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우리가 할 일 요한복음6:1-13(2012. 4. 22. 주일오후예배 설교)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찰스 코우만 여사는 애벌레가 나방이 되는 것을 1년 동안 관찰한 뒤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 "맨처음 번데기에서 나방이 나오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을 때, 저는 작은 구멍으로 안간힘을 쓰면서 나오려고 하는 나방이 너무나 불쌍해서 가위로 구멍을 넓혀 주었습니다. 그러나 큰 구멍으로 쉽게 빠져 나온 나방은 방구석을 기어 다닐 뿐 가엾게도 날지를 못했습니다.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쉽게 번데기에서 나온 탓이었습니다.?
번데기에게 있어서 고난은 나방이 되기 위한 과정이었는데 그걸 건너뛰게 했더니 오히려 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을 당하고 만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고난이 이와 같다. 고난은 분명 힘든 것이고 벗어나고 싶은 것이고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회피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이 보다 아름답게 성장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또 회피한다고 해서 고난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결국 자신만 초라하게 늙어가고 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왜 고난을 겪는가라는 것이 집중할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에 집중해야 한다.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의 구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그리 많은 세월을 살아가지는 못했지만 인생을 온통 불평과 원망, 책임전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이런 사람을 많이 보았다. 이들은 교회를 다니지만 믿음은 없는 사람이며 따라서 고난의 순간 속에서 그들의 삶에서 나오는 태도는 신앙적인 태도가 아니라 비신앙적인 태도인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사람이신가? 신앙의 사람인가? 아니면 불신앙의 사람인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교회만 다니는 사람인가?
“광야에서 우리가 할 일”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눌 때 나와 여러분을 근원부터 살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내용없는 껍데기뿐의 신앙을 버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정말 살아있는 신앙,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얻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1. 우리의 인생에 있는 광야
1) 오늘 본문의 배경인 광야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오자.
오늘 본문의 배경은 광야이다. 다른 말로 하면 빈들이다.
어떤 분은 의아한 생각이 들 것이다. 3절에는 광야라는 언급이 없고 산이라고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그러나 예수께서 산에 오르셨다고 해서 그곳이 광야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팔레스틴에서는 산이란 것 자체가 광야중에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동일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에서도 예수께서 계신 곳이 광야임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 14장)
여기에서 반복해 나오는 빈들은 바로 광야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광야로 가셨고 무리들은 그 예수님을 따라 광야로 온 것이다.
2) 광야가 가진 일반적인 의미
그런데 예수님께서 앞서가시고 무리들이 따라간 광야라고 하는 것이 혹은 빈들이라고 하는 곳이 이름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광야는 사람이 지내기에 좋은 환경이 절대로 아닌 것이다.
성지순례 때-광야를 200미터 가량 걸었음. 햇볕은 뜨겁고, 길은 불편하고, 바람은 불고, 그 속에 모래가 날아오고, 우리는 금방 에어컨이 나오는 관광버스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었다.
그러면서 광야에서 불평하며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광야는 정말로 힘들고 고달픈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야하면 떠올려지는 이미지들이 불편한 것들 투성이다.
-광야는 위험한 곳이다.
맹수나 독충이나 뱀들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다.
-광야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곳이다.
낮에는 너무 뜨거운 태양이 사람을 지치게 한다. 반면에 밤에는 차가운 한기가 뼛속으로 파고든다. 밤낮으로 사람을 힘겹게 하는 곳이 광야인 것이다.
-광야란 외로운 곳이다
함께 부딪힐 사람이 없다. 함께 어울리며 마음을 터놓을 사람이 없다. 설사 함께 있다하더라도 광야의 위력에 움츠러들어 떨게 되는 곳이 광야이다.
-광야는 모자란 곳이다
먹을 것이 마땅치가 않다. 마실 것이 마땅치가 않다. 잠잘 곳이 마땅치가 않다. 일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거의 공급되지 않는 곳이 광야인 것이다.
3) 우리의 인생에 나타나는 광야
그런데 여러분. 사실상 우리의 인생이 이 광야와 같지 않은가?
-광야가 위험한 곳이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위험한 것 천지이다.
외형으로 볼 땐 21세기 과학의 시대이지만 내면으로 들어가면 위험천만한 광야 그대로인 세상인 것이다.
끔찍한 기사들이 많다.
학 중학생의 자살. 친구가 자살로 몰고 감.
살인 사건.
심지어는 가정에서의 폭력.
-광야가 사람을 힘들게 하는 곳이듯이 세상 또한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 천지이다.
