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환 특별설교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서 요한복음12:23-24

안희환2 2012. 3. 7. 14:06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서 요한복음12:23-24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은 그것을 위한 희생을 필요로 한다.

 

1) 부모의 희생

 

2) 국화꽃을 피우기 위한 희생

 

한 송이의 꽃이 피기 위해서도 그만큼의 희생이 따른다.

서정주 씨의 국화 옆에서란 시에 그것이 잘 드러나고 있다.

 

한 송이의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나

또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운에 마음 졸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읺았나 보다

 

3)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한 희생

 

4) 생명의 잉태를 위한 희생

 

그런데 여러분이여. 다른 무엇보다 희생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는가? 그것은 바로 생명의 잉태이다. 나는 아이를 날기까지 이것을 이론으로만 알았지 실제로 알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안다. 왜 조금 안다고 하는지 아는가? 나는 남자니까. 한 아기가 태어나기까지 그것은 참으로 고달픈 삶의 연속이었다. (1) 첫째로 입덧이다. 뭐 하나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게다가 먹어도 곧 토해내는데 쳐다보는 것만 해도 끔찍스러웠다. (2) 둘째로 볼품없는 몸매이다. 여러분 아기 생기면 제 아무리 뛰어난 몸매의 소유자도 별 수 없다. 허리 사이즈가 자동으로 올라간다. 올라가고 급속도로 올라간다. 어디 허리뿐인가? 배는 어떤가? 완전 올챙이 배다. 사랑과 영혼의 데미무어도 임신한 몸매는 영 아니었다. (3) 셋째로 여러 가지 불편함이다. 잘 걷지를 못한다. 잘 뛰지도 못한다. 허리에 손을 대고 요상하게 걷는다. 혹시라도 위험한 일 생기지 않기 위해 얼마나 몸조심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4) 넷째로 영양분의 문제이다. 임신한 후부터 먹는 영양분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다. 뱃속 태아가 그것을 다 가져간다. 먹는 것으로 모자란 것은 엄마에게서 가져간다. 예전에 아내가 자꾸 아프다고 해서 알아봤더니 아기를 낳고 철분제를 먹었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너무 비싸서 못먹었다고 했더니 그래서 아프다는 것이다. 아기에게 영양분을 다 주고 철분제로 보충해 주지 않아서 자꾸 뼈마디가 아프다는 것이다. (5) 다섯째로 잉태의 고통이다. 나는 아내가 아기를 낳을 때 분만실 밖에서 수없이 질러대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저게 내 아내 맞나?". 엄청난 크기의 하이 소프라노.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좀 목사의 아내답게 점잖게 아기를 낳으려나 했더니 웬걸, 도저히 내 아내의 목소리와는 다른 처절한 비명을 한참이나, 정말 한참이나 질러댄 후에 아들놈(효빈)이 태어났다.

 

그런 면에서 저와 여기있는 모든 사람은 다 커다란 희생을 바탕으로 생명을 얻은 채무자들이다. 만약 외형적인 환경 때문에 부모를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말로 불효자식이다.

 

2)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희생제물이었던 것이다.

 

1) 생명보다 소중한 영생

 

그런데 여러분 이쯤에서 정말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세상에는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시는가? 그것은 영생이다. 생명은 이 땅에서의 생명인데 반해 영생은 천국에서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2) 영생에서 떨어진 인간

 

그런데 사람이 영생을 얻는데 중요한 걸림돌이 있다. 그것은 바로 죄라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단절시킨다.

성경은 말씀한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591-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323)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한번 죽는 것은..(9:27)

 

3) 영생을 주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그렇다면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한 길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간단하다. 죄 때문에 영생에서 멀어졌다고 한다면 죄를 사함받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죄를 사함받는가?

 

(1) 구약

 

구약에서는 어린양의 희생으로 죄사함을 받았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양을 바친 것은 아니다. 형편이 아주 좋은 사람은 소를 바쳤다. 형편이 좀 못한 사람은 비둘기를 바쳤다. 형편이 극빈자인 경우에는 곡식으로 바치는 것이 허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관행으로는 양을 제물로 바쳤다. 죄를 지은 사람은 양을 한 마리 끌고 제사장에게로 온다. 죄인이 양의머리에 안수할 때 그 죄인의 죄는 양에게 전가되고 양은 그 사람의 죄를 짊어진 채 죽임을 당한다. 죽임을 당하되 그냥 당하는 것이 아니다. 온몸이 쪼개지는 것이다. 그리곤 불에 살라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처럼 비참하게 죽는 양을 보면서 죄의 심각성을 깨달아야만 했다. 바로 자신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온갖 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 그처럼 죽임을 당해야 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했다. 양의 비참한 죽음은 바로 죄지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하나님께 죄사함 받은 것은 거저 받은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희생을 바탕으로 받게 된 것이다.

 

(2) 신약

 

그러면 우리도 죄사함받기 위하여 양을 희생제물로 바쳐야만 하는가? 그건 아니다. 양을 바치는 희생제사는 이제 예수님의 오심으로 끝이 났다. 예수님이 바로 죄를 사하는 어린양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 전에 광야에서 설교했던 세례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받으러 오는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보라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같은 내용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 한알의 밀알이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적인 일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자연적인 일을 가지고 당신의 죽음과 그 죽음 후에 일어날 결실에 대하여 미리 예고하고 계시는 것이다.

