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환 특별설교

언어가 가지고 있는 힘 야고보서 3:1-12

안희환2 2012. 4. 10. 00:35

언어가 가지고 있는 힘 야고보서 3:1-12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실제로 세상살이에서 우리는 말 한마디 때문에 용기를 얻기도 하고 말 한마디 때문에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말 한마디 때문에 좋은 사이로 발전하기도 하고 말 한마디 때문에 회복될 수 없을 만큼 관계가 깨어지기도 한다. 말 한마디 때문에 열심을 내기도 하고 말 한마디 때문에 주저앉기도 한다. 말이란 얼마나 위력적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 언어가 가진 힘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인생살이에 이처럼 큰 영향력을 미치는 말을 많은 사람들이 너무 생각 없이 너무 쉽게 한다고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 열매를 두고두고 따먹으면서 고통을 당한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예수 믿는 성도들의 삶에서도 나타난다. 말로 인한 고통을 겪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 하나님께 받은 놀라운 은혜들을 말 한마디 때문에 까먹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혹시 여러분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으신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언어가 무엇이 문제인지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 또한 성경은 이 언어생활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귀한 깨달음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란다.

 

 

1.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오자. 오늘의 본문 말씀은 좀 특이한 내용으로 시작이 되고 있다.

 

1절을 같이 읽어보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1)”

 

1) 많이 선생이 되지말라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선생이 무엇인가? 선생하면 딱 떠오르는 것이 있다. 가르치는 자라는 것이다. 당시엔 랍비라고 하는 이들이 바로 선생이었다. 그런데 랍비는 오늘날의 선생과는 그 의미가 좀 다르다. 랍비는 지식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격, 지식, 신앙을 가르치는 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번 가르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가르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그 영향력이 대단했다.

 

지금 우리나라의 선생님들은 대우가 형편없다. 지위 면으로 거의 바닥 수준이다. 그러가 보니 스스로도 자부심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아이들을 체벌했다가 신고당하는 선생님도 많지 않았는가? 학부모에게 또한 학생들에게 무시당하는 선생님도 많지 않은가?. 참 바보 같은 일이지만 어쨌든 현실이 그러하다. 심지어는 대학교수들도 그러하지 않은가? 요즘에 대학교수가 대학생들에게 존경받는 것은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툭하면 총장실까지 점거하는 학생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오늘 본문 당시의 선생은 조금 전에 말한 대로 완전히 그 위치가 달랐다. 선생이 되면 커다란 존경을 받았다. 사회적으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도 했다. 따라서 선생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2) ? 더 큰 심판 받을 것이기에

 

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을까?

 

선생이란 위치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직업이기 때문인가?

 

왜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할까?

 

더 큰 심판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치가 중요하고 큰 만큼 거기에 따르는 책임도 크다는 것이다.

 

3) 무엇 때문에

 

특별히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말의 실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실족하게 할 수 있다. 그러기에 2절에서는 말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2절을 함께 읽어보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여기에 보면 우리가 다 실수가 많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말의 실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여 그렇지 않은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후 곧바로 아차 하며 입을 가리게 되는 적이 많지 않은가? 혹은 못할 말을 한 후 집에 돌아가 하루 종일 끙끙대며 고민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만약 누군가 그런 실수를 전혀 하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로 대단한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2. 혀의 영향력과 파괴력

 

3-6절은 바로 말의 영향력과 파괴력을 잘 말씀해주고 있다. 함께 읽어보자.

 

“3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1) 혀의 영향력

 

먼저는 말을 하는 혀의 영향력이다.

 

오늘 말씀에 보면 몸 전체에 비해 혀의 크기가 얼마나 작은가, 그러나 그 작은 크기에 비해 영향력은 얼마나 큰가를 다른 사물과의 비교를 통해 말씀하고 있다.