아까 말했듯 광야는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하다. 낮에서 더워서 힘들고 밤에는 추워서 힘들다. 사실 어느 한때라도 편안해야 살맛이라도 날 텐데 밤낮으로 힘든 일들이 이어지니 얼마나 지치고 고달프겠는가?
낮에는 일하느라고 힘들다. 먹고사는 문제가 얼마나 고달픈가? 안 그런가? 물론 돈이 남아도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대다수의 형편은 그렇지가 못하다. 가진 소수는 엄청나데 많이 가졌고 나머지 다수는 먹고사는 것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유엔개발계획(UNDP)에 따르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세계의 절대 빈곤자 숫자가 12억 명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한 달에 3만원도 채 안 되는 수입. 12억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들이 햄버거 값 하나도 채 안 되는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사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 있는 대다수의 사람이 갑부는 아니다. 이자 수익만 수억 되는 사람은 극소수인 것이다. 다들 힘겹게 일해서 먹고 산다. 한낮의 생존경쟁이요 한낮의 고통이다.
그뿐인가? 야근을 하면 밤이라도 쉴 시간이 아니다. 또 쉬러 집으로 돌아갔더라도 집안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저녁시간을 힘겹게 보내고 악몽 속에 밤을 지내야 한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그와 같은 삶을 산다. 비약인가? 아니지 않는가? 인생은 참으로 광야이다.
-광야란 외로운 곳이라 했듯이 우리네 인생 또한 외로운 때가 많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광야생활을 할 때 얼마나 외로웠을까?
모세가 바로왕을 피해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양을 칠 때 얼마나 외로웠을까?
물론 다윗도 모세도 가족들이 함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곳이 광야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외로움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그런 외로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있다면 사람도 아니다.
사실 사람은 외로움을 싫어한다. 그것은 어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이들도 그렇다. 그래서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닌가? 남들 카톡하면 나도 카톡 하고 남들 게임하면 나도 게임하고 남들 콘서트 쫓아다니면 나도 콘서트 쫓아다니고 남들 메이커 사면 나도 메이커 사고. 왜 그런가? 모나지 않기 위해서이다. 어울리기 위해서이다. 외로운 것은 싫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미국 일간지에 한국에서 유학 온 한 여학생이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사건이 크게 보도된 적이 있었다. 그 여학생은 학교 공부가 끝나면 식당에서 그릇 닦기, 청소, 아이보기 등으로 돈을 벌어 학비에 보태야 했다. 게다가 언어가 잘 통하지도 않는데다가 과제물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학위도 따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니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가장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다. 견디지 못한 그녀는 인생을 이렇게 살 필요가 있느냐면서 자신이 거쳐하던 고층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다.
유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고독을 견디지 못하여 죽는다". 힘들었어도 외롭지 않았다면, 함께 마음 터놓고 어울릴 사람이 있었다면 견딜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지 않는가?
안네의 일기를 잘 알 것이다. 그 일기의 당사자인 안네는 수용소에서 갖은 고초를 다 겪고도 살아났던 강인한 소녀였다. 그런데 그런 안네 프랑크도 함께 수용되었던 언니가 어느 날 발진티푸스에 걸려 침대에서 떨어져 죽은 직후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죽어 갔다. 강한 소녀 안네도 외로움 앞에선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든 인생은 크든 작든 이런 외로움의 공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분명히 가족도 있는데, 이웃도 있는데, 친구도 있는데, 그럼에도 완전히 홀로 고립된 것 같은 쓸쓸함과 외로움을 느끼곤 하는 것이다.
역시 광야 인생이다.
-광야가 모자란 곳이듯 우리의 인생도 모자란 것 투성이다.
돈이 모자라지 않은가?
여력이 모자라지 않은가?
들어갈 직장이 모자라지 않은가?
들어갈 학교가 모자라지 않은가?
살 집이 모자라지 않은가?
건강이 모자라지 않은가?
모자란 광야 인생이다.
2. 광야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태도
정리해보자. 광야는 어떤 곳인가?
광야는 위험한 곳이다. 광야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곳이다. 광야는 외로운 곳이다. 광야는 모자란 것이 많은 곳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도달한 곳은 바로 그러한 광야였다. 오아시스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지만 그곳에서 날을 지새울 수는 없다. 광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무리들을 데리고 심야집회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들 밤이 되기 전에 돌려보낸다. 광야는 숙박시설이 잘되어있는 수양관이나 기도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장 급한 문제는 굶주린 무리들이 먹는 일이었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문제는 지금의 장소가 광야라는 것이다. 배고픔도 느끼고 먹어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정작 먹을 것을 도저히 준비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광야의 위력을 몸소 실감하게 되는 상황인 것이다.
