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기도하는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 마태복음 6:9-13(2001.12.16 주일오전예배 설교)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우리는 그 동안 주기도문 강해를 통해서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 가장 중심적인 부분 중 하나가 바로 기도라는 사실을 배웠다. 예수님은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습관을 쫓아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기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기도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 설교에 대한 가르침은 없어도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많지 않은가? 심지어는 전도보다도 우선적으로 가르치셨다. 능력 받아야 전도도 할 수 있지 않은가?
나와 여러분도 예수님을 본받아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기도의 사람으로 설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동안 들은 말씀을 잠시 정리 해보자.
우리는 먼저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었다. 우리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첫째로 하늘에 계신 분,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처지를 다 아신다.
-우리를 환난에서 건지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의 꿈과 계획을 이루어주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기도 대상이신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생명 같이 여겨주신다.
이런 하나님이시니 우리이 기도의 대상이 될 수 있지 않는가? 전능해야 기도 응답 가능하니까. 그러나 전능한 폭군이라면 기도 응답을 기대하지 못한다. 전능하며 동시에 자비하신 분일 때 우리는 그에게 마음껏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동시에 우리의 아버지시기에 우리는 마음껏 기도할 수 있다.
이제 오늘부터 몇 주간 동안 “우리는 무엇을 기도하는가”라는 주제 즉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눌 것이다.
따라해보자. “우리는 무엇을 기도하는가?”
1. 기도에 있어 가장 우선적인 기도
사람마다 기도의 내용이 각기 다르겠지만 아마도 많은 기도의 내용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 보면 기도의 내용에도 우선순위가 있다.
사실 기도만이 아니고 세상살이에도 우선순위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사실 아닌가?
1) 만사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해서 예의를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우리 집도 사소한 것부터 가르친다. 밥 먹을 때 어른이 먼저 먹은 다음에 먹는다. 과자 하나를 먹어도 어른이 먼저 먹은 다음에 먹는다.
어떤 사람이 오래전 파리의 지하철을 탔을 때 보호석에 앉을 수 있는 우선순위를 적어 붙여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최우선순위는 전쟁 장애자, 다음이 맹인, 그리고 노동 장애자->임산부->4 세 이하의 어린이 ->그리고 상기자의 동반자순으로 돼 있었다. 대단한 우선순위사상이 아닐 수 없다.
이 우선순위는 의료 차원에서도 중요. 예를 들어 사체(死體)에서 제공된 장기는 하나뿐인데 그 장기 이식을 하지 않으면 죽게 될 환자는 여럿이었을 때 누구에게 이식하느냐 하는 순위 결정이다.
배가 난파하여 가라앉고 있을 때 누구부터 구제하느냐의 우선순위는 서양 사회에선 상식이라고 한다. 어린이->부녀자->노인->중년->젊은이->선원, 그리고 맨 마지막이 선장으로 돼 있다.
그런데 예전에 5 백 71 명을 태운 그리스 유람선이 침몰하고 있을 때 그 배의 선장이 구조 헬리곱터를 타고 맨 먼저 탈출했다 하여 우선순위 정신을 둔 거센 논란과 지탄을 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우선순위란 것은 중요한 것이다.
목회에 있어서도 우선순위가 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가 점점 커가니까 몹시 바빴다. 원래 그 분은 자기만의 기도실 은밀한 곳이 있었다. 과거 교회가 작았을 때는 열심히 이 기도실에 들어가서 무릎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겼는데 일이 바쁘고, 늦게 들어오게 되는 날이 많아지면서 피곤하니까 이내 잠자리에 들곤 하는 일을 몇 달 동안 했다.
그러다 어느 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일에 내가 너무 등한히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 날은 기도실에 들어갔다. 거기 좀 들어가 있었더니 쿵쾅거리는 딸아이의 발소리가 들렸다.
목사님이 문을 여니까 문 밖에 와서 멈추어 섰던 딸아이가 화들짝 놀래면서, “아빠! 아무 것도 아니어요.” 하고는 되돌아 급히 내려가려 했다. 목사님은 딸아이를 붙잡고,“왜. 무슨 일이니?”하고 물었다.
“엄마가 아빠가 기도하시기 위해 이 방에 들어가시면 절대로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전 너무 아빠가 보고 싶어서 엄마 말씀을 어기고 그냥 올라온 거예요. 요 근래에 통 아빠를 못 뵈었거든요.”
