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들이여, 익명성의 가면을 벗고 커밍아웃하라
오랫동안 교단의 보이지 않는 권력이 존재해 있었던 것 같다. 가면 왕이 뒤에서 조정하는 대로 움직였던 교단이 참으로 가련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차에 글을 쓰기로 결심을 하였다.
가면왕은 익명성 뒤에 숨어 온갖 밤의 논리로 교단을 호도하고 선량한 성결인들을 옭아매고 있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도대체 저 가면 뒤에 숨겨진 인물은 누구일까? 그러다가 어느 시점,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낼 즈음, 그 가면을 벗어 민낯이 드러날 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의 뇌리 속에는 마왕 이미지가 있었는데, 그 민낯을 대하는 순간 <설마 저분이>라는 실망과 인간의 페르소나에 대한 철저한 배신감 같은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목사들이여! 가면을 벗어라.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마치 거울 앞에 서 있는 모습처럼 자신의 이름, 그 민낯으로, 그 책임성 있는 인격으로 글을 써라.
그리고 목사 장로들이여! 그 민낯으로 쓰는 글의 진정성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또한, 유령의 글에, 마왕의 글에 미치지 말라
익명성의 심리적 기저가 궁금하다. 익명성의 영적 상태가 궁금하다. 살리는 문화, 생명문화공동체인 교회와 그 교회의 총합인 교단을 마왕의 가면을 쓰고 죽음의 문화로 몰고 가는 익명성을 벗어 던져라.
왜 목사가 이름 석자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고 가면 쓰고 글을 쓰는가?
그 가면을 벗어야 할 시점이 정치적 입문이라고 할 때 그 가면을 벗은 민낯은 목사의 얼굴일까? 그동안 썼던 글이 그의 족쇄가 되지는 않을까? 아니면 글 쓴대로 처신할까?
성결의 가족들이여! 익명성의 글 자체가 떳떳하지 못하다. 중세시대의 객담이라는 것이 있었다. 익명성이다. 타락한 종교와 권력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글들을 많이 썼었다. 그럼 왜 그들은 익명이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맞아 죽을까봐서 그랬다.
그런데 기득권에 붙어 있으면서 ‘익명성’이라나?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왜곡된 지도권에 대해 저항하는 사람이 익명성에 기댄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기득권의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 익명성에 기댄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헐시 트래비스(Hirsch Travis)는 익명성에 대하여 “인간관계에서 대체적으로 익명적이고 피상적인 것이 됨으로서 사회통제에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비행을 용이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즉 군중심리가 증가되고 이 군중심리는 범죄를 용이하게 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익명성은 ‘겸열받지 않은 정체성’을 가능케 한다. 이것은 해방일 수 있고 방종일 수 있다. “이 익명은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침해를 입힐 수 있는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익명은 종종 비윤리적 행위나 범죄를 저지르도록 유혹하는 힘이라는 것이 분명하다”고 한국산업사회학회원이 발행한 <사회학>(서울: 한울 아카데미,2004)에서 진단하고 있다.
신학적 특성으로 이해한다면 이런 익명성에 기대는 것은 마귀성에 부합한 행동이다. 익명으로 어떤 악의목적과 논리를 따라서 행동하는 것은 이미 <집단화된 악의 인격성의 발현>이기에 이것은 사회법정에서도 규명하기 어려운 난제이다. 특히 종교집단에서 일어나는 헤게모니 싸움에 익명의 논리가 승리로 유도되었을 때 그는 영웅화된 마귀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귀는 다양한 아이디(ID)로 탈바꿈하여 인간의 영혼을 도적질하려고 변장하여 달려들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필자는 이렇게밖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의 기득권이 떳떳하지 못하다. 정당하지 못하다. 자기가 생각해도 기독교인답지도, 성결교회의 지도자 같지도 않음>에 내면적으로 동의가 되지만 지금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그 영화가 너무 좋고, 그 기득권에 얽혀져 있는 다양한 먹거리를 물었는데, 그것을 놓지 못하겠다는 양가감정의 표현이 아닐까? 이 정도면 그래도 순진한 진단이라고 생각은 한다.
엘리야가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거리려느냐”고 질타할 때 그 질타의 대상들이 여호와신앙과 바알신앙 사이에 양다리 걸친 비굴한 백성이었다. 여호와신앙은 있는데도 바알을 끊지 못하는 것은 아합의 정권하에서 소외될까봐 , 아합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어먹고 살려는 심리적 표현이었다. 지금 익명성에 기대어 글을 쓰는 심리가 바로 그런 심리라는 것이다.
목사가 진리편에 서야지, 익명성에 기대는 비굴함에 서서야 되겠는가?
커밍아웃해야 한다. 목사들이여 가면을 벗어던지고 나오라. 동성애자들은 커밍아웃하는데 목사가 그들보다도 못하지 않는가? 떳떳한 목사 아무개, 자랑스런 목사 아무개, 자랑스러운 성결교회목사 아무개, 인품이 있는 목사 아무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아무개 목사로 커밍아웃해라! 하나님이 주신 이름이 부끄러운가? 아니면 내가하고 있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라서 그런가? 목사들이 다락방에 숨어 음침한 일에 몰두하지 말고 커밍아웃해야 한다. 그래야 비굴하지 않은, 떳떳하고 품격 있고, 책임성 있는 목사공동체가 되는 것이지, 마치 인터넷상에서 온갖 음해와 더러움으로 교회를 조롱하는 안티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익명성과 같은 비윤리성으로 교단을 농단하는 일은 그만해야 한다.
커밍아웃해야 당신들의 인격과 글이 품위가 있다. 왜 커밍아웃을 못하는가? 돌에 맞을까봐?
또한 익명성의 글을 따라 행동하는 분들, 그런 글의 지침을 따라 행동하는 분들이 교단의 요직에 앉는다면 결국 아바타 내지는 괴뢰정권에 다름 아니지 않는가? 하기사 사용하지 말자고 결의했던 사이트에 버젓이 들어가 익명에 잇대어 글을 올리던 윤리라면 말해 뭣하겠는가?
내 이름 석자면 족하지 않은가? 황공하옵게도 거기에 목사라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명칭까지 붙여 주셨는데, 거기에 성결이라는 말을 앞에 붙여 주어서 <성결교회목사>라는 아름답고 명예로운 이름을 붙여주셨는데......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신영춘 목사
(천광교회
역사편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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