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에 갇혀 있지 말고 비전 보고 나아가라 창13:14-18(2011. 6. 3. 금요예배 설교)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세상 살아가다 보면 실망할 일이 많다.
사람으로 인한 고통.
꿈의 좌절로 인한 아픔.
육신의 질병으로 인한 힘겨움.
그런데 가만 보면 실망스러운 일들이 사람을 실패자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것에 스스로 갇히는 사람이 실패다가 될 뿐이다.
실험하다가 안 됨.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음. 안 되는 방법을 하나 더 알게 되었다고 함.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함.
다윗은 실망스러운 일을 많이 겪음.
결혼한 미갈과 생이별을 했을 때.
장인인 사울이 죽이려고 할 때.
원수의 땅인 블레셋에 망명을 가야했을 때.
부하들이 단체로 배신할 때.
다 실망스러운 일 아닌가?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이 다윗을 실패자로 만들지 않음. 그런 일을 당할 때 주저앉아버렸다면 실패자가 되었을 것임. 그러나 다윗은 그러기를 거절함.
요셉도 마찬가지임.
구덩이에 던져질 때.
묶여서 끌려갈 때.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술 맡은 관원장이 자기를 2년간이나 까맣게 잊었을 때.
다 실망스러운 일들 아닌가?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요셉을 실패자로 만들지는 않음. 자포자기하고 이젠 끝이라 했다면 실패자가 되었을 것임.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도 실망스러운 상황에 빠져 있음.
1) 조카 롯과의 분쟁.
2) 배은망덕한 롯의 행동.
3) 롯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음.
아버지 없는 롯을 자식 없는 아브라함이 보살핌. 그렇기에 아브라함에게 있어 롯은 더욱 애틋한 존재. 그런데 이제 떠나가 버렸음.
아브라함은 그런 상황을 잘 극복함. 실망으로 인해 실패자가 되지 않음.
사랑하는 여러분. 실망스러운 일이 있어도 실패자는 되지 말라. 실망에 갇혀 살지 말라. 우리는 실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결을 가진 사람들이다.
오늘 설교 제목. 실망에 갇혀 있지 말고 비전 보고 나아가라
어떻게 아브라함을 실망에서 벗어났는가?
1. 잃은 것이 아니라 얻을 것을 바라보라.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 롯이 떠난 후에
롯이 떠난 곳. 소돔과 고모라. 아브라함은 그곳으로 갈 수 없음. 롯에게 약속한 것이 있음.
롯이 간 방향으로 아브라함이 가지 않겠다고 한 것임.
서운할 수 있음.
후회될 수 있음.
그러나 그것만 바라볼 수는 없음.
좋아하던 여자. 다른 사람에게 시집감. 그러면 마음을 비워야 함. 계속 그 여자만 바라보고 있으면 어쩌겠다는 건가? 그 주위 맴돌고. 스토커임.
장사가 잘 됨. 주인이 내놓으라고 함. 그러면 마음 비워야 함. 만날 거기 보면서 맘 상해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임.
시험 떨어진 경우. 자꾸 거기에 미련 둘 게 아님.
인생을 실패자로 만드는 사람들의 특징. 잃은 것을 자꾸 바라보고 묵상함.
그러면 우울해짐. 비참해짐.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됨.
2) 얻을 것을 바라보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잃은 것을 자꾸 바라보지 말고 앞으로 얻을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롯이 간 땅이 아님.
하나님이 앞으로 주실 땅임.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사실 세상은 넓음.
더 많은 것들이 있고 더 많은 기회들이 있음.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지혜임.
시글락이 불타버린 다윗. 자꾸 그곳에 미련 둘 것 없음. 다 타버렸다면 이제 삶의 터전을 다시 찾으면 됨. 실제로 유대로 돌아올 기회가 됨.
3) 바라보는 것이 중요함.
어떤 면을 보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전혀 달라짐.
이미 어려워진 것만 집중하는 사람보다 열려진 공간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힘을 낼 수 있도 일도 해낼 수 있음.
롯이 떠난 후 천막 안에 들어가 천막 안만 바라보고 있다면 마음에 용기와 소망이 생길 수 없음. 그럴 때는 천막 바깥으로 나가야 함. 동쪽 서쪽 남쪽 북쪽의 열려진 공간을 바라보아야 함.
이것이 자기 힘으로 되지는 않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와야 가능함.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
이전에는 지금보다 많이 어두움. 그런 와중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계속 가까이 함. 말씀이 나로 하여금 이전의 초라하고 나약한 모습이 집중하지 않고 새로운 모습을 기대할 수 있게 해줌.
성경을 읽다보면 알게 되는 것.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이 가득함.
가난한 판잣집. 병든 몸. 여러 가지 열악한 환경. 그런 것을 주목하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주목할 수 있었음.