목사님은 딸아이를 붙잡고 꼭 껴안아 준 다음 볼에 입 맞추고 내려 보내면서 울며 회개했다.
“하나님 용서해 주옵소서.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어떤 프로그램보다. 어떤 시간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시간에 내 정성을 더 쏟았어야 했습니다. 프로그램 따위에 다 빼앗기고 말았음을 용서해 주옵소서. 바로 제게 부족한 것이 이것입니다”
우선순위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 무엇보다 최고의 우선순위는 기도이다.
예수님이 그리하셨기에..
2) 기도에 있어서 우선순위
그리고 기도에 있어서도 우선순위가 있다.
그러면 주기도문에서 나타난 기도의 최우선 순위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 즉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조금 의아하게 여길 지 모르겠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가 어떻게 찬양의 내용이 될 수 있는가하고 여겨지는 것이다. “영광 받으시옵소서” 혹은 “찬양받으시옵소서” 혹은 “하나님은 광대하시고 능력이 많으십니다”라고 하는 것이 더 찬양답지 않은가?
그러나 성경은 보면 하나님을 거룩성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찬양의 대표격인 것으로 등장하곤 한다. 사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무척이나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찬양하는 것이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성전에 들어간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그때 하나님 보좌를 둘러선 스랍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찬양한다.
“1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장)
성경의 가장 마지막권인 계시록에는 네 생물이 나오는데 그 생물 역시 하나님의 거룩함을 찬양한다.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세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네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계 4장)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양하는 기도인 것이다.
2.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
그런데 하나님을 높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성경의 인물들이 하나님을 체험한 후에 경험으로 아는 이름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처럼 체험으로 안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러한 이름 가운데 어떤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는가?
1) 여호와(야훼)-가장 대표적인 이름
하나님의 이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여호와”라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만한 이름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계시하신다.
“13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장)
여기에서 스스로 있는 자가 바로 여호와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하나님은 여호와, 즉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이 세상의 어떤 만물도 스스로 존재한 것은 없다. 존재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만물은 다 시작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끝도 있다. 영원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신 영원한 분이시다.
우리는 그처럼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바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이다.
2)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잘 아는 또 하나의 이름은 바로 “여호와 이레”일 것이다. 이 이름은 아브라함의 신앙 경험 속에서 소개되어진 이름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장)
아브라함은 그 엄청나게 힘들고 가슴 아픈 하나님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한다.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4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아브라함을 막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외함을 인정해 주신다.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 번제로 드리도록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수양을 발견하여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창 22장)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즉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누구든지 준비해 놓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한 사람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은 믿노라 하면서 하나님의 준비해주심을 안 믿는 것 같다. 그 증거가 바로 염려이다.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해보려고 안달이 난 모습이다. 여러분은 어떠하신가? 혹시 여러분 가운데도 하나님의 준비하심을 믿지 못하고 가슴 졸이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부디 믿음의 눈이 열려지시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수양을 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기억할 것이 있다. 아브라함의 눈에 준비된 수양이 보인 것은 아브라함이 온전한 순종의 모습을 보인 다음이라는 것이다. 준비된 것은 이전부터이지만 정작 보인 것은 마지막까지 순종한 후가 아닌가?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모든 것을 보기 위해서는 끝까지 순종하는 우리의 모습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실 수 있기를 바란다. 염려하며 걱정하는 에너지를 오히려 더욱 순종하는데 사용하시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축복이 밝히 보이기를 축원한다.
그때 나와 여러분은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 곧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손태영 교수님. 아들. 부분적인 천재. 한국에서 어려움. 미국 생각.
이필립 목사님. 고등학교 이사. 학교에 넣어주기로 함.
손교수님. 정말 귀한 분. 그 어머니의 영향.
그 열매를 거두고 있음. 결혼. 두 다리. 그런데 아내가 적극적으로.
3) 여호와 샬롬-고난의 해결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유명한 또 하나의 이름은 “여호와 샬롬”이라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기드온이 경험한 하나님의 이름이다.