 

오래전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을 이렇게 예언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4-6)

 

여러분이여 분명히 기억하라.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선을 통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선으로 구원받을 만큼 흠없이 살 사람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공로를 통해서가 아니다. 공로를 행했다고 이전에 지은 죄 또한 앞으로 지을 죄 그리고 지금 짓고 있는 죄가 씻어지지는 않는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죄를 해결해주지 않고 구원을 말하는 종교는 다 사악한 것이다. 설사 그 종교가 사회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도 영혼을 구원해야 할 종교, 영생을 주어야하는 것이 본질적인 목표인 종교로서는 사악한 것이다. 구원받지도 못한 사람을 안심하게 해서 결국은 지옥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암을 제거하지 않고 살았다고 말하는 의사처럼). 이처럼 인간의 노력과 수단 방법으로는 구원받을수 없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여러분이여.우리가 날마다 눈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이 땅 위의 수많은 사람들의 구원이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모든 영혼들의 구원이다. 도대체가 구원받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는가? 거라사의 광인에게 있던 돼지떼가 귀신들려 비탈을 내려가면서 먹을 것 이야기, 사업 이야기, 연애 이야기, 재미있는 인생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보라. 그것은 비참한 광경이다. 그들은 곧 바다에 몰살하게 된다. 그런데 몰살하기 전 잠깐의 사이에 무언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울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것은 행복한 돼지인가? 그 돼지들 중 두목돼지이든, 더 멋있는 돼지이든, 더 잘 나가는 돼지이든 어쨋는 결론은 똑같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귀신에게서 벗어나는 것이고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다. 곧 뛰어들 바다를 향해 정신없이 달리던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는 것이다. 그 돼지들에게 가장 급한 것은 바로 그 방향의 전환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이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방향을 바꾸라. 자기 멋대로 살던 삶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방향을 바꾸라. 교만하게 살던 삶에서 겸손히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으로 방향을 바꾸라.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기라고 생각하며 살던 삶에서 이제 자기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삶으로 방향을 바꾸라. 당신을 위해 십자가 위해서 물과 피를쏟으신 예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신 예수, 온 몸에 채찍을 맞으사 피투성이 되신 예수, 멸시와 조롱과 침뱉음과 손가락질과 능욕을 받으신 예수, 그 예수님을 여러분의 주님으로 영접하라.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3. 그 희생이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될 때 진정한 감격이 있다.

 

이것을 정말로 믿게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다.

 

1) 바울의 자랑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이다. 십자가는 가장 흉악한 죄인들이 죽임을 당하는 치욕의 형틀이다. 다 큰 어른이 발가벗겨져 군중 앞에 매달리는 치욕이 바로 십자가이다. 바울은 구약에 따라 나무에 달린 자 곧 저주 아래 있는 자가 어찌 메시야일 수 있는가 생각했다. 예수를 이단의 괴수라고 생각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옥에 가두고 때리고 먼 곳의 사람들까지 잡으러 다녔다. 그러던 그가 놀라운 경험을 한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9:1-9. 그가 자기이 박해하던 예수를 직접 만난 것이다. 그는 이제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예수가 저주를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가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예수가 받은 저주는 예수의 죄 때문이 아닌 바로 죄인 된 자신 때문임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야말로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한다. 그런 죄인,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자기의 완고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했던 죄인이 바로 자신이며, 그처럼 죽어 마땅한 죄인을 자신을 살리시려고,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자신을 구원하시려고, 도무지 자격이라고는 없는 자신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그는 이제 저주의 상징 십자가를 싫어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니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2) 여러분은 무엇을 자랑하고 사는가?

 

여러분이 가진 예수의 이름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귀하다. 베드로는 말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예수 이름을 일어나 걸으라".

우리 다른 것 자랑하지 말자. 그것들은 다 썩어 없어질 것들이다. 예수를 자랑하자. 그는 우리를 위한 한 알의 밀 알이 되셨다.

 

3) 이제 우리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더 나아가 우리의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지는 일이다. 땅에 떨어져 죽는 일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를 통하여 많은 구원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여. 여러분 한 사람을 통하여 여러분의 가정이 회복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죽어지는 한 알의 밀 알이 되라.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고, 자신의 것을 희생한다는 것이다.

 

결론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 여러분이여. 성경에는 얼마나 많은 역설의 진리가 있는가?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고 잃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이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러야 하리라" "먼저 된 자 중에 나중되고 나중 된 자 중에 먼저 된 자가 많으리라"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시면서 한알의 밀알에 대한 말씀을 하시기 전에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 말씀은 성경에 나오는 역설의 진리 중에서도 최고봉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께 치욕이 아니었다. 저주가 아니었다. 못마땅하지만 마지못해 하는 무거운 짐이 아니었다. 십자가는 바로 예수님의 영광이었다. 이것은 십자가가 힘들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정말 힘든 것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이 될만큼 그렇게 기도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여 할만하시어든 이 잔을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하고 기도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보셨다. 십자가는 십자가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영광의 부활로 끝나는 것이다. 예수는 부활하심을 말미암아 수 많은 사람들의 부활하게끔 하실 것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비참하게 죽지만 곧 많은 열매를 맺듯이 수 많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우리 또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어나가도록 부르심 받은 것이다.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여러분이여 한 알의 죽어지는 밀 알이 되기를 원하는가? 그러나 이것은 내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절대로 역부족이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직장에서 내가 너무 싱싱하게 살아있는데 어떻게 죽어지는 밀 알이 될 수 있는가?

 

우리 함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자.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하자. 예수를 닮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르짖으라. 아직 덜 죽은 나의 자아가 십자가 앞에 온전히 못 박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이 세상 욕심에 자꾸만 마음 빼앗기는 나를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하자. 이를 위해 기도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성령으로 기름 부어 주실 것이다. 한 알의 죽어지는 밀 알이 되게 하실 것이다.

 

여러분이 한 알의 밀 알이 되어서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수많은 영혼들을 살리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이것을 믿는가? 이 시간 함께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