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환의 칼럼

맥아더 더글러스에 대한 단상 / 안희환

안희환2 2005. 9. 13. 02:51

맥아더 더글러스에 대한 단상 / 안희환


                


 

맥아더 더글러스는 1880년 아서 2세와 메리 핑크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더글러스의 아버지는 군대의 고위장교였으며 아들인 더글러스의 우상이었다. 더글러스는 열 세 살인 1897년 군사학교에 들어갔으며, 4년의 기간중 3년 동안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1903년 졸업 후 첫 임지로 필리핀을 선택했는데 1904년 여름엔 말라리아에 감여되어 미국으로 돌아가야했다. 1906년 더글러스는 워싱턴 DC의 공병학교에 배치되었다가, 시어도어 루즈벨티 대통령의 비상근 군사부관으로 임명되었다.

 


                              (젊은 시절의 맥아더 더글러스)

 

1913년 맥아더 더글러스는 육군참모본부의 일원으로 선발되었고, 1917년 4월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한 후 맥아더 소령은 전국 각지의 주방위군 부대에서 차출한 병력으로 특별 육군 사단을 조직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아 윌슨 대통령의 관심을 끌었다. 맥아더는 그것을 계기로 대령진급을 했으며 제42 [무지개] 사단의 수석참모가 되었다.


1918년 11월 정전이 이루어진 뒤 맥아더는 1919년 4월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육군참모총장 페이튼 마치는 더글러스를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임명했는데 나이 많은 교수진과 교과과정의 이견으로 충돌을 겪어야했다.


존 J. 퍼싱 장군이 육군 수장이 된 후 더글러스는 난처한 입장에 처해졌는데 맥아더가 약혼한 부유한 이혼녀 루이즈 클롬웨 브룩스가 퍼싱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다. 퍼싱은 맥아더를 웨스트포인트 교장직에서 해임하고 필리핀으로 가라고 명령했고, 1925년 맥아더 소장은 미국으로 돌아왔다. 1928년 말에는 육군의 필리핀 군관구 사령관으로 마닐라로 배속되었다.


1930년 11월에 맥아더는 참모총장이 되었고 부나의 전투와 그 이후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아주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그 공로가 맥아더에게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그 후로 2년간의 전투에서 맥아더는 20만명의 일본군을 죽였다고 보고를 했다.


그러나 유명해진 영웅 맥아더의 기대와 달리 여론조사에서 맥아더는 군인으로서의 맥아더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에게 대통령 후보로서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다. 1942년 4월 맥아더를 지지하는 이들이 맥아더 장군을 위스콘신과 일리노이의 예비선거에 등록시켰다. 그러나 맥아더는 정적인 듀이에게 참패를 당한다. 그 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맥아더는 듀이와 다시 한번 승부를 벌였는데 1,056대 1로 절망적인 패배를 경험했다.


그 후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더 나아가 1945년 8월 맥아더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감독할 권한을 얻는다. 연합국 최고사령관에 오른 맥아더는 1945년 8월 30일에 일본에 입국하며 일본과 남한에서 점령군을, 1947년 이후에는 극동지역사령부를 지휘했다.


1948년 맥아더는 다시 한번 정치적인 일선에 나선다. 3월 9일에 공화당 후보로 나설 의사가 있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맥아더는 위스콘신 예비선거에서 완패하며 그의 입지는 줄어들고 만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맥아더는 또 다시 각광을 받을 기회를 얻는다. 전쟁의 한 복판에 다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인천 상륙작전은 조선인민군을 확실하게 물리치게 하였으며 맥아더의 명성을 하늘에 치솟게 만들었다. 그러나 맥아더의 무모한 전략으로 인해 중국의 개입이 일어나고 유럽의 동맹국들은 워싱턴이 맥아더를 통제하지 못한 채 나토의 뿌리를 뒤흔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장군은 자신이 지금껏 저지른 모든 잘못의 책임을 베이징과 워싱턴에 떠넘겼으나 보람도 없이 소환이 되었으며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노래의 가사말로 군인으로서의 삶을 접게 된다.


              


 

이상은 맥아더 더글러스의 생애에 대한 간략한 소고이다.


최근 맥아더 장군에 대한 비판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 당시의 전쟁 기록들을 근거로 해서, 도 맥아더 장군의 주변 사람들의 진술에 따라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자료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연결하여 맥아더 장군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일부의 문제제기도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고.


이런 논지가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맥아더가 자신의 출세와 성공에 상당히 집착하는 인물이며 그것을 위해 자료나 정보도 조작했다는 점/ 주변 인물들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모든 성과를 자신에게 돌리도록 했다는 점/ 정작 한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세우는데 더욱 관심이 많았다는 점/ 일본군 점령군으로서 마치 자신이 황제인 것처럼 군림하였다는 점/ 일본군의 기득권층을 확실하게 무너뜨릴 힘이 있었음에도 그들에게 기회를 줌으로써 적절히 그들을 이용했다는 점.


그러니 이런 비판들 속에서 잊고 있는 것이 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한국을 위해 존재하는 군인이 아니었으며 그의 주목적은 미국의 국익과 자신의 입신양명에 있다고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잣대로 맥아더 장군을 비방할 구실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감정적으로 대응할 수는 없다. 현실에 뿌리를 둔 냉철한 의식으로 그 당시의 상황을 분석해야 하며 맥아더 장군이 자기의 입신양명을 꾀했든,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했든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에 유익이 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볼 수 맥아더장군의 실수가 있었다해도 우리나라가 그에게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 부인할 수 없으며, 그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것에 대해 부당하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제 와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는 것이 과연 이 나라의 국인에 도움이 될 것인지 아니면 해가 될 것인지를 분명히 살펴야 한다.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감정적인 것에 휩쓸린 상태에서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은 결국 후회할 일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어차피 지금은 국제화시대이고 어느 한 나라가 고립된 채로 잘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그런 상황에서 어설픈 자존심을 세우는 길인 양 성급하게 어떤 역사적인 사건을 평가절하하고 국제적인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