기드온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커다란 시련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고통에 못 이겨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2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산에서 구멍과 굴과 산성을 자기를 위하여 만들었으며 3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 사람이 치러 올라와서 4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식물을 남겨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5 이는 그들이 그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서 메뚜기떼 같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약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6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삿 6장)
하나님은 백성들의 울부짖음에 응답하셔서 기드온을 구원자(사사)로 세우시려고 기드온을 찾아가시고 사명을 맡기신다.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14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15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하리라”(삿 6장)
기드온은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지 확인하고자 한다.
“17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18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그가 가로되 내가 너 돌아오기를 기다리리라”(삿 6장)
마침내 기드온은 자신에게 말씀하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확인하고 슬퍼한다.
“19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서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20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전병을 가져 이 반석 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쏟으라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 21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22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사람으로서 영광의 하나님을 보면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기드온을 안심하게 하시고 기드온은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4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삿 6장)
생각해보라. 곧 죽을 줄 알았던 상황에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기드온은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졌겠는가?
더 나아가 절망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의 계속적인 확인은 얼마나 소망을 불러일으켰겠는가? 이제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여호와 샬롬이라고 고백할만하지 않은가?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여러분도 체험하실 수 있기를 바란다. 징글맞게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 받으시고 여러분의 심령에 평안을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지금 당장의 해결은 아닐 수 있다. 기드온이 여호와 샬롬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해서 지금 당장 이스라엘이 좋은 환경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사실 평화라는 것은 무엇을 가졌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형편이 나아졌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아직은 상황이 엉망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허락하시면 우리는 요동치 않는 마음이 될 수 있는 것이며 그 마음 그대로 삶 역시 따라오는 것이다.
나와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평강을 경험하고 평강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란다.
4) 여호와 닛시
하나님의 이름 가운데는 승리와 관련된 이름도 있다.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이다. 이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실 때 깃발을 휘두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모세가 하나님께 고백했던 이름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광야를 지나는 동안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사막 부족이 있었는데 아말렉족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그들과 결전을 벌이게 된다.
“8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출17장.
이때 여호수아는 사람들을 택하여 싸우러 가고 모세는 산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는데 놀라운 것은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지는 것이었다.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출17장.
그러다가 모세의 파이 피곤해지자 아론과 훌이 모세를 돕는다.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출17장.
결국 여호수아는 아말렉을 쳐서 이기게 되고 모세는 여호와 닛시라고 고백한다.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15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출 17장)
여러분에게 묻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멜렉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군사력으로인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인가? 당연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서이다. 모세가 기도할 때에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한 모습이다. 승리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시라. 진정한 승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다. 사람의 승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까지 한정적인 것일 뿐이며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불안한 승리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붙들어주심 없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으며 자신의 신념에 대해 큰소리 칠 수도 없다.
정신분석을 처음으로 주장한 오스트리아의 의삭자 지그문드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 박사는 근대 정신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대단한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정복 못한 불행한 사람이다. 그의 심장 고동이 불규칙적인 것을 발견한 그의 의사는 지나친 흡연을 중단하라고 했다. 그는 잠시 중단했으나 고생스러움을 이겨내지 못하여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그는 턱뼈의 암으로 35회나 수술을 받아야 하는 고통을 당하다가 마침내는 그의 아래턱을 완전히 들어내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래도 그는 담배를 끊지 못하므로 그의 의사들은 생명이 위험함을 계속 경고했으나 끝내 그 담배를 버리지 못하여 그가 담배를 피운 것이 아니라 그 담배가 그의 생명을 먹어버리고 말았다. 프로이드 박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은 분석했다. 자기의 문제도 능히 판별할 수 있는 지식인이다. 그러나 자신의 정복에는 실패했다. 이게 사람이다. 자기 자신에게도 승리하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프로이드를 인생의 승리자라고 할 수 있을까? 담배개비 하나도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하는데 말이다.
프로이드보다 훨씬 못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프로이드도 못 끊은 담배를 끊은 한 분을 알고 있다. 이분은 처음에 자신의 힘으로 담배를 끊으려고 했다. 그러다 실패했다. 휴지통에 담배를 버리기도 하고, 담배를 손으로 꾸겨서 집어던지기도 하고, 담배 끊는 약을 먹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느 순간엔가 담배를 끊어버렸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니까 그렇게 애를 써도 이기지 못하던 담배의 유혹을 넉넉하게 이겨낸 것이다.
