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 히브리서4:14-16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에겐 무엇이 있는가? 우리에겐 누가 있는가? 이것은 참 중요한 내용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엇이 있는냐 혹은 누가 있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기도 하고 열등감을 느끼기도 한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여러분에겐 누가 있는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고 할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돈일 것이다. 이 돈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는가? 돈 때문에 돈 사람은 또 얼나나 많이 있는가? 돈 때문에 정말 가치있는 일을 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돈이라는 것이 있고 없음에 따라서 사람들의 삶은 많이 달라지며, 또 돈이 많은 중에도 그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사람됨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돈과 관련하여 잊고 있는 것이 있다. 돈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돈은 이용의 대상이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돈은 필요한 것이지만 의지할 대상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약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돈을 목적으로 둔다면, 돈을 사랑의 대상으로 여긴다면, 돈을 의지하고 산다면 그는 자신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분명히 고백하는 자는 그렇게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7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장). 마음에 안드는 내용일 수 있겠지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이 말씀에도 아멘해야 할 것이다.
당신에겐 누가 있냐고 물을 때 사람들은 흔히 어떤 힘있는 사람을 의식한다. 소위 빽이라고 불리는 사람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빽이라는 것이 막강한 힘으로 존재한다. 울고 웃고가 이 빽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대학에서 교수를 임용할 때 총장이나 이사장을 빽으로 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부모가 사회에서 얼마만한 지위와 부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자녀가 얼마나 큰 대접을 받느냐가 달라지는지 우리는 잘 보고 있다. 심지어 군대를 가는 것조차도 빽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권력을 가진 자는 교묘하게 힘을 동원하여 자신의 아들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도록 조치하고 그런 힘이 없는 사람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군대를 보내는 것이다. 사실 군대 가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치더라도 불공평한 현실이 군대 가는 것에 대해 더욱 환멸을 느끼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빽을 이용하여 잘되는 것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드는가? 분노인가? 많은 사람들이 분노를 느낄 것이다. 그런데 그 분노 속에는 질투의 감정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열받지만 부럽기도 한 것이다. 나도 그런 빽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생각을 쫓아내야 한다. 사람을 의지하고 살아서는 안되는 존재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다.
“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장)
물론 이 말이 탐탁지 않게 들릴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목회자 세계에서조차도 빽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그래서 일부 머리 잘 굴리는 목사들은 줄을 잘 서려고 부단히 노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할 것이 있다. 줄을 잘 서서 큰 교회 부임해서 큰소리치는 위치를 얻는다 해도 그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산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뼈저리게 느낄 때가 올 것이다.
한 사람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다. 청나라 최 전성기인 건륭 황제 때 황제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국정을 마음껏 요리한 화신이라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무려 20년 동안 마음껏 권력을 휘두르면서 미친듯이 뇌물을 받아 먹고 온갖 부정한 짓을 다하여 무려 은화 8억 냥에 해당하는 재산을 지니고 있었다. 그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청나라의 1년 예산 총액이 7,000만 냥에 불과했고 베르사이유 궁전을 지은 프랑스의 절대 군주 태양 왕 루이 14세가 지녔던 사유재산의 총액이 중국돈으로 환산하여 2,000만 냥에 불과했다는 사정을 안다면 화신이 지니고 있었다는 재산의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무엇이 있었는가? 헤아릴 수 없는 돈이다. 그에게는 누가 있었는가? 청나라 최고의 권력자인 건륭황제이다. 이렇게 대단한 권력과 돈을 한 손에 거머쥔 화신이란 사람, 그는 도대체 얼마나 행복했으며 그의 후손은 또 얼마나 엄청나 부귀영화를 누렸을까. 1799년, 화신이 하나님처럼 믿고 의지하던 건륭제가 89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미처 10일이 지나지 않아서 화신은 뭇 사람들에 의하여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그때 그의 죄목은 무려 20가지나 되었다. 이런 사람이 어찌 살기를 바라겠는가. 결국 그는 사형을 당했다. 아울러 평소에 금전의 출납은 반드시 자기의 손으로 하고 수많은 처첩들에게 지급되는 생활비마저 아까워서 그들로 하여금 매일 죽을 먹고살도록 하면서까지 모았던 그 엄청난 재산이 한푼도 남지 않고 전부 국고에 환수되고 말았다. 하긴 몇 푼 남겨두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사용할 후손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았지만 말이다. 모두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화신의 자신의 종말의 때가 가까이 오는 것도 모르고 권력과 부만 추구하다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여러분의 눈에 화신은 지혜로운 사람으로 보이는가? 아니면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는가? 어리석은 사람 아닌가?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 화신처럼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것들에 목을 매고 있다. 정말 있어야 할 것이 없어서 심판 날에 지옥에 떨어질 텐데도 없어도 되는 것을 얻기 위해 인생을 죽어라고 혹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심각한 문제는 가장 소중한 것이 자신에게 있는지도 모르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망각의 물을 마신 자처럼 자신에게 있는 보물일 생각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능력이요 축복인지도 모르고 땅에 묻혀두고 있는 것이다.
