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배신한 사람/ 안희환
손자를 키우시는 할머니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저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할머니가 저를 먹여주시고 키워주신 것입니다. 워낙 어린 시절의 일이기 때문에 다양한 것을 다 기억할 수는 없어도 할머니가 저를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하셨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누가 저처럼 사랑을 많이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한번은 제가 화장실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수세식 화장실이 아니고 재래식 화장실이었습니다. 더구나 두 발판이 나무를 반으로 자른 후 납작한 부분을 바닥으로 해서 고정시켜 놓은 것이었기에 발로 밟는 부분이 미끄러웠습니다. 그 미끄러운 부분에 물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린 저는 화장실 안쪽으로 미끄러져 떨어졌고 온 몸은 똥으로 덮여버렸습니다.
저를 씻겨주신 분은 할머니셨는데 할머니는 단 한 번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으셨습니다. 왜 조심하지 않았느냐고 책망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정성스럽게 비누칠을 해주시면서 저를 깨끗하게 씻어주셨습니다. 다른 것들보다 그 기억이 뚜렷한 것을 보면 저에게 상당히 인상적인 사건이었던 모양입니다.
손자와 떨어지신 할머니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저는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 경기도 시흥군 소하읍 소하 5리 500번지의 판자촌이었습니다. 300여 세대가 살았는데 개별적인 주소가 부여되지 않아서 모든 집 주소가 다 500번지였습니다. 덕분에 우편배달부 아저씨는 각 사람의 이름을 외워야 했습니다. 주소만으로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으니까요.
할머니와 떨어져 지내던 저는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저에게는 동생이 세 명 있었는데 그 동생들이 순순히 저를 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도 낯설게 느껴졌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부모님과도 익숙해지고 동생들 역시 저를 형으로 인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같은 동네 아이들과도 친해지기 시작했고요.
그러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그라지지는 않았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먹고 마시고 잠을 자고 이야기하던 시간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릅니다. 특별히 몸이 아픈 날에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할머니를 불렀습니다. 할머니가 오셔서 머리에 손을 대고 기도해주시면 아픈 것이 깨끗하게 나을 것만 같았습니다.
남의 집 파출부가 되신 할머니
중학생이 되었을 때 저는 교통사고를 크게 당했습니다.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때 많이 우셨습니다. 수도꼭지가 고장 나기라도 한 듯 울고 또 우셨습니다. 너무 긴 시간을 입원해 있었기 때문에 저는 학교를 일 년 쉴 수밖에 없었고 퇴원한 후에도 자주 아파서 고생을 했습니다. 회복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무렵 할머니는 서울의 한 부잣집에서 파출부로 일하셨습니다. 판자촌에 사는 우리 집 수준에서 볼 때 할머니의 수입이 무척 많아 보였습니다. 가난에 찌들어 있던 우리 가족을 위해 할머니는 여러모로 도움을 주셨는데 그 무렵의 저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쩌다가 할머니가 집에 오시면 반가워했을 뿐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 할머니로부터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무척 쓸쓸하고 외로웠다고 하셨습니다. 몸이 힘들고 고달플 때도 남의 집에서 외롭게 견뎌야 했던 것입니다. 부모님이 저를 데리고 할머니가 파출부로 일하시는 곳 근처까지 데리고 가신 적이 있는데 집안으로는 데리고 가지 않으셨습니다.
손자와 다시 살게 된 할머니
제가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면서 할머니와 같이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판자촌에서 직접 학교까지 통학하기가 어려웠기에 산비탈에 있는 방 한 칸짜리 집을 겨우 얻어 할머니와 둘이 살게 된 것입니다. 할머니는 그때 무척 기뻐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손자와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당시의 저는 할머니에 대한 이전의 마음이 많이 사그라진 때였습니다. 중학교 시절을 지내고 고등학교에 들어간 저의 관심 속에 할머니는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 학교생활과 친구들이 제 관심의 주요한 대상이었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는 친구들과 떠드는 것이 더 좋았고 할머니의 충고는 잔소리로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저와 할머니의 친밀함은 점점 깨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할머니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못했고 툭하면 짜증을 내곤 했습니다. 집에 있는 시간보다는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았고 할머니와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손자와 함께 살게 되었는데 막상 함께 살면서 손자로부터 외면을 당했으니 할머니의 마음은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부모님 집에 남겨지신 할머니
제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다시 할머니와 떨어져 있게 되었습니다. 기숙사 생활과 자취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연세가 많아지시고 기운도 없어지신 할머니는 남의 집에 파출부 생활을 하실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고 고향으로 내려가실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부모님이 사시는 판잣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가끔 집에 들르는 저는 할머니에게 따듯하게 대해드리지 못했습니다. 부모님들이나 동생들과 달리 할머니에게 거리감이 느껴졌습니다. 이전에 그토록 그리워하던 할머니의 존재가 왜 제 속에서 그렇게 희미해져버렸는지 모릅니다. 할머니는 점점 나이가 많아지시고 기운도 없어지시는데 손자는 점점 멀어져 가니 속상하셨을 것입니다.
주변의 어른들로부터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 했습니다. 할머니는 저밖에 모르신다는 것입니다. 입만 여시면 제 이야기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주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듣기 싫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할머니가 저에 대한 미련을 끊고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여겨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약해지신 할머니
세월이 많이 흘러갔습니다. 저는 이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불혹의 나이도 지났습니다. 그런 만큼 할머니 역시 연세가 더 많아지셨습니다. 이제 87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할머니를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애틋함도 아니고 학생이나 청년 시절의 귀찮음도 아닌 뭔가 모르게 서글프고 아픈 마음이 듭니다.
할머니는 잘 걷지 못하십니다. 아예 걷지 못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겨우 외출을 하시며 천천히, 정말 천천히 걸으십니다. 관절염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숨을 쉬실 때 편한 숨이 아니라 힙겹게 숨을 쉬십니다. 전화 통화를 할 때조차 거친 숨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옵니다. 소화기능도 약해지셨기 때문에 음식을 잘 드시지 못합니다. 할머니의 몸이 점점 마르고 있습니다.
요즘은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서 할머니에게 들립니다. 여전히 저를 보면 반가워하시고 뭔가 해주시고 싶어서 애를 쓰시는 할머니를 뵐 때마다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중에도 눈물이 맺힙니다. 아무리 내리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불효막심한 손자를 향한 할머니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판자촌을 떠나신 할머니
할머니는 이제 판자촌에 사시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형편이 좋아지셔서 넓은 아파트로 이사하셨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장사를 하시기 때문에 할머니는 그 넓은 아파트를 홀로 지키시는 시간이 많습니다. 저는 뒤늦게라도 조금씩 용돈을 드리지만 그것을 쓰러 다니시지도 못합니다. 그 돈 모았다가 증손주들에게 주실 뿐입니다.
할머니는 제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더 좋아하십니다. 당신이 정성 다해 키운 손자가 이제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 것을 보시면 마음이 뿌듯해지시는 모양입니다. 저를 보실 때마다 오랜 세월 지켜보았던 저의 모습, 특히 어린 시절의 모습이 떠오르시는지 그 눈빛이 따스합니다. 참으로 많은 생각을 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할머니.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눈물이 흐릅니다. 진즉에 할머니의 사랑과 마음을 깨달았다면 좋았을 것을. 할머니. 사랑합니다. 정말 사랑합니다. 사실 사랑한다는 표현을 입술로 해드리고 싶은데 쉽지가 않습니다. 어색하니까요. 민망하니까요. 할머니. 존경합니다. 정말 존경합니다. 긴 세월 변치 않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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