전에 군부대에 강연을 하러 갔었는데 부대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윤석 중대장임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신 것이다. 이분은 원래 교회도 잘 안 나갔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목사님 사모님이 다른 사람 담배 끊는 것 기도해 줄 때 자신이 옆에 있었는데 사모님의 기도 후 자신이 담배를 끊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끊을 수 없었던 담배였는데 기도 후 담배가 그냥 싫어졌다는 것이다. 그 사건을 체험한 후 이윤석 중대장님은 교회를 잘 다니신다고 한다. 할렐루야.
승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승리를 경험하고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을 찬양하실 수 있기를 바란다.
5) 여호와 로프에하
조금은 낯설은 이름이지만 하나님의 이름 가운데 “여호와 로프에하”라는 이름이 있다. 이 이름은 치료의 하나님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 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장)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성경에 보면 고칠 수 없는 중병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으로 고침 받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중의 한 사람으로 히스기야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충성된 종이었던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 걸리고 이사야는 그 사실을 히스기야에게 고한다.
“1 그 즈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사 38장)
히스기야는 이사야의 말을 듣자 통곡하며 하나님께 기도한다.
“2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3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사 38장)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주셨는가?
“4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5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 오년을 더하고 6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7 나 여호와가 말한 것을 네게 이룰 증거로 이 징조를 네게 주리라 8 보라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도를 물러가니라”(사 38장)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여호와 로프에하”, 곧 치료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주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치료하시는 하나님으로 다가오신다. 질병이 있으신 분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란다.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아가시기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란다.
성경은 말씀한다.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장)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장)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장)
6) 임마누엘
한가지만 더 생각해보자. 이제 언급하려는 이름은 너무나도 유명한 우리 주님의 이름이다. 바로 임마누엘이다.
마태복음 1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장)
이 말씀에 의하면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이다.
그리고 이 이름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영광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하심으로서 성취된 이름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참으로 사람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아니신가? 함께 먹고, 함께 마시고, 함께 주무시고, 함께 대화를 나누시고, 함께 고민하시고, 함께 삶을 나누셨던 하나님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또한 승천하시기전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장)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사후에 너무나도 큰 직임을 감당해야 하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아시는가? 바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하셨다.
“5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장)
그리고 그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야말로 지도자에겐 가장 큰 능력이라는 것을 여호수아는 경험하게 된다.
여러분에게 묻는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하시는가? 사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지 않은가? 하나님과 함께 모든 것 다 따라오지 않는가?
한 젊은이가 있었다. 이 젊은이는 왕에게 큰 도움을 준 젊은이이다. 왕은 그 젊은이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했다. 어떤 것이든 들어주겠다는 것이다. 젊은이는 다른 소원을 말하지 않고 다만 한 가지 왕이 해마다 자신의 집을 찾아주실 수 없겠느냐고 했다. 늘은 아니지만 일 년에 한번이라도 왕께 함께 있고 싶다고 겸손하게 부탁을 드렸다.
사람들은 비웃었다. 왜 부귀영화를 구하지 않느냐,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자리를 잡을 것이지 왜 엉뚱한 요구를 하느냐고...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왕이 가게 되는 길이 새롭게 닦이고 왕이 머물 집이니 웅장하게 다시 지어지고 왕이 쓸 수 있도록 갖가지 귀한 것들이 그 집에 채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해마다 그 집엔 풍성한 것들로 가득 차게 된 것이다. 왕이 함께 하니까 다른 것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생각을 고쳤다. 이젠 아무도 그 젊은이를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우리에게는 세상의 왕보다 더 큰 왕이 계시지 않는가? 더 크신 왕은 일년에 한번이 아니라 날마다 순간마다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가? 원하기는 그 하나님을 경험하시기를 축원한다. 그리하여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실 수 있기를 바란다.
3. 하나님의 사람과 찬양의 관계
1) 많이 체험한 사람에게서 찬양이 흘러나옴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이쯤에서 한 가지를 여러분에게 더 묻고 싶다. 여러분에게는 찬양이 넘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며 사시는가 하는 질문이다.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많이 경험할수록 찬양이 더욱 흘러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준비해주심을 체험할 때 여호와 이레, 준비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주님 내길 예비하시니 나 기뻐합니다
주님 내길 예비하시니 나 기뻐합니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 이레
주님 내길 예비하시니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나 평강을 얻게 되면 여호와 샬롬, 평강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짐을 풀었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레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승리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승리하게 될 때 우리는 여호와 닛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 아닌가?