이때 광야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가 오늘 본문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어떤 태도가 보이고 있는가?
1) 무방비 상태
첫째는 무방비 상태의 태도이다.
지금의 상황은 골치가 아픈 상황이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무리는 큰 무리였기 때문이다.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게다가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은 광야였기 때문이다. 무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배고픔을 느끼고 있다. 먼길에서 온 사람들은 배고픔 정도가 아니라 기진해서 스러질 지경이다. 그리고 제자들 가운데서도 배고픔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리들도 제자들도 침묵하고 있다. 도대체 이런 상황 속에서 할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큰 문제를 만났을 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이는 태도 중 하나이다.
애라 모르겠다. 어떻게 되겠지. 될 대로 되라. 그러면서 손을 놓아버리는 자세이다. 이것은 초월의 자세가 아니고 포기의 자세이다.
여러분이야. 가만히 생각해보라.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죽지 못해서, 마지못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무언가를 해보아야겠다는 생각도 없고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할까하는 고민도 없고 이제는 맥빠진 사람들이 되어 그저 흘러가는 대로 떠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살아 있어도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2) 계산적인 태도
오늘 본문에서 보이는 두 번째 태도는 계산적인 태도이다.
그것은 빌립에게서 보이는 태도이다.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그런데 머리 굴려봐야 남는 것은 모자람뿐이다. 좋은 머리를 동원해보았지만, 그리고 주판알을 굴려보았지만 도무지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마 장소가 마을 안이었다면 빌립과 같은 사람이 잘 해결해 나갔을 것이다. 아니 광야라 해도 사람만 적었으면 어떻게 해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광야이고 사람도 무척 많다. 상황이 최악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머리가 좋고 수완이 좋아도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문제도 그렇지 않은가? 머리가 좋고 수완이 좋고 계산이 빠른 사람은 잘 해나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큰 어려움을 겪으면 아무리 탁월한 사람도 어쩔 수가 없다. 평범한 사람들은 더욱 그렇고.
3) 괴리에서 느끼는 절망감.
오늘 본문에서 보이는 세 번째 태도는 현실과 해결 사이의 괴리에서 느끼는 절망감의 태도이다.
그것은 안드레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어떤 분들은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빌립과 안드레를 대비시킨다. 빌립은 믿음 없는 사람이요 안드레는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빌립은 계산적인 사람이요 안드레는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안드레는 결코 믿음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현실과 해결점 사이의 커다란 간격에 낙담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수많은 군중이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먹을 것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가 다이다. 이것이 해결인데 턱없이 모자란 해결이다.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말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믿음의 태도인가? 오히려 절망을 보이는 태도가 아닌가?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현재의 상황은 한없이 어려운데 해결점은 형편없이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다. 이때 흔히 보이는 태도는 절망감이다.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건 해결이 안됩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이제는 끝입니다. 이제는 망했습니다.
3. 광야에서 우리가 할 일
결국 광야 한복판에서 사람들은 무방비상태로 그냥 살아가든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애를 쓰다가 원위치로 돌아가 모자란 것만 다시 느끼게 되든지, 현실과 해결의 큰 차이에서 절망을 느끼든지 하는 것이다.
혹시 여러분도 이 세 가지 중 하나의 태도를 보이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는 다니지만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나 여러분. 광야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방비고 아니고, 잔머리의 계산도 아니고, 절망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행동이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광야 한복판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1) 자신의 작은 것을 드리는 헌신
첫째로 자신의 작은 것을 드리는 헌신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통로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가져온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였다. 그것은 끽해야 어린아이의 도시락이었다. 아이의 엄마인지 할머니인지는 모르나 아이를 위해 준비한 작은 분량의 식량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아이가 가진 모든 것이기도 하다.
아이는 자신도 배가 고프련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 안드레를 통해 예수님께 기꺼이 드렸던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간혹 이와 같은 헌신의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다.
과부의 두 렙돈. 예수님은 그 과부가 앞에 넣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다.
사렙다의 과부. 이 과부는 자기와 아들이 먹고 죽으려한 마지막 양식을 엘리야 선지자에게 주었다. 그런데 굶어죽은 것이 아니라 축복을 받았다. 하나님이 밀가루통의 밀가루와 기름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남아도는 가운데서 극히 일부를 드리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든 광야의 한복판에서 헌신하는 것은 믿음의 행동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런 믿음의 행동을 귀하게 여기신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나는 나와 여러분이 오늘 본문의 어린아이처럼 광야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것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기를 원한다. 시간도, 물질도, 능력도, 지능도, 우리의 삶과 죽음까지도 말이다.
