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명의 아내가 있는데 / 안희환
제게는 딱 한 명의 아내가 있습니다. 열 여자 마다할 남자 없다는 말도 있지만 그건 뭘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하나도 감당하기 벅찬데 열 여자 데리고 살려다가는 제명에 못 죽습니다. 상전을 열 명이나 두고 어떻게 평생을 살아가겠습니까? 아이들이 생기고 그 아이들이 커가면서 여자의 파워가 남자를 능가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요즘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있을 때 잘하라고 했는데 그 말을 실천하기 위해 저는 요즘도 불철주야로 수고하고 있습니다. 워낙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라 현 시대 젊은 사람들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조금씩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보면 때로 낯설게만 여겨집니다. 그래도 아내는 종종 저를 보고 말합니다. “저렇게 아내를 아껴주는 모습이 안 보여요?”. 하여간 철부지같은 애처가들 때문에 제가 고생을 하는 중입니다.
오늘은 아내의 생일입니다. 아침에 아내에게 큰 소리를 쳤습니다. “우리 백화점 가자. 내가 옷 사줄게.” 아내는 시큰둥합니다. 제가 계속 재촉하니 그제야 구경이나 하러가겠다고 따라나섭니다. 구로역 근처에 있는 애경백화점에 갔습니다. 종류가 너무 많아서 헷갈리는 여성 의류 매장에서 아내는 두어 가지 옷을 입어봅니다. 하나는 15만원, 다른 하나는 18만원. 저는 사라고 했습니다. 사주려고 카드를 가지고 나왔으니까요.
아내가 말합니다. 사려면 정장을 하나 사야 한다고. 그러면 정장을 사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말합니다. 나중에 살을 뺀 다음에 몸에 맞는 정장을 살 거라고. 그러지 말고 지금 정장을 한 벌 사고 나중에 살이 빠지면 그때 또 한 벌 사줄 테니 그냥 하나 구입하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말을 듣지 않습니다. 결국은 옷을 사지 못한 채 백화점을 나섰습니다. 이것 안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열 받습니다. 날 무시하나 싶기도 하고...
어떤 분은 저를 나무라실지 모르겠습니다. 직접 옷을 하나 사가지고 가서 선물로 주면 되는 것 아니냐고? 그러나 그것은 제 아내를 모르기에 하는 소리입니다. 아내는 자신이 사야겠다는 생각을 굳히지 않은 상태일 경우 물건을 가지고 가서 환불해올 여자입니다. 짠돌이도 그런 짠돌이가 없습니다. 결국은 돈 때문에 아내는 옷을 사지 않은 것입니다.
이제 결혼 10년을 향해 달려가는데 아직 정장 한 벌 사준 적이 없습니다. 피차 넉넉한 환경은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지 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가슴 한 구속에서 들썩거리고 있습니다. 부잣집 아들을 만났으면 풍요롭게 살 텐데 저에게 시집 와서 고생이 많습니다. 아이 낳고 돈이 없을 때는 분유를 조금 넣은 후 물만 잔뜩 타서 먹이기도 했다고 하니 속상하기도 합니다.
어차피 옷을 못 샀으니 점심이라도 맛있게 먹을 생각으로 아웃백에 데리고 갔습니다. 아이들과 장모님도 함께 갔습니다. 뒤늦게 공부하는 아내를 대신해서 두 아이들을 봐주고 계신 장모님입니다. 음식을 주문한 후 저는 효원이를 데리고 홈플러스에 가서 생크림 케이크 하나를 주문했습니다. 16000원이나 하는 케이크였지만 이왕 생일축하 해주는 것 폼이라도 잡아볼 심산으로 산 것입니다.
함께 음식을 먹은 후 케이크를 꺼내놓고 초를 꽂았습니다. 빵집에서 담아 준 긴 성냥은 두 개였는데 그중 하나를 들고 불을 켰습니다. 초에다 불을 붙이려는 순간 큰 아들 효빈이가 불어서 꺼버렸습니다. 자기가 켜서 불을 붙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엄마에게 혼이 난 후 성냥을 손에 든 효빈이는 불을 켜려다가 성냥을 부러뜨리고 맙니다. 한번 더 엄마에게 혼이 나고 ^0^.
아내는 부러진 성냥을 들고 불을 켜려고 애를 씁니다. 마침내 불이 붙었는데 길이가 워낙 짧아진 성냥은 금방 타들어가다가 아내의 손까지 올라갔고 아내는 성냥을 떨어뜨립니다. 성냥불은 즉각적으로 사망합니다. 이제 초에 불을 켤 성냥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옆 자리 앉은 손님들에게 라이타 좀 빌려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담배를 안 핀다고 합니다. 그 뒷자리 손님에게 빌려 달라 했더니 담배를 안 핀다고 합니다. 오늘은 담배 안 피는 사람이 아웃백에 가는 날인 듯합니다.
방법이 없어서 난처해하고 있는데 저쪽이 시끄럽습니다. 누군가의 생일인지 케이크를 꺼내고 초를 꽂고 라이터를 꺼내서 불을 붙입니다. 곧이어 생일축하 노래를 부릅니다. 이젠 안심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노래가 끝나는 즉시 라이터를 빌리러 가려는데 우리 옆자리에 앉은 여자분이 라이터를 빌려줍니다. 없는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있더래나... 수상하군.
드디어 우리 케이크 위에도 환한 불이 들어왔습니다. 생일 축하노래를 불러주었는데 불은 효빈이와 효원이가 끕니다. 이미 배부르게 식사를 한 직후인지라 아내도 장모님도 케이크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저와 아이들만 케이크를 한 조각씩 먹었는데 꽤 맛있는 케이크였습니다. 그렇게 식사를 한 후 연주회 때문에 아내는 버스를 타고 출발을 했고 저는 장모님을 내려드린 후 아이들과 함께 교회로 왔습니다.
오늘은 참 중요한 날입니다. 노총각으로 인생을 마감할 뻔한 제게 꼭 맞는 여자가 태어난 날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여자는 단 한 명만으로도 벅차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아내이지만 아내 없이 사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는 저의 삶이기도 합니다.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린 결론 중 하나는 아내보다 제가 먼저 하나님 앞으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저 없이 아내 혼자 살 수는 있어도 아내 없이 저 혼자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챙겨주지 않으면 혼자 살 길이 없거든요(밥도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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