 

그 하나는 말과 재갈의 관계이다. 알다시피 말은 쾌 큰 짐승이다. 힘도 좋다. 마력이란 말. 그러기에 사람을 그 위에 태우고도 빠른 속도로 달릴 수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빠르고 또 사람을 태울 수 있다고 해도 통제가 되지 않는다면 사람에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그 재갈과 연결될 고삐로 방의 방향을 바꾸므로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결국 말이라는 커다란 덩치가 재갈이라는 작은 것에 의해 이리도 움직일 수 있고 저리로 움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전체를 좌지우지 하는 것은 작은 부분인 것이다.

 

배와 키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배도 무척이나 큰 물건이다. 사람도 태우고 짐승도 태우고 물건도 싣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그 배를 움직여간다. 그런데 그렇게 커다란 배를 움직여서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하는 키는 배에 비해 무척이나 작다. 그 작은 키로 커다란 배를 이리로 몰기도 하고 저리로 몰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커다란 전체를 좌지우지 하는 것은 작은 부분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몸 전체에서 혀가 바로 배의 키처럼, 말의 재갈처럼 작용한다는 것이다. 혀에 의해 우리 몸 전체가 이리로 끌려갈 수도 있고 저리로 끌려갈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말을 잘하면 정말로 크고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말이다. 그것이 바로 말의 영향력이 아닌가?

 

(1) 말 때문에 용기를 얻음

 

여러분은 말 한마디 때문에 용기를 얻고 주저앉았던 다리를 일으켜 새로이 도전해 본적이 있는가?

 

(2) 말 때문에 위대한 일이 일어나기도 함.

 

또한 말 한마디 때문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미국 메사추세츠 주에 살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매사에 정직 성실하였고, 감수성이 특히 예민하여 작은 일에도 늘 다정다감한 반응을 보이는 마음 따뜻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가끔씩 남들은, 그가 남자로서 너무 소심하고 유약하지 않는가 하는 평을 몰래 수근거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그를 지극히 사랑하는 그의 부인만큼은 자기 남편을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유능한 남자로 존경하기를 마지않았다.

 

그 남편의 직업은 세관의 관리로서 샐러리맨이었다. 맡은 바 직분에 늘 충직하게 일하면서 퇴근 후 밤에는 독서와 글공부를 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이자 낙이었다. 그의 부인은 남편이 어차피 활동적, 사교적인 인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일가에게 뜻밖의 불행이 닥쳤다. 별로 크게 잘못한 일도 없는데, 상사와의 사소한 갈등이 조금씩 누적되다가 어느 날 그만 직장인 세관에서 면직되고 마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월급에 의존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오래도록 하다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어, 그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집에 돌아와 부인에게 사실을 고했다. 남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살아갈 앞날이 캄캄하기는 부인이 오히려 더했을 터였다. 그러나 부인은 절망에 빠져 있는 남편을 그냥 놓아두지 않고 오히려 간절한 사랑의 눈빛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여보, 너무 잘된 일이에요. 이제야말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마음 놓고 집에서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계신 거예요. , 힘을 내세요. 당신은 얼마든지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훌륭한 남자라구요." 그러면서 부인은 한 뭉치의 원고지와 펜을 남편의 무릎 위에 갖다 놓았다.

 

이에 용기를 얻은 남편은 결연한 표정으로 아내의 손을 꼭 쥐었다. 사실은 벌써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몰래 익혀 두었던 작품의 소재가 있기도 했던 것이다. 이튿날부터 직장으로 출근하는 대신, 그는 서재의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심혈을 기울인 집필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아내는 집안에만 있는 남편을 구박하지 않고 정성껏 글을 쓰는 남편을 거들어 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 마침내 작품을 탈고시켰다. 작품의 제목은 주홍 글씨였다. 그 작품은 곧 19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위대한 작가 나다나엘 호오도온의 등장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여러분에게 묻는다. 무엇이 호오도온으로 위대한 작가가 되도록 움직였는가? 아내의 말 한마디이다. 만약 호오도온의 아내가 무능한 남편 바가지만 긁었다면 위대한 작가 호오도온이 가능했을까?

 

(3) 말대로 이루어주심

 

신앙적인 면에서도 말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하나님은 말대로 갚아주시기 때문이다.