믿는 자들에게는...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바라보는 것이 생김. 말씀 전하는 삶.
말씀 선포엔 역사가 나타나야 하는데.../안희환
Geoff Bullock이 작사 작곡한 [주를 향한 나의 사랑]이란 찬양이 있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찬양입니다. “주를 향한 나의 사랑을 주께 고백하게 하소서. 아름다운 주의 그늘 아래 살며 주를 보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 선포 될 때에 땅과 하늘 진동하리니. 나의 사랑 고백하리라 나의 구주 나의 친구”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정말 가슴 깊이 와 닿습니다.
그 중에 특히 제가 좋아하는 대목이 있는데 “주님의 말씀 선포 될 때에 땅과 하늘 진동하리니”라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대할 때면 가슴에 불이 붙습니다. 맞다, 정말 그렇다, 주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는 땅만이 아니라 하늘도 진동해야 정상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로 애끓는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이시여. 말씀이 선포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옵소서.”아마 이 기도를 평생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회중 가운데 밝히 드러내는 설교자들을 너무나도 존경합니다. 교부들 중 요하네스는 설교를 하도 잘해 “황금의 입(크리소스톰)”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황후 유독시아를 행해서도 두려움 없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한 그 분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졌었습니다. 그런 설교를 바로 앞에서 들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영광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중세의 세례 요한이라 일컬어지는 사보나롤라 역시 제 영감의 원천입니다. 설교자들의 설교에도 텅 비는 예배당의 모습이 당시의 현실인데 사보나롤라가 설교할 때는 창살에 매달려서까지 설교를 들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렇게 설교를 하다가 주님 품에 갈 수 있다면 그 어떤 대가라도 지불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고 기도가 일상적인 것이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휘트필드가 설교할 때면 남녀노소 구분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통회 자복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 분의 설교는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가 아니라 가슴을 찢게 하는 설교였습니다. 광부들 앞에서 설교하면 새까맣게 석탄가루를 덮어쓴 광부들 얼굴에 줄무늬가 생겼습니다. 눈물이 지나간 자리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와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 속에서 그런 설교가 나온 것이겠지요.
저는 앞에서 언급한 크리소스톰, 사보나롤라, 휘트필드의 발뒤꿈치에도 못 미치는 사람입니다. 정말 그 백분의 일만큼만 따라가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하도 능력 있는 설교를 하고 싶어 안달복달을 하니 하나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설교 가운데 기름 부어 주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을 질리게 했던 과부처럼 매달리고 또 매달린 게 효과를 보았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아래는 장춘 지저스 아미 집회에 갔을 때 만났던 분들의 고백입니다.
집회가 시작되자 첫 순서를 맡은 안희환 목사님의 말씀은 나를 비롯해 우리 모두를 매료시켰다. 목사님의 기름 부으심 넘치는 메시지와 탁월한 사역의 실제와 삶은 우리 모두에게 강한 도전을 주었다. 울고 웃으며 말씀 속에서 우리 모두는 기도하게 되었다. 어떤 이는 기도하다가 성령의 불이 임했다...
첫 집회를 마친 뒤 입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다. 대낮에도 수업을 빼먹고 은혜받기 위해 몰려왔다. 우리교회 사정상 낮 집회를 하기에는 역부족이라 보였는데도 자석처럼 끌리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목사님 제가 참석해본 집회 가운데 가장 큰 은혜가 있었어요.”
장춘 온누리 교회 담임 김상수 목사님의 글(지저스아미 5월호에서 발췌).
7년의 유학생활 중 5년은 장춘 온누리교회 음향 엔지니어로 섬기면서 많은 집회와 예배를 참여했다...평소 예배와 다름없이 찬양이 시작되고 나는 뒤에서 음향을 조정하면서 예배에 참여했다. 안희환 목사님의 설교 후에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조명을 끄고 방송실에서 성도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기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람들이 없는 곳에 자리를 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세사이 감당치 못할 믿음 달라는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눈물만 하염없이 쏟아졌다.
당시 제 정신이 아니었기에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하겠는데, 내 몸을 내가 컨트롤 할 수 없었다. 숨 쉬는 것조차 맘대로 할 수 없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이 울어본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무언가가 내 안에 있는 것 같았다. 팔다리가 저리고 온 몸이 감전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장춘 온누리교회 음향 엔지니어 김준하 형제의 글(지저스아미 5월호에서 발췌).
양이나 치던 모세의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주머니 속에 숨어 있던 다윗의 돌멩이 따위로 용장 골리앗을 무너뜨리신 하나님께서 마른 막대기 같은 사람을 사용해주시는 것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해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정말 땅과 하늘을 진동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다면 더 아파도 좋겠습니다(지금도 자주 아프지만). 더 가난해져도 좋겠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나고, 뜨뜻미지근한 사람들이 성령의 불이 붙으며, 세상에 매여 살던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로 변화케 하는 설교를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포기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소서.
