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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 땅에 흘린 피/ 김영권

안희환2 2010. 1. 11. 11:17

이국 땅에 흘린 피/ 김영권


저녁 7시쯤 되었을까. 감방문 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간수가 나더러 나오라고 한다. 웬일일까. 저녁에는 찾을 수 없는데 …. 나가보니 웬 낯선 조선인 한 명과 러시아인 한 명, 그리고 감옥소 경찰 두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낯선 조선 사람이 조선말로 나에게 물었다.

『앉으시오. 북조선공민 김영권지요?』

말투를 보니 조선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 그래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하바로프스크 경찰서 상급 지도원 김와실리요, 내가 당신을 호송하려고 왔소.』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긴 축인데 말투는 건방지고 어딘가 모르게 틀을 차리는 것 같았다. 나는 어디서 그를 본 기억이 났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하바로프스크 체크도민 러시아 경찰서 수사과 책임지도원이었다. 그는 사할린에서 태어난 조선인 교포다. 들리는 말이 그의 부모들은 남조선 출신이라고 한다. 그는 체크도민 경찰서에서 근무하면서 북조선 안전부 사업을 잘 도와주고 있었고 그들에게서 선물도 받고 명절 때면 초청도 받는다는 말들이, 많이 돌아 벌목장 우리 노동자들은 은근히 그를 피하였다.

바로 그러한 사람이 나를 데리러 온 것이다.

『나를 언제 호송하게 됩니까?』
『내일 아침 7시 비행기로 가게 되었어요.』
『그럼 당신에게 두 가지 요구 조건을 제기하겠는데 들어 주시겠습니까?』
『뭐요?』
『첫째는 오늘 저녁에 마야를 만나는 것이고, 둘째는 여기 경찰들에게 내가 법에 어긋나는 아무러한 죄도 없다는 것을 당신이 법관으로서 증인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잡혀가면 끝인데 그런 게 필요 있어? 그리고 나는 좀 자야겠어.』

나는 그의 거만한 태도에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아 참기 어려웠다.

『당신이 만약 그 요구 조건을 들어 주지 않으면 나를 순조롭게 데리고 가기가 힘들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는 나를 한참 쏘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순조롭지 못하면 어쩔 셈이야.』
『뛰던가, 아니면 최후 발악이라도 해야지요.』
『흥, 총으로 쏘면 어떻게 된다는 걸 알아?』
『알지요, 내가 바라던대로 되지요.』

그러자 그는 나를 무사히 데리고 가는 것이 자기 임무라고 생각했던지 얼르기 시작했다.

『김선생은 그런 생각을 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살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야 해요. 방법은 있지요. 당신이 러시아법을 위반한 것으로 하고 러시아 재판을 받고 러시아 감옥으로 가면 되지요.』

그의 말이 맞았다. 북조선 벌목장에서 그러한 사건이 몇 번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야에 대하여 상세히 이야기하고 카자흐스탄 경찰들이 나를 큰 죄인으로 생각하는데 그들에게 옳은 인식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감옥소 경찰들도 역시 나에 대하여 알고 싶었던지 그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그들은 나에게 아무 죄도 없다는 것을 알고 모두가 아깝다고 혀를 차고 나와 마야를 두고 사랑을 주제로 한 인도 영화의 주인공처럼 묘사하면서 떠나기 전에 마야를 만나게 하자고 하였다.

이렇게되자 김와실리는 자기가 직접 마야를 데려오겠다고 나갔고 나는 감방으로 돌아와 소지품을 정리하고 칼을 몸에 깊숙이 감추었다. 그 칼은 나와 한 감방에 있던 러시아인이 흘레브(러시아 빵), 칼바스(러시아소시지)를 썰어 먹으려고 몰래 가지고 들어온 것인데 내가 감추어 두었던 것이다. 나는 그 칼을 거의 한달 동안 몸에 깊숙이 감추고 있었고 그 러시아인은 칼이 없어진 것으로 하여 은근히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경찰들이 그가 칼을 가지고 감방에 들어 왔다는 것을 알면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그 칼을 다시 꺼내어 만지고 또 만졌다. (내가 혹시 실수하면 어쩌나…. 대담해야 해. 북조선으로 절대로 끌려가면 안 돼. 두 손으로 힘껏 찌르고 위로 쭉 올려 째야 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간수가 와서 소지품을 다 준비해 가지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아침에 떠나는데 왜 벌써 다 준비하고 나 가느냐고 하자 그는 나와 마야를 생각해서 아침까지 사무실 한 칸을 내줄테니 마야와 같이 있으라는 것이었다.