“승리는 내것일세 승리는 내것일세
구세주의 보혈로서 승리는 내것일세
내것일세 승리만은
구세주의 보혈로서 항상 이기네“
-질병 가운데 있던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받게 될 때 여호와 로프에하, 치료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 아닌가?
“주님 나를 치료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주님 나를 치료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여호와 라파 여호와 라파
주님 나를 치료하시니 여호와 라파“
-어떠한 상황 어떠한 형편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체험할 때 우리는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 아닌가?
“내 주는 자비하셔서 늘 함께 하시고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주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늘 체험하시고 그러기에 찬양할 내용이 넘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2) 찬양할 때 하나님을 많이 체험할 수 있음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를 더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하나님을 체험할 때 찬양할 내용이 많아지지만 그 반대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역사하심을 더 많이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
죄없이 고소 당해 매를 찾고 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
“19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행 16장)
하나님을 찬양하는 바울과 실라
“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장)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바울과 시라
“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행 16장)
-여호사밧 왕
위기에 처한 유다와 여호사밧 왕
“1 그 후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몇 마온 사람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한지라 2 혹이 와서 여호사밧에게 고하여 가로되 큰 무리가 바다 저편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 이제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있나이다 3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4 유다 사람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더라”(대하 20장)
위기 중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여호사밧과 백성들
“18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19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대하 20장)
찬양을 통해 기적을 체험
“22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23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산 거민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거민을 멸한 후에는 저희가 피차에 살륙하였더라”(대하 20장)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하나님을 찬양하시라. 그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겪게 될 것이고 그 후 더욱 찬양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특별히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있는가? 그렇다면 더욱 찬양하시라. 찬양은 위기와 시련을 확실하게 바꾸어 놓을 것이다.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한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할까?
찬양하는 기도를 하라.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을 높이라. 나와 여러분을 향하여 베푸는 은혜와 영광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높여드리라.
송명희씨를 아시는가?
미숙아로 태어나 1년후 다시 뇌성마비라는 병원진단을 받은 송명희씨의 삶은 `암흑' 그 자체였다. 어머니 최정임 전도사는 고백했다. "남편마저 신병으로 몸져누워 명희에게 우유사줄 돈 한 푼 없었을 때는 절망과 고독감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과 암담속에서도 희망을 잃지않았던 것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시장갈 때나 잠시 외출할 때도 명희를 꼭 데리고 다녔습니다. 가두어 키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국민학교 입학 무렵 명희를 받아주는 학교가 없었을 때는 또다시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던 중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또래의 사촌이 학교에 입학을 해 잠시 집에 들러 학습을 지도해 주었는데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명희가 연필을 잡고 또박또박 글씨를 써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글씨 쓰기에 재미를 붙였다. 그러나 가장 괴로운 것은 어김없이 찾아온 사춘기였다.
송명희씨는 고백했다.
"그땐 사지가 뒤틀린 나의 모습을 보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왜 나를 이렇게 낳았느냐고 부모님께 원망도 했지요. 몇 번씩 자살기도도 해봤지요. 결국 나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인 하나님을 만나 따져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밤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몸부림을 쳤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원망이 기쁨과 감사로 바뀌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찬양시들이 그녀의 영혼을 통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고통의 조각들을 언어로 형상화해 송씨가 발표한 시집은 12권이나 된다.
동화와 간증집을 합하면 20여권에 이른다.
이 소명희씨가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하였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안희환 금요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마태복음 6:9-13(2012. 3. 23. 금요예배 설교) (0) | 2012.03.23 |
---|---|
예수님께 권세가 있다 막1:21-28(2012. 3. 16. 금요예배 설교) (0) | 2012.03.16 |
예수 예수 오직 예수 행3:11-16(2012. 3. 2. 금요예배 설교) (0) | 2012.03.02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행3:1-10(2012. 2. 24. 금요예배 설교) (0) | 2012.02.24 |
예수님은 부활하셔야만 한다 마28:1-10(2012. 2. 10. 금요예배 설교) (0) | 2012.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