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조차도 인물을 만드는 복음.
조선은 양반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양반들은 상놈을 억눌렀고 상놈은 그 지배 아래서 고난을 받아야 했다. 백정은 상놈의 대명사였다. 백정은 기와집에서 살 수 없었고 비단옷이나 갖신도 신을 수 없었다. 그들은 양반이 지나갈 때에는 길을 비켜서야 했으며 항상 허리를 구부리고 뛰어가듯 껑충거리며 다녀야 했다. 만일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중형에 처해졌다. 바로 이들을 사람 대접받을 수 있도록 해준 사람이 모삼열 선교사였다.
모삼열 선교사는 자기가 운영하는 학교에 상놈 출신을 받아들여 교육을 시켰는데 그 중에 백정 박씨의 아들이 있었다. 박씨는 불행히도 장티푸스에 걸려서 죽게 되었다. 이것을 알고 모삼열은 임금의 시의였던 애비슨을 데리고 와서 치료해주었다. 백정으로서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 일로 인하여 박씨의 온 가족이 개종을 하였다.
박씨는 1895년에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그가 백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하면서 반 이상이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모삼열 선교사는 “예수의 사랑 앞에는 사람의 차별이 없다”고 그들을 설득하였다. 이에 대해 양반들은 “그러면 교회에서 양반과 백정의 자리를 구분하여 양반들에게 앞자리를 달라”고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모삼열 선교사는 이런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런 백정에 대한 사랑은 개인적인 차원의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895년 4월 모삼열은 한학자 최씨로 하여금 박씨를 도와서 정부에 백정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할 것을 탄원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정부는 그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평민들과 같이 초립과 망건을 착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또한 그 다음해 3월에는 인구조사에 백정이 빠져 있자 이것을 시정하여 백정도 일반인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해달라고 청원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백정 박씨의 개종은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아들 박동열은 1907년에 최초로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학생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박씨 자신도 은행업을 시작하여 사업가와 장로가 되었다. 박씨는 백정조합 회장으로 선출되어 백정들에게 해방의 복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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