원하기는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에게 있는 값진 보물을 발견하시길 축원한다.
1.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
1) 우리에게 있는 예수
오늘 본문으로 돌아오자.
“14전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15전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이 말씀에 보면 우리에게 무엇이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에게 누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누가 있는가? 대제사장이다. 대제사장이라니 그게 누구인가? 예수님이시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여러분에겐 누가 있는지를 기억하시라.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있다고 할 때 그 의미 속에는 누가 있느냐와 더불어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라는 질문에도 답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예수님 안에는 그 무엇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쓰는 편지에서 이렇기 말씀한다. “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 2장). 예수님이 있으면 그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도 따라오는 것이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게 있는 예수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인지를 잊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 그래서 무능력한 삶을 살고 있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것.
“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행 3장)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베드로만 가지고 있는가? 나와 여러분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모든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 예수님이 늘 함께 하신다. 나와 여러분에게 있는 예수님이신 것이다. 이것은 기억하고 사시라. 그것이 우리에게 놀라운 능력이 될 것이다.
2) 왜 대제사장이라고 하는가?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의문이 한가 지 생긴다. 왜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표현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제사장의 역할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대제사장의 역할.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서 백성의 죄를 사함.
예수께서 죄를 사하심
-대제사장의 죽음은 속죄의 힘이 있음
“22 원한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23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만한 돌을 던져서 죽였다 하자 이는 원한도 없고 해하려한 것도 아닌즉 24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보수하는 자 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 25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 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이니라 26 그러나 살인자가 어느 때든지 그 피하였던 도피성 지경 밖에 나갔다 하자 27 피를 보수하는 자가 도피성 지경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찌라도 위하여 피 흘린 죄가 없나니 28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유하였을 것임이라 대제사장의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의 산업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민 35장)
예수의 죽음엔 속죄의 힘이 있음.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장)
예수 말고 죄사함 받을 길은 없음.
3) 왜 큰 대세자장이라 했을까?
일반 대제사장들과의 비교.
히브리서에서 매우 중요하게 강조하여 다룸.
-일반 대제사장은 자신의 죄를 속죄-예수님은 아님
-갈리기 때문에-예수님은 영원
-양이나 소로-예수님의 자신의 몸으로
-아론의 혈통-예수님은 유다지파(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은 대제사장)
이런 차이들로 인해서 큰 대제사장이라고 언급함.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특징이 나옴. 그것은 신성과 인성으로 구분이 됨. 이 역시 일반의 대제사장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임. 대제사장이 존귀한 직책이기는 하지만 신성은 가지고 있지 않기에. 또 대제사장이 인성은 가지고 있지만 이 점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가진 인성의 범위를 넘어서기에...
2. 신성을 가지신 대제사장
1) 승천하신 자
부활 이후에 승천.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장)
승천은 기독교의 신비 중에 하나임. 성육신, 부활과 더불어. 이것은 물론 이성으로 납득이 가지 않음. 그러나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기억하면 이해할 수 있음. 예수는 하나님이심. 성경은 말씀함.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장)
창조하신 하나님이 창조된 세계 안에 갇히는 것은 말이 안 됨. 사람은 그럴 수 있음. 자신이 만든 문안에 갇힐 수 있는 것임.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음.
2)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과 같은 의미이지만 조금 다른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이 나온다.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현이다.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 1장)
-사람들의 고백.
나다나엘의 고백.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 1장)
베드로의 고백.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장)
제자들의 고백.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3)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 14장)
마르다의 고백.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요 11장)
백부장의 고백.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 27장)
귀신들의 고백
더러운 귀신들. “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막 3장)
거라사의 광인.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막 5장)
예수님은 이 표현을 쓰셨다가 유대인들에게 곤욕을 치르신다. 죽일 이유가 됨. 신성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6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7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 19장)
3)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고백을 버리지 말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놓치지 말라는 것임. 그 당시에도 그와 같은 현상.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현상이 많이 일어남. 예수님을 단순한 선생이나 혁명가 종교의 창시자로 만들려고 함. 사단의 술책. 그러나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함. 예수님의 신성을 놓치면 다 잃어버리는 것임.
3. 인성을 가지신 대제사장
1)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는 자
동정이라는 측면. 부정의 부정을 사용하여 아주 강하게 강조함.
우리의 연약함. 너무나 뼈저린 것 아닌가?
2)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
1차적으로-예수님의 시험.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장)
세상에 살면서 겪은 어려움.
제자들로 인해서-
가족들로 인해서-십자가 이에서 모친 걱정
육신적인 고통-
3) 죄는 없으시니라
고민되는 것. 죄는 없으시니라.
