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들을 사정없이 때리고도 사과하지 않았었는데/안희환목사(기독교 싱크탱크 대표)
지역을 돌며 기도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건물 안쪽에 서서 비가 멈추기를 기다렸는데 계속 쏟아졌다. 하는 수없이 효빈(큰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우산을 가져오라고 했다. 효빈이는 올 시간이 다 된 것 같은데 오지 않았다. 비가 봄 약해진 것 같아 집 쪽으로 걸어가는데 저 쪽에서 효빈이가 오고 있었다. 문제는 그 걸음걸이였다. 아빠가 기다리고 있는데 내 눈에 효빈이의 걸음이 너무나 느긋했던 것이다.
화가 난 나는 효빈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빠가 우산 가져오라고 했으면 빨리 와야 할 것 아냐. 세월아 네월아 걸음걸이가 그게 뭐야?” 그리고는 효빈이가 가져온 우산을 받지도 않은 채 비를 맞으며 앞장서서 걸어가 버렸다. 효빈이는 우산 하나를 쓰고 다른 우산 하나를 든 채 민망한 표정으로 내 뒤를 따라왔다. 집에서 한 마디 더 했다. “앞으로 아빠가 부르면 잽싸게 와.” “예.”
가만히 뒤돌아보니 내가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따라오던 효빈이가 얼마나 무안했을까 하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그 마음을 글로 표현했다.
비 오는 날
산책을 나갔는데 비가 온다.
빵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다가
아들에게 우산을 가져오라 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아
비를 맞으며 집으로 가는데
저쪽에서 아들이 걸어오고 있다.
천천히 오고 있는 모습을 보자
부글부글 끓어오른 내 마음.
달려오지 않는다며 소리 질렀다.
전해주려는 우산을 거부하고
비를 맞으며 앞서 걸어갔다.
아빠 따라 침묵 속에 걷는 아들.
우산 받아쓰고 나란히 걸을 걸
뒤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이미 몸도 마음도 젖어버렸다.
다음 날 아침 효빈이가 학교로 출발한 후에도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아서 아내에게 말했더니 휴대폰을 놓고 갔다고 한다. 아내는 내게 왜 전화를 하냐고 물었고 나는 별 이유 없다고 대답했다. 효빈이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효빈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효빈이는 씨익 웃고 만다. 저녁에 아내에게 사정 이야기를 다 해주었다. 아내는 효빈이가 민망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고 했다. 그리고 날 향해서는 “아빠가 많이 변했네요”라고 말했다.
아내가 그렇게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효빈이가 아직 어릴 때 오줌까지 참으며 텔레비전을 보다가 바지에 오줌을 싼 적이 있다. 나는 그때 효빈이의 등짝을 세게 때려주었다. 효빈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잘못 해놓고 운다고 또 때렸다. 그때의 내겐 미안한 마음이 없었다. 잘못 했으니 맞아도 당연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효빈이에게 상처가 되었던 모양이다. 가끔 효빈이는 그 때 일을 언급하며 아빠가 자기를 때렸다는 말을 했다. 그러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내게 아내가 말했다. “효빈이에게 정식으로 사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 생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잘못하면 맞을 수도 있는 것이지 그걸로 사과를 왜 하냐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조심스럽지만 지혜롭게 내게 사과할 것을 권했고 결국 나는 고집을 굽혀 효빈이에게 정식으로 사과했다.
그 후로 효빈이의 입에서 아빠가 자기를 때렸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더 놀란 것은 몇 년 지난 후 그 이야기를 끄집어냈을 때 나에게 맞았다는 기억 자체가 없었다. 상처가 되었던 그 일이 아물었고 기억 속에서 조차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로서는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사과 한 마디가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사과하는 것이 자존심 상할 일도 아니고 체면을 구길 일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내의 말대로 이전의 나에 비해서 많이 변하기는 한 것 같다. 심하게 때리고도 왜 사과 하냐고 한참을 버티던 내가 아내의 설득 한 마디도 없었고 효빈이의 반복적인 언급도 없었는데 알아서 사과를 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명색이 아버지인데 자식에게 습관적으로 사과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내 잘못이 분명하다면 아들에게든지 아니면 그 누구에게든지 기꺼이 사과할 것이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실패자가 되는 일도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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