면회실에 들어서자 기다리던 마야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소리내며 울었다. 나는 쾌활하게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아니 잡혀가면 죽는다면서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어요.』
『운다고 풀릴 문제도 아닌데 같은 값이면 분홍치마라고 우는 것보다 웃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러자 마야는 정색해 가지고 모스크바 남조선 대사관에 연락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나는 맥없이 고개를 저었다.
어느덧 아침 6시가 되었다. 경찰들이 와서 시간이 되었으니 비행장으로 나가자고 하였다. 드디어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김와실리가 나에게 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마야가 가슴 아파할 것 같아 수갑은 채우지 않겠는데 비행장까지 조용히 나갑시다.』

우리는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왔다. 1층으로 내려서면서 곧 바로 나가면 현관 출입문이고 양옆으로 긴 복도로 되어 있다. 현관 출입문 앞에는 호송차가 발동을 걸어 놓은 채 세워져 있었다. 나는 1층에 내려서면서 현관 출입문으로가 아니라 옆으로 돌아서 복도로 뚜벅뚜벅 걸었다.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것을 경찰들도 알았던지 부러 말리지 않았다.
약 3~4m 복도를 따라 걸었다. 나는 칼을 뽑아 들었다. 하나- 두울- 세엣! 실패다. 온 몸에 식은땀이 쭉 내뱄다. 뒤에서 김와실리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김 선생, 이젠 시간이 되었어요. 늦으면 비행기를 못 타요. 그만하고 나갑시다.』

나는 그냥 복도를 따라 걸었다. 다시 한 번, 하나- 둘 - 셋! 아 또 실수다. 내가 왜 이럴까. 눈을 딱 감았다. 다시 한 번, 하나- 두울- 셋! 제기랄 또 실수다. 이상한 생각 이 들었던지 김와실리가 급히 따라왔다. 바로 등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손이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순간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흠칫 놀라며 악- 하고 소리쳤다.
퍽- 칼이 뱃가죽을 뚫고 들이 박혔다. 그 순간 또 다시 그 무엇에 놀란 것처럼 아-악 하며 칼을 위로 쭉 올려 당겼다. 어느 정도 뱃가죽이 찢어지면서 칼이 쭉 빠져 나왔다. 비틀거 리다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예상 못 했던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경찰들의 다급한 외침소리가 들렸다. 마야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나에게로 다가오다가 내 손에 쥐여져 있는 피묻은 칼을 보더니 악 소리치며 쓰러진 내 위에 푹 고꾸라졌다. 나는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마야를 흔들었다.

『마야, 마야, 아니, 왜 이래.』

마야는 정신이 좀 들었던지 급히 내 몸을 여기저기 만져보며 물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짓을 했어요. 빨리 말해요. 예, 빨리.』

나는 마야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마야, 고마워.』

너무도 당황한 경찰들은 어쩔바를 모르고 온통 뛰어다닌다.
나는 김와실리를 찾았다.
구급차를 부르려고 달려갔던 김와실리가 급히 달려왔다.

『김와실리, 미안해요. 나는 아무래도 갈 것 같지 못해요. 후 - 그러니 돌아가면 김일성에게- 내- 인사를 전해주세요. 그리고 내가 김일성이 죽으면 한 달 동안 큰 잔치를 차리고 싶어했다고 전해주세요.』

나는 그를 보며 더없이 만족한 사람처럼 웃음을 지었다. 이상하게도 생각했던 바와 같이 아프지 않았고 다만 잠자고 싶었다. 구급차가 달려왔고 나는 경찰들과 마야, 의사들과 함께 담가(들것)에 실려 구급차에 태워졌다. 차가 한참 달릴 때 나는 잠들어 버렸다. 누군가 자꾸 흔들어 깨운다. 갑자기 콧마루가 찡해지며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화가 났다. (이것들은 왜 자지 못하게 할까.) 자지 못하게 알코올 솜뭉치를 코에 가져다 댄 것 같았다. 차가 멈춰서고 나는 담가에 실려 내리면서 잠들어 버렸다. 꿈을 꾸었다. 나는 그때 그 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참으로 재미있는 꿈이었다. 처음 내가 탈출하였을 때 하바로프스크에서 나를 도와준 할머니의 집에서 한국방송공사에서 보내온 책을 보았는데 그 내용이 꿈속에 나타났다. 그 책은 미국의 의학박사가 쓴 책을 국문으로 번역한 것인데 사람이 육체에서 영혼으로, 영혼에서 다시 육체로 돌아오는 내용이다. 내 꿈속에 나타난 것은 심장마비를 일으킨 사람이 영혼에서 아무런 장애도, 구속도 받지 않고 공중으로 떠다니다 자기를 치료하는 의사들을 내려다보고 웃고 있었다는 책의 내용이었다.

『기분이 참 좋은데. 저 사람들은 바로 그 책에서처럼 수술하고 치료를 하는 거야. 야! 좋구나. 내가 이렇게 좋아하다 죽지 않을까. 응, 그래. 알만해. 책에서 죽은 사람이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곳으로 날아다녔다고 했지. 나도 그렇게 안될까?』

나는 그때 꿈속에서 본 책의 내용이 참으로 재미있었다. 꿈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온 천지가 캄캄해지면서 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정신을 차린 후에 울고 있는 마야에게 처음으로 한 꿈 이야기였다. 그럼 내가 왜, 무엇 때문에 할복이라는 끔찍한 짓을 하게 되었는지 한 번 돌이켜 보기로 하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