이것이 신성이라고 여겨지는가? 아님. 인성으로 보는 것이 옳음.
타락 이전의 아담을 기억하면 됨.
3. 대제사장이 있기에 가능한 것.
이런 분이 우리에게 있음.
1)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음
은혜의 보좌란
예수님이 계신 곳.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장)
통신선.
보좌에 앉으시는 예수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는 예수님.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장)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마 25장)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예수
“1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2 성소와 참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히 8장)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장)
그러나 이것도 상관없음. 보좌 우편에도 보좌가 있기에. 솔로몬이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 밧세바에게 보좌 우편에 앉게 함. 그런데 그곳도 보좌임.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님. 왕의 아내나 어머니가 앉음. 아내는 한 몸. 어머니는 결코 아들보다 못하지 않음.
복합적인 표현.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계 7장)
2) 보좌 앞에서 긍휼과 은혜를 얻을 수 있음
긍휼하심을 얻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우리의 연약함과 직접적인 연결이 있음.
-우리의 삶이 절망 가운데 빠졌을 때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라. 그때 긍휼과 은혜가 필요함.
히스기야. 절망. 그러나 15년 연장 받음.
예수 앞에 나아온. 야이로. 자기의 딸 때문에. 고침을 받음.
우리의 마음과도 직결. 우리의 마음에 절망감이 엄습할 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임. 그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얻을 수가 있음.
-자신의 성품과 삶에 환멸이 느껴질 때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라. 그때 긍휼과 은혜가 필요함.
삶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
야곱의 변화.
삭개오의 변화
베드로의 변화.
수가성 여인의 변화. 바람을 계속 피우는 것. 정신적인 질병임. 안착을 못하는 것임. 변화 가능함. 은혜의 보좌 앞에서는.
-죄를 지었을 때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라. 그때 긍휼과 은혜가 필요함.
죄 때문에 자녀가 문제 생기기도 함(압살롬). 죄 때문에 기도 응답 안되기도 함(이사야59:1)-“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3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사 59장). 죄 때문에 병이 생기기도 함.
죄로 인해 중풍병 걸린 사람. 그러나 예수 앞에,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갔을 때 치료받음.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 5장)
어려서부터 교회학교도 잘 나가고 봉사도 열심히 하던 한 자매님이 결혼을 했다. 그런데 그 시댁이 철저한 불교집안이었다. 시어머니는 절에서 며칠 씩 불공을 드리고 비싼 부적을 사다가, 자신의 집은 물론이거니와 아들집까지 집안 곳곳에 도배하듯이 붙여놨다. 남편도 몸에 늘 부적을 지니고 다녔다.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시집을 간 것이다. 자매는 남편과 시댁 식구들을 전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영향을 받아 신앙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결혼하고 1년만에 ?지혜?라는 첫 딸을 제왕절개로 낳았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난 지 6일 밖에 안 되었는데 숨을 잘 쉬지 못해서 병원에 급히 데리고 갔더니 위독한 상황이라고 했다. 호흡곤란증세를 보이고 폐가 굳어진 상태며, 폐동맥고혈압, 선천적으로 심장에 구멍이 뚫린 ?심실중격결손증?이라고 했다. 인큐베이터 속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호흡을 유지했지만 살 가망이 거의 없었다.
그 자매님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결혼하자 시댁에서 그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나마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 부르짖게 된 것이다. 은혜와 긍휼이 너무나도 필요한 상황이 아닌가? 남편에게도 답답한 심정을 얘기하고 같이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남편도 아내를 따라 철야기도, 새벽기도를 갔다. 죽어 가는 딸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새벽기도를 하다가 잠깐 쉬는데 너무나 무서운 장면을 보게 되었다. 갑자기 집안 곳곳에 붙어있는 부적 중 하나에서 소복 입은 여자가 나타나더니 죽이겠다고 목을 졸랐다.
그래서 그는 순간적으로 “부적에 붙어사는 귀신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갈지어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소복 입은 여자가 방바닥에 벌렁 누워 자빠진 채, 소름 끼치는 눈초리로 헉헉거리며 노려보다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부터 가정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집안에 붙어 있는 부적들을 다 떼어버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전혀 차도가 없던 딸은 인큐베이터에서 나와서 점점 건강을 회복하고 2달만에 퇴원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수많은 죄들이 우리 가운데 있을 것이다. 고민하지 말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라.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장)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3) 보좌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음
우리의 공로나 자격을 의지하는 것이 아님.
예수 의지함으로 나아가는 것임. 그때 우리를 받아주심.
내 모습 이대로. 찬양.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만 의지하고 나가면.
결론
우리에게 누가 있는가? 예수님. 큰 대제사장.
감사하시라. 담대하시라. 승리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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