞은 듯이 아프기만 합니다. 그런 몸을 끌고 새벽기도를 갔다 왔는데 무슨 정신으로 갔다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 의무이기에 죽을 힘을 다해 일어났던 것입니다.
오전 내내 누워있다가 겨우 일어나 밥을 먹은 후(먹어야 산다 ^0^) 내가 정 아플 때 단골로 가던 병원에 갔습니다. 1시 20분경이면 점심시간이 끝났으려니 하고 갔는데 간호원이 하는 말이 점심시간이 두 시까지 랍니다. 에휴~~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누워 있다가 병원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엔 사람들이 줄서고 있었습니다. 흑흑.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지루한 시간을 인내하다가 드디어 진찰을 하는데 내 몸에 청진기를 댄 의사가 놀랍니다. 상태가 많이 안 좋다는 것입니다. 겨우 감기라고 생각했는데 그 감기가 조금 심각한 모양이었습니다. 오래 갈 것이라고 하더군요. 일단 3일치 약을 지어줄 테니 3일 후에 반드시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처방전을 가지고 약국에 가니 약사가 또 말합니다. “많이 안 좋으신가 봐요”. 처방전에 적힌 약 내용을 보고 하는 소리입니다. “예”라고 대답한 후 의자에 앉아 기다리니 약사 분이 약을 가지고 나오십니다. 보험으로 했는데도 평소 감기약보다 4배가 더 나왔습니다. 비싼 약이 많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약을 짓고 집에 돌아와 쌍화탕에 약을 먹는 후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업무를 마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아파도 새벽에 교회에 가서 기도하려고 하듯이 아무리 힘들어도 하루에 한편 이상의 글을 쓰려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나무랄 사람은 없습니다. 또 글을 쓴다고 해서 큰 상을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루에 한편 이상의 글을 쓰는 것은 나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하다고 책망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내 경험상 힘들다고 할 것을 안하는 경우엔 힘이 들지 않아도 할 일을 안하게 되는 일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렵고 힘들 때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면 편안할 때도 자신과의 약속을 철석같이 지키게 되는 것이고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좋은 반응을 보일지는 알지 못합니다. 때로는 좋은 반응이 아닌 비난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주로 정치와 연관된 글을 쓸 때 생기는 일입니다. 하지만 비난을 하던 칭찬을 하던 나는 내 속에 숨어 있는 생각을 끄집어내어 하나의 글이 되게 합니다. 그렇게 나온 녀석은 더 이상 내 통제 아래 있기를 거절하고 독립된 자아를 가지고 종횡무진하곤 합니다.
사실 지금 이렇게 쓰는 글은 특정한 주제를 가진 글도 아니고 어떤 이슈를 다루는 글도 아니고 문학적인 목적을 고려하고 쓰는 글도 아닙니다. 어쩌면 글 한편을 써야 한다는 막중한 사명감(?)에 억지로 밀어낸 자아의 배설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처음보다 편안해지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느끼며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또 한편의 글이 나왔지만 자랑할 만한 글을 못될 테니 아픈 사람의 넋누리라 여기며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추운 날 따듯한 곳에 있어도 추위를 느끼는 자신을 보며 이런 날 밖에서 생활하는 노숙자들을 떠올려보기도 합니다. 방 안에 들이지도 못하는 속 좁은 내가 이런 말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도 같이 들고요.
모든 님들 감기조심하세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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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날 글쓰기/ 안희환
흐느적거리는 손가락
술잔에 담갔던
기억의 파편조차 없는데
흔들거리며 나불대는
주정뱅이 같아
어제는 막대기를 쥐고
못된 개를 향해
힘껏 휘둘렀는데
자판 하나 누르기도
버거운 시간
흘러가는 것은
물이 아닌 머릿속의
생각들, 끄집어내도
모양이 뒤죽박죽
지친 손은 내버려두는데
잠시 정전이다
깜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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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사진은 이용복님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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