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환사랑이야기

87세 할머니가 주신 화장지 / 안희환

안희환2 2006. 7. 20. 18:14

87세 할머니가 주신 화장지 / 안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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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가치라고 하는 것이 분명히 정해진 것 같지만 사실은 가변적입니다. 같은 만원이라고 해도 부자의 만원과 가난한 자의 만원은 액면이 같을지 몰라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똑같은 만원을 쓴다고 할 때도 누가 그 돈을 쓰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것이며, 특히 누군가 내게 베풀어주는 일정 액수의 정성이라고 할 때 그 누군가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것입니다.


이렇듯 엉뚱해 보이는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번 주간에 있었던 한 가지 일 때문입니다. 나 스스로도 다른 이들에게 무언가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 이상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받곤 하는데 이번 주간에 두루마리 화장지 24개를 받았습니다. 물론 내가 직접 받은 것은 아니고 아내가 받은 것인데 그것을 받는 순간(나도 옆에 있었음) 마음 한 구석이 찡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로 그 두루마리 화장지를 주신 분이 87세나 되신 할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몸이 구부정하고 기운이 별로 없어 보이시는 분인데 나를 보실 때마다 반갑게 손을 꼭 잡으시는 분입니다. 나 역시 그분을 볼 때마다 손을 꼭 잡아드리는데 마주치는 눈빛이 심상치 않을 만큼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그 할머니가 부자가 아닌 가난한 할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서 폐지를 줍는 할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도 폐지를 모은 적이 있고 그것을 팔아서 생활비에 보탬이 되게 하려고 한 적이 있기에 폐지 줍는 작업이 얼마나 고생스러운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6박스를 보아서 팔았더니 겨우 천원짜리 몇 장이 손에 쥐어졌었는데 내가 날 보아도 참 측은했었습니다.


두루마리 화장지를 받은 후 이틀째 되는 날 아침 아내가 청소를 한다고 진공청소기를 꺼내는데 그 옆으로 문제의 두루마리 화장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저 화장지 정말 귀한 거야. 소중하게 사용하자고.”이유를 묻는 아내에게 그 할머니가 폐지를 줍는 분이며 그렇게 힘들게 모은 폐지 대신에 얻은 화장지를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24개의 화장지 가운데 한 개가 비어 있었습니다. 아내가 벌써 하나를 꺼내어 화장실에 걸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아깝다고 아껴 쓸 수도 없는 것이고 사용하지 않은 채 꼭꼭 숨겨둘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하나 둘 필요할 때마다 사용해야겠지만 그때마다 그 할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슴에 새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그 화장지를 가격으로 따지만 돈 만원도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격 이상의 의미가 그 안에 담기게 될 때 다른 누군가가 10만원을 손에 쥐어준 것보다 마음을 더 뭉클하게 하니 세상을 사는 보람 중 하나가 이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청소기 옆에 놓여있는 화장지 뭉치 하나에 이토록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기만 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구부정한 허리를 겨우 편 채 교회에 나와 맨 바닥에 방석을 깔고 그 위에 꿇어 엎드려 기도하는 김정숙 할머니. 웅얼웅얼 무슨 소리인지 정확이 알아들을 수 없게 새는 발음이지만 그 누구의 기도보다 진실하고 힘이 있는 기도라 여겨집니다. 눈물로 드리는 그 기도 속에 할머니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할머니의 사랑이 그들 마음속에 전달될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