 

시카고에 대 화재가 나서 온 시가지가 불바다를 이루었을 때의 일이다. 각 신문사의 기자들이 화재현장에 도착해보니 건물들이 모두 불타고 있었고, 더욱이 시가지 한복판에 있던 무디 목사님의 교회도 모두 불타버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기자들은 워낙 유명했던 무디 목사님 곁으로 다가가 빈정댔다. "목사님, 목사님은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원하기만 하면 이루어 주신다고 설교 하셨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성전인 교회가 불이 타 없어지는 것을 가만 두십니까?"

 

여러분 교회 하나 세우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 교회가 완전히 불타버렸으니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더구나 그것을 비웃은 기자들의 빈정거림은 얼마나 가슴을 긁었을까? 그러나 무디 목사님은 태평했다. 열 받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벌써부터 하나님께 큰 교회를 달라고 기도해 왔소. 그 기도의 응답으로 지금 교회가 불탄 것입니다. 우리가 큰 교회를 헐고 다시 세워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불에 태워서 건물을 허는 비용이 들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에 기자들은 어이없어 했다. 왜냐하면 무디 목사님은 밤중에 화재를 당하여 잠옷 바람으로 겨우 목숨만 건진 빈주먹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자들은 다시 물었다. "그럼, 그 큰 교회를 세울 돈은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자 무디 목사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낡은 성경책을 내놓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수표와 돈을 가지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써도 바닥이 나지 않는 하나님의 금고인 성경책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얼마 안가서 불에 탄 교회보다 더 크고 훌륭한 교회를 볼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그 화재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설교했는데 하나님은 그 설교를 축복해 주셨다. 결국 전 영국을 뒤흔드는 부흥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교회건축을 위해 많은 헌금을 했다. 이렇게 해서 무디 목사님은 영국 국민이 바친 헌금으로 화재가 난 자리에 옛날 교회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운 교회를 지을 수가 있었다. 하나님은 그의 말대로 갚아주신 것이다.

 

여러분도 말을 잘 하시기 바란다. 그 말은 그냥 말이 아니라 놀라운 영향력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긍정의 말.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믿음이 크도다.

 

 

2) 혀의 파괴력

 

그런데 말의 이런 놀라운 영향력은 그만큼이나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작은 혀의 영향력이 부정적으로 나타날 때 바로 그런 파괴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혀를 또한 불로 비유하고 있다.

 

여러분은 대형화재가 어떻게 나는지 알고 계실 것이다. 그 화재의 피해와 규모에 비해 화재의 시발은 정말 장난 같은 것에서 시작이 된다. 산림을 태운 커다란 산불이 등산객이 버린 담배꽁초 하나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수많은 물건을 생산하고 수많은 직원들이 일하는 공장이 잘못 관리한 난로 하나 때문에 다 타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작은 불의 큰 파괴력이다.

 

마찬가지로 혀는 작지만 영향력이 크고, 그 영향력이 잘못 나타날 때 커다란 파괴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1) 큰 손해를 끼침

 

혀의 잘못된 사용은 큰 손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르호보암. “12 삼일만에 여로보암과 모든 백성이 르호보암에게 나아왔으니 이는 왕이 명하여 이르기를 삼일만에 내게로 다시 오라 하였음이라 13 왕이 포학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할쌔 노인의 교도를 버리고 14 소년의 가르침을 좇아 저희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은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찌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니라 15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고한 말씀을 응하게 하심이더라 16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 이새의 아들에게서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왕상 12)

 

어느 집에 젊은 부부가 있었는데 시부모님 댁에서 같이 살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아들 내외에게 집을 한 채 사주고 분가시키려 했다. 그런데 한 번은 시어머니가 밖에 볼 일이 있어서 외출하다가 놓고 온 것이 있어서 집에 들어왔는데 며느리의 전화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새파란데 언제 받아?” 빨리 가야 재산을 받는다는 말 아닌가? 시어머니가 창밖에서 섬뜩했다. 시어머니가 새파랗다니? 그러면 누렇게 생기면 좋겠단 말인가? 시어머니는 결국 집을 사서 내보내려고 했다가 조그만한 월세방을 얻어서 얼마 후 내보냈다. 말 한마디에 얼마나 손해를 봤는가? 그리고 손해를 봐도 싸다.