지금도 하고 있는 것. 내게 잃은 것을 보지 않음. 내가 얻을 것을 바라봄. 엄청난 것들이 있음.
2. 지금의 모습이 아닌 미래를 생각하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 지금 아브라함의 처지
땅이 없음. 그렇기에 좋은 것을 먼저 선택한 롯이 야속할 수 있음.
자손도 없음. 그렇기에 아들같이 여긴 롯이 떠난 것이 큰 충격일 수 있음
현재는 참 별 것 없음.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입을 아브라함. 그러나 정작 그의 처지는 딱하기만 함.
이럴 때 마음이 상함. 우울해짐. 만사가 귀찮아짐. 그냥 다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듦.
2) 미래에 주시는 것들.
그러나 그런 것에 굴복해서는 안 됨. 현재의 자기 모습만 볼 것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함.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미래.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자손과 땅.
실제로 아브라함은 후에 그 모든 것을 얻게 됨.
포기했다면 얻지 못했을 것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미래를 바라보았어야 함. 가나안.
그들이 바라본 것은? 애굽. 과거임.
그들이 바라본 것은? 광야. 현재임.
여기에서 나오는 것. 불평, 원망, 짜증, 두려움, 불안. 후에는 자포자기와 절망.
미래를 바라본 여호수아와 갈렙. 소망과 담대함이 있음.
3) 미래를 바라보라.
가난한 살림살이. 늘어나는 빚.
헤매는 자녀들. 속 썩이는 남편.
많이 망가져버린 몸. 지쳐버린 마음과 정신.
깨어진 관계들. 내가 나를 봐도 초라한 모습.
아직도 속에 남아있는 상처의 흔적들.
그것을 보면 주저앉는다. 확실하게 무너진다. 그런 것 묵상하지 말라. 점점 커진다.
미래를 바라보라.
베드로의 현실. 물에 빠짐. 실수함. 부인함. 말고의 귀나 자름. 그러나 그에게 있는 가능성. 예수님의 말씀. 반석. 미래에 베드로는 그렇게 됨.
기드온의 현실. 두려움. 불안. 소심함. 밀을 포두주 틀에서. 집안에 있는 우상.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가 그의 미래를 말씀하심. 큰 용사여. 기드온은 후에 그렇게 됨.
나는 늘 미래를 꿈꾼다.
건축된 지금의 교회.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을 지금도 바라보고 있음. 결국은 그대로 될 것임.
현실만 보는 사람. 빈 자리만 눈에 들어올 것임. 이런저런 약점들만 눈에 들어올 것임.
이전 지하교회. 그때 물 보지 않음. 쥐 보지 않음. 그때도 미래를 봄. 꿈과 비전. 그리고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예배당과 많은 성도들.
혼자 고군분투할 때 초라한 모습. 그것만 보지 않음. 미래를 봄.
지금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바라보는 대로 되게 하심.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3. 멈추지 말고 목표 향해 나아가라.
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1) 머물러 있으면 안 됨.
보기만 하라고 하지 않으심.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믿음으로 땅을 밟는 것임.
현재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일. 그 일을 하는 것임.
2)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됨.
너는 일어나
일어나야 함. 일어나야 종과 횡으로 걸을 수 있지 않은가? 바닥이 앉아서는 못 움직인다.
자기 힘으로 못 일어나면 그조차도 힘을 구하면 됨.
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사60장.
주님은 일으키실 수 있음.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요5장.
3)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지하교회 때 전도지 들고 돌아다님. 아파트 꼭대기에서 아래로. 미쳐지기도 함.
자동차마다 전도지 꽂아놓음. 경비에게 걸림. 다 뺌.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임.
저녁 기도회.
부교역자 없을 때 직접 교회학교 하는 것임. 전도함. 놀아줌. 얼음땡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아내는 떡뽁기. 그래서 30여명의 아이들. 수련회. 열심히 설교하고 기도. 울며불며 기도함.
멍하니 있는 게 아님.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됨.
김홍도 목사님. 시골 교회. 할 수 있는 것. 성경, 읽고 또 읽고. 능력이 나타남.
족구만 하고 다녔다면?
우울하다고 틀어박혀 있는 사람. 그럼 인생 끝임. 움직여야 함.
산책을 하든지 등산을 가든지 달리기를 하든지.
시간 남는 청년들 나는 뭔가 고민할 시간에 죽어라 책이라도 읽으면 그게 실력임.
절망할 시간에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사람은 멋지게 살아갈 수 있음.
어떤 분의 글. 아내 때문에 탄식을 하는 어떤 남자에게 쓴 글.