2)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
광야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첫째로 자신의 작은 것을 드리는 헌신이다. 두 번째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일이다. 주님이시라면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예수님은 걱정하거나 당황하지 않으셨다.
100프로의 해결책이 예수님께 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들로 잔디에 앉게 하셨다.
먹을 수 있는 분위를 미리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떡을 가져 축사하셨다.
무엇을 하시든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고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던가?
-예수님은 떡을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게 하셨다.
원하는 대로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먹다마는 것이 아니라 배부르게 먹은 것이다. 넉넉한 해결 아닌가?
-예수님은 남은 것을 거두라고 하셨다.
남은 것을 거두니 12광주리나 되었다. 이것은 애초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보다도 많은 분량이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이런 예수님이시라면 광야의 한복판에서라도 얼마든지 의지할 수 있는 주님이 아니신가? 부디 그 능력의 주님을 의지하고 사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은 믿음대로 갚아주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 이상 종노릇을 하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출애굽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도달한 곳은 낙원이 아니라 광야였다. 광야를 지나서야 비로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도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버려두셨는가? 천만에.
낮에는 너무 더울까봐 구름 기둥을 준비해 주셨다.
밤에는 너무 추울까봐 불기둥을 준비해주셨다.
그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광야길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앞서가면서 안내자의 역할을 해주기도 하였다.
하나님은 먹을 양식이 없는 그들을 위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다. 고기가 필요할 때 메추라기를 먹게 해주셨다.
물이 필요할 때 반석에서 물을 내시기도 하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지껏 여러분을 인도하신 분이 누구신가? 아주 망하지 않도록 붙들어주신 분이 누구신가? 여러분의 생명을 보존해주시고 진작 끝났어야 할 것들을 지속시켜 주신 분이 누구인가? 독생자 예수를 보내시고 그 피로 인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신 분이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 아니신가?
광야의 한복판에서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이것이 우리가 광야에서 할 일이다.
3)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
광야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첫째로 자신의 작은 것을 드리는 헌신이다. 두 번째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일이다. 세 번째 일은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것은 광야야말로 주님의 능력과 기적이 나타날 기회의 장소라고 하는 사실이다.
내 경험. 내가 가장 절망적일 때, 내 자신이 완전한 한계를 느끼고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바로 그때가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이 나타나는 때였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성경말씀들을 기억해보라.
사드락 메삭 아벧느고가 풀무불 속에 들어갔을 때, 바로 그때 하나님이 능력의 손으로 그들을 도우셔서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못하게 하시지 않았는가?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을 때, 바로 그 최악의 순간이 하나님이 사자의 입을 틀어막으시는 기적의 순간이 아니었는가?
한번 따라해 보자. 광야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기회의 장소이다.
이것을 기억하며 미리 감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더욱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가짜 신앙과 참 신앙이 여기서 나눠지지 않는가? 광야에 놓일 때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사람은 자신의 신앙이 엉터리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정말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이는 광야에서 더욱 주님께 가까이 간다. 더욱 매달려 기도한다. 그리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역사를 내다보고 미리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금세기 초 세계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지휘자가 있다. 토스카니니이다. 토스카니니하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명성 있던 지휘자 아닌가?
그런데 그는 원래 지휘자가 아니었다. 첼로 연주자였다. 그나마도 심한 근시로 인해 연주 중에는 악보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연주 때마다 연주할 악보를 모두 외워서 연주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주회를 앞두고 그 악단의 지휘자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단원들 중에 누군가에게 지휘를 대신 부탁해야 할 입장이었다. 그때 악보를 모두 외우고 있던 토스카니니가 선발되어서 임시 지휘를 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세계적 대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만약 토스카니니가 그토록 시력이 나쁘지 않았다면 유럽의 한 첼로 연주자에 불과했었을 것이다.
시력이 나빠서 악보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악보를 모두 외울 수가 있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세계적인 지휘자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토스카니니는 이런 말을 남기고 있다.
“어려울 때 힘 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해서 불평하지 말자. 좋은 환경만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아담은 에덴동산과 같은 좋은 환경에서도 타락하지 아니했는가. 눈물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리자. 눈물 있는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더 똑똑히 바라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힘이 되어주신다.?
결론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
광야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이는 태도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첫째로 무방비의 태도이다. 그저 되는대로 마지못해 살아가는 것이다.
둘째로 계산적인 태도이다. 애쓰고 버둥대다가 비로소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셋째로 절망적인 태도이다. 현실과 해결의 골이 너무 커서 절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가 광야의 한복판에서 정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1. 힘들고 어려운 중에서 더욱 헌신
2. 자신과 환경 보지 말고 주님 의지
3. 기적의 기회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미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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