 

(2) 하나님의 축복에서 제외됨.

 

혀의 잘못된 사용은 하나님의 축복이 자신을 비껴가도록 만들기도 한다.

 

“1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 2 그 때에 한 장관 곧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엘리사가 가로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왕하 7)

그대로 이루었으되 곧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죽었더라”(왕하 7)

 

(3) 끔찍한 일의 발단.

 

혀의 잘못된 사용은 끔찍한 일의 발단이 되기도 한다.

 

오랫동안 교도소 생활을 한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은 어린시절 가출하여 타락의 길로 갔다. 그래서 교도소를 자기 집 안방 드나들 듯 했다. 그런 와중에도 예수를 믿게 되었고 믿음 좋은 처녀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전과자라는 이유 때문에 사회생활 하는데 지장이 많았다. 그래서 전과자라는 말만 들으면 머리가 섰다.

어느 날 밤에 부부가 서로 대화를 나누다가 언성이 좀 높아지면서 다투게 되었다. 사실 부부간에 다투고 소리를 높이는 것은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니다. 결혼 전까지 다른 환경, 다른 부모, 다른 교육, 다른 사람들 속에서 살던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이 부부의 싸움에 큰 문제가 발생했다. 남편과 말다툼하던 부인이 남편에게 한 마디를 던진 것이다. “당신이 전과자라 그래”. 이 말을 듣는 순간 이성을 잃은 남편이 일어나더니 부엌에 들어가 식칼을 들고 나와서 자기 아내를 찔러 죽였다.

결국 남편을 전과자로 부른 부인은 전과자한테 죽은 것이다. 자기 남편으로 만났을 때는 회개한 남편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과거에 대한 전과를 들추어내면 안 되었다. 그것은 남편을 분노케 할 수 있는 말이고 분노하면 정신을 잃는다. 아내는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말은 조심하고 또 조심했어야 한다.

 

여러분. 기억하라. 싸우더라도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다투더라도 남의 비밀은 누설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의 집안을 물고 늘어지는 말, 과거를 들먹이는 말, 그리고 상대의 인격을 건드리는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큰 비극을 가져올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진 말이기 때문이다.

 

(4) 가장 큰 상처

 

여러분이여. 형태가 없지만 사람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것이 또한 말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가정불화 때문에 남편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제기했던 한 여인에게 재판장이 물었다. "남편과의 싸움에서 오고갔던 모든 것을 법정에서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여인은 침착하게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재판장님! 남편이 던진 후라이팬으로 화장대가 부서졌습니다. 깨어진 접시 때문에 나의 머리가 상했습니다. 그가 휘두른 방망이 때문에 나의 몸 전체에 멍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것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한 말, 한마디만은 잊혀지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울음을 터뜨렸다. 함부로 내뱉은 말 한마디가 가시처럼 그의 마음을 찔렀고 사랑하던 남편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해야 할 만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었던 것이다.

 

여러분이여 분명히 알라. 누군가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신앙은 엉망인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에 재갈 먹이지 아니하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성격 탓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며 대충 넘어가려 한다. 묻고 싶다. 성격 탓이면 죄가 아닌가? 헛소리다. 그것은 명백한 죄다.

철저하게 회개하시라.

 

성경은 말씀한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 세우기를 위하여 선한 말을 할 것이며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을 악의와 함께 버리라."(4:29-31)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마음이 궤사한 자는 강포를 당하느니라,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13:2)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16:23-24)

 

오늘 본문에 혀를 불이라고 했는데 그 사라는 것이 지옥불에서 난다고 말씀했다. 도대체 지옥불이 무엇인가? 부자의 절규. 그런 끔찍한 지옥불이라. 그만큼 고통을 준다는 것이다.

