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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결소에서 유아살해를 목격" - 박순자

안희환2 2010. 1. 9. 12:24

"집결소에서 유아살해를 목격" - 박순자

박순자(가명) : 만29세, 북한 회령, 신의주 집결소 경험자, 2002년 3월 입국

저는 1977년 3월, 북한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공장직원이었고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주부였습니다. 나는 외동딸이었으며 2년제 전문대학교를 졸업하고 무기공급업체에서 재고조사 점원으로 2년간 일하였습니다.

첫 탈북, 중국경찰에게 체포당함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으로 처음에는 한달 식량을 보름치를 주다가, 그다음은 일주일, 그 다음은...으로 이어지다 김일성 사망 이후 식량배급이 끊어져 온 가족이 굶주리게 되자 산과 들로 먹을 것을 찾아 헤매이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굶주림을 참기 어려워져 1998년 3월 나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처음 탈북 할 때에는 중국에서 2년간 돈을 벌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돕고 함께 살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숨어산 지 2년이 지난 후 2000년3월 말, 중국의 대련에서 중국 공안에 체포당했습니다.
나는 중국감옥에서 무엇 때문에 중국으로 넘어왔는지, 누가 도왔는지 등을 계속적으로 심하게 심문을 받으며 1개월을 보낸 뒤, 2000년 4월말에 다른 여섯 명의 탈북자들과 함께 단동을 통해 북한으로 송환되었습니다.

저는 북한의 신의주 국가안전보위부로 끌려가 보니 30~40명의 죄수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중국에서 송환되어 온 탈북자들이었습니다.
그 중 모든 여성들은 항문과 질 안에 숨겨둔 돈이 있는 지 확인하려는 명목 하에 강제로 완전히 옷을 벗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손을 위로하고 앉았다 일어났다는 반복적으로 시키고, 뛰게도 합니다.
우리들에게 가해지는 것은 막대기, 주먹질, 발차기로 인한 극심한 구타는 기본적으로 행하는 것이었고, 감방 안은 습습하며 이는 물론이고 곤충, 파리, 벼룩 등 여러 기생충으로 가득했습니다. 온몸을 뜯기어 참기 어려운 지경이었습니다.
식사는 아주 적은 양의 음식을 주었는데 딱딱한 옥수수에 데친 채소 몇 조각이 전부였기에 우리는 끔찍하게 굶주린 상태였습니다.

신의주 도집결소에서 벌어진 일

일주일이나 지나고서야 나의 정치적 범죄가 지워졌고, 2000년 5월 7일 지방경찰 관할의 신의주 도집결소로 보내어졌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두 달간 60~70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살던 곳으로 보내지기까지 기다렸습니다. 계호원들은 우리들에게 발로 차는 등의 구타는 날마다 이뤄졌습니다.
집결소의 시설들은 너무도 열악하여 셀 수도 없는 이와 벼룩 등으로 가득 차있어 혐오스러웠습니다.
우리는 수용소 밖에 있는 곳에서 집짓는 노동을 했고, 나는 계속적으로 삽만을 이용한 채 트럭에 모래를 가득 채워야만 했습니다.
나 자신이 굶어 죽어가는 것 같은데 힘든 농사일을 강제로 했어야 했기에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내가 집결소에 있을 당시 10명 정도의 임산부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청진에서 온 한 젊은 여성은 키가 크고 힘이 셌는데 산일이 얼마 남지 않았었습니다.
또 한 명의 여인은 5개월째였고, 그 외 임산부들은 3개월이나 4개월째였습니다.
내가 도착한 지 삼 사 일되던 날에, 나는 산일이 얼마 남지 않은 여성과 그 외 5명의 임산부들을 도와서 밖에 있는 경찰병원으로 데려가는 일을 맡았습니다.
산일이 얼마 안 남은 여성은 병원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자 아이를 낳았습니다.
커튼 사이로 어머니와 아이 둘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조금 열린 커튼 사이로 간호사가 테이블 위의 젖은 물수건으로 아이의 얼굴을 덮은 채 숨을 못 쉬게 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아기는 10분쯤 되자 울음을 멈췄습니다.
다른 임산부들에게 두꺼운 바늘주사를 놓는 것도 보았습니다.
나는 거기서 두 세 시간 정도 있다가, 방금 분만을 한 임산부를 데리고 수용소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 산모는 이틀간 쉬고, 다시 다른 죄수들과 똑 같은 고생스러운 노동을 했어야 했습니다.
후에 다른 산모들이 내게 말하기를 그들이 모두 강제로 낙태수술을 했다고 했습니다.
수용소의 죄수들 모두, 산모들이 낳은 아기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가차 없이 죽임을 당했고, 천 조각으로 싸인 채 근방의 동산에 묻혀졌다고 믿었습니다.

두 번째 탈북과 체포 그리고 한국으로

나는 너무 굶주렸고 약해져 있어 곧 죽을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두 달간 집결소 생활을 마치고 2000년 7월 초에 풀려나 7일 만에 혼자 집으로 갔다.
집에서 3일정도 지내면서 몸을 돌보다가 북한에서 더 이상 살기가 힘들다고 느껴 200년 7월 15일에 두 번째로 두만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다시 2001년 4월 27일에 대련에서 중국공안에게 잡혔습니다.
그들은 나를 알아보고 다시 체포되면 6개월간 가둘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만큼 나를 계속 구금해라.
나를 계속 잡고 가두고 북한으로 송환을 하더라도 북한을 10번이고 20번이고 도망 나올 것이다!"고 소리쳤습니다.
나는 다시 2001년 7월에 북한으로 송환되었습니다.
예전과 똑같이 7일간 심문을 당했고, 다시 중국에서 잡혀온다면 완전히 감옥에 갇힐 것이라고 협박을 당했습니다.
나는 다시 내가 살던 곳인 회령 안전보위부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10일간 또 다시 심문을 당했으며 근처 경찰서로 보내졌습니다.
5일 후 다시 풀려났지만 항상 감시를 당했습니다.
그들이 다시 와서 나를 체포하는 악몽이 나를 낮과 밤으로 괴롭혀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한 달간 내가 한 일은 그저 산에서 야생 버섯을 채취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2001년 10월 3일, 세 번째 탈북에 성공했고 중국에서 좋은 분을 만나 2002년 3월 14일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