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환사랑이야기

왜 울고 웃고 화내고 기뻐하나?/ 안희환

안희환2 2006. 8. 31. 00:01

왜 울고 웃고 화내고 기뻐하나?/ 안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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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울고, 웃고, 화를 내고, 기뻐하면서 살아갑니다.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으며, 화내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이기에 느낄 수 있는 여러 감정적인 차원들이 있으며 그것을 드러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늘 웃기만 할 수도 없고 늘 울기만 할 수도 없으며, 늘 화내기만 할 수도 없고 늘 기뻐하기만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다양한 감정의 변이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 때문에 웃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울고 화내고 기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면 각 사람의 수준이 어떠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각각의 감정을 드러내는 동기가 무엇이냐에 따라 그 인생이 고귀한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며 반대로 천박한 인생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원래 다 존귀하나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고상한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고 경박한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뻐한다고 할 때 타인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상대방은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데 그것을 바라보면서 웃고만 있다면 그 심보가 상당히 고약한 사람인 것입니다. 반면에 자신의 성공이나 출세, 혹은 수익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일반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고, 남이 잘되는 것을 보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꽤 좋은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화를 낸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이익이 날아갔을 때 화를 내는 것은 흔한 현상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누가 뭐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잘못을 해놓고 도리어 정당한 사람에게 화를 낸다면 그는 몰상식한 사람입니다. 만약 자신과 직접 결부된 것이 아님에도 약자들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것을 보고 화를 낸다면 그는 정의감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워런 위어스비의 '정직의 위기'에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윌 로저스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윌 로저스가 LA에 있는 밀튼 베리 요양소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소아마비 환자, 척추 환자와 그 밖의 심한 신체장애자를 치료하는 전문 재활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큰 고통 속에서 인생을 힘겹게 살아가는 가련한 사람들의 집합소인 것입니다.


윌 로저스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웃겼습니다. 얼마나 뛰어난 연기를 했는지 정말 상태가 좋지 않은 환자들까지 웃게 했습니다. 그런데 공연을 하던 로저스가 갑자기 무대를 떠나 휴게실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밀튼 베리가 그에게 수건을 건네주려고 뒤따라가 문을 열자, 윌 로저스는 벽에 기대어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습니다. 가련한 사람들을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후 윌 로저스는 방금 전처럼 익살스러운 얼굴로 다시 무대에 나타났습니다.


윌 로저스는 무엇 때문에 울었습니까? 자신의 처지가 한심한 것을 보고 자기 연민에 빠져 울었던 것이 아닙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나서 해결할 길이 없으니 속이 터져서 운 것도 아닙니다. 그는 진심으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마음을 열었고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것인 듯 여기며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그의 울음은 곧 그의 사람됨이 얼마나 올곧은지를 보여주는 산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감정적인 변화를 드러냅니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울고 웃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존재 자체가 더불어 사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마치 모든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재편성되고 움직여져야 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니 세상은 날이 갈수록 각박해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끈한 정은 노끈처럼 밋밋해지는 것입니다.


이웃의 행복을 보며 덩달아 기뻐할 수 있는 사람, 주변 사람들의 슬픈 사연을 듣고 중심으로부터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 애매하게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나서서 분노할 줄도 아는 사람, 까르르 웃는 아이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따라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운 세상입니다. 아니 그런 세상이기에 저 자신부터 똑바로 울고 웃으며, 화내고 기뻐할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