원래 천성이 게으른 것도 있겠지만, 그런 아내의 심리는 아마도..
무기력하고 재미없고, 아이 보고 하루 왠 종일 똑같이 흘러가는 시간...
어짜피 치워도 다시 더러워질 냉장고.. 쯤이야 매일 똑같은 일상에 일과겠죠..
가계부 적고자하는 의욕.. 그 작은 희망의 움직임 조차 의미 없이...
아내는 지금 시간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일상의 무미건조함에 그냥 시간을 흘려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저는 결혼 생활 11년이 넘어가면서 딱 한 가지 배운게 있는데요..
그게... 상대를 바꾸려고 하는 순간, 결혼의 평정심도 깨진다는 것입니다.
상대를 위해, 혹은 우리 가정을 위해..라는 이유로 아내를 바꾸고자 그 어떤 노력을 해도..
사람은 절대.. 쉽게.. 바뀌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관계만 악화 시키고 님의 홧병만 키워질 뿐이에요..
아이러니하게도..
반대 입장을 들어본다면 아내의 입장에서는 님이 변해야할 대상이라는 겁니다.
남편은 아내가, 아내는 남편이... 서로가 변해주길 바라다.. 끝나겠죠..
제 경험담은 아니지만, 오히려 반대 방법으로 상대를 고쳐본 경우는 봤습니다.
매일 술마시고 늦게 들어오고 가정에 소홀한 남편을 고쳐보고자,
수없이 말해보고, 달래보고, 화도 내보고 별 짓 다해보다 이혼의 위기까지 갔었는데..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가정상담사의 조언을 듣고 이렇게 해보았다합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남편에게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이상으로 잘해줬다고 하네요.
처음에는 이를 악물고, 정말 속에서 주먹이 올라는 것을 참고^^
술먹고 늦게 들어오면 새벽 한 시에라도 일어나서 해장국을 끓여주고,
매일 아침 진수성찬을 차려 남편의 기를 살려주고, 술 안주 요리를 해서 남편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술상을 차려주고....^^; 남편을 볼 때마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사랑한다고 말해줬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 남편이 아내를 변태 보듯 ^^ 쳐다봤고 하네요..
그 아내는 정말 눈물로 1년을 그렇게 미친듯이 해봤다고 합니다.
중간에 그래도 잘 변하지 않는 남편을 보고 그냥 엎을까 했던 마음을 수 천번 먹으면서..
내색 안고 그저 잘해줬다고 합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결과가 너무 뻔히 보이죠...?
그 남편... 집에만 붙어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아내 곁에만 있으려고 합니다.
외출도 꼭 아내를 동석 시킵니다.
정말 같이 부부 모임이라도 갖으면, 그들의 애정 행각에 다들 식사 못합니다.
토 나오는 부부.. 일명 토부부라고 불러요..ㅡㅡ;;
물론 한 예에 불과하지만...
님의 글을 읽다보면서... 답 없는 정답에 씨름하고 있을 님이 안타까워 몇자 남깁니다..
^^
어떤 말기 암환자 아내가 한 말이 기억나네요...
남편이 건강할 때 왜 몰랐는지... 그냥 옆에만 있어줘도 행복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소원이.. 남편이 그냥 지금 이대로만이라도 곁에 있어줬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 많이 하시고.. 행복하게 사세요~~ ^^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지 않은가? 언급한 여인보다 못할 게 뭐가 있는가?
만약 이혼을 했다면? 그럼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찾아보라. 도전하라. 시도하라.
결론
심령이 살아난 아브라함. 뭐가 살겠는가? 예배.
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예배가 살면 다시 삶이 살아남. 선순환.
1. 잃은 것이 아니라 얻을 것을 바라보라. 잃은 것 자꾸 생각해봐야 마음만 상한다.
2. 지금의 모습이 아닌 미래를 생각하라. 하나님 안에서 가능성은 늘 열려있다.
3. 멈추지 말고 목표 향해 나아가라. 움직이라. 멍하니 있지 말고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라.
오늘 설교 제목. 실망에 갇혀 있지 말고 비전 보고 나아가라
'안희환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도의 지경을 넓혀라 딤전2:1-4(2011. 6. 19. 주일오전예배 설교) (0) | 2011.06.19 |
---|---|
기도의 지경을 넓혀라 딤전2:1-4(2011. 6. 19. 주일오전예배 설교) (0) | 2011.06.19 |
목회자와 성도는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2) 엡6:19-20 (2011. 6. 12. 주일오전예배 설교) (0) | 2011.06.12 |
목회자와 성도는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엡6:19-20 (2011. 6. 5. 주일오전예배 설교) (0) | 2011.06.05 |
부모를 순종하여 받드신 예수님 눅2:41-52(2011. 5. 29. 주일오전예배 설교) (0) | 2011.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