 

또 오늘 본문에 그 불이 생의 바퀴를 불사른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러분 바퀴가 불살라지면 어떻게 되는가? 몇 년 전 집회 후 집에 오다가. 타이거가 갈가리 찢어짐. 그 위험. 차가 갈수가 없음. 인생도 마찬가지임. 나아가지 못하게 됨.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비극적인 인생이 얼마나 많은가? 말로 인한 상처 때문에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땅치 않은 혀의 사용을 조심해야 함.

 

 

3. 마땅치 않은 혀의 사용

 

특별히 오늘 성경에서는 마땅치 않은 혀의 사용중 대표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특별히 성도 간에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혀의 사용이다.

 

1) 한 혀로 찬송도 하고 저주도 함

 

오늘 본문에서 잘못된 혀의 사용의 핵심은 한 입으로 찬송도 하고 그 동일한 입으로 저주도 한다고 하는 점이다.

 

저주-아주 강한 어조. 좀 누그러뜨리면 비난이나 비판이 될 것임.

 

왜 저주할까? 이유가 있을 것임.

마음에 안 드니까. 다 마음에 드는데 비판하거나 저주할 리는 없는 것임. 안 그런가?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볼 것이 있다. 정말 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설사 처음에 마음에 들었다 해도 끝까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자신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쏙 들게 살아가고 있는가? 특별히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게 마음에 쏙 들만큼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다. 다 아니다. 특별히 하나님 보시기엔 우리 모두 허물투성이다. 그런데 허물투성이인 우리를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그래서 그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은혜를 찬송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레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이처럼 찬양할 수밖에 없는 우리이지 않는가? 그래서 이처럼 찬양하면서 그 찬양하던 입으로 이제 다른 사람을 욕하고 헐뜯고 있느니 그 모양이 영 말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마땅치 않다고 오늘 본문에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2) 샘이 한 구멍으로 두 물을 내는 것

 

오늘 본문에는 특별히 자연을 예로 들어서 한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하는 것이 마땅치 않음을 말씀하고 있다.

 

그 하나는 샘이다. 한 샘이 동시에 단물과 쓴물을 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단물은 달작지근한 물이고 쓴물은 씁쓰름한 물인가? 아니다. 단물은 먹을 수 있는 좋은 물을 말한다. 그러면 쓴물은? 쓴물은 먹으면 해로운 심할 경우 죽을 수도 있는 못먹는 물을 말한다.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15)

 

“19 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20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찌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22 그 물이 엘리사의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더라”(왕하 2)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쓴물에 비교될 수 있는 우리의 말, 그 역시 사람을 죽일 수 있지 않은가?

 

아무리 쓴물이라도 고침을 받은 후에는 단물만을 내건만 왜 성도는 예수만나 새사람 된 후에도 여전히 저주의 말을 하는가? 이것이 마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 나무가 두 열매를 맺는 것

 

그것은 나무도 마찬가지이다. 한 나무가 두 열매를 맺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무는 열매로 알지 않는가? 입술의 열매로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칭찬을 잘하는 입과 비난을 잘하는 입을 가진 사람 중 누가 인격자이겠는가?

남을 세워주는 말과 남을 깎아 내리는 말...

타인을 축복, 타인을 저주...

사랑담긴 말을 하는 사람과 증오 섞인 말

상대의 말에 맞춰주는 사람의 말과 상대방을 씹는 사람의 말

친절한 말을 하는 사람과 쌀쌀맞은 말을 하는 사람

 

인자한 말을 가지고 사람을 감화시키며 갈 길을 잃은 무리를 잘 인도하게 하소서

 

여러분은 부디 저주의 말을 그치고 찬양의 말이 넘치시기를 축원한다.

 

특별히 성도간에 그처럼 되시기를 축원한다.

 

왜 이것을 따라야 하는가?

 

첫째로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를 둔 한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이다.

한 형제자매-고소사건. 망신살. 고후의 말씀은 차라리 당하라 인데(고후6)

 

둘째로 우리는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이기 때문이다.

한 지체.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

 

셋째로 우리에게는 상대를 비난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자격이 없음-우리도 죄임. 바리새인과 동일함. “11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12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4)

 

넷째로 비난은 마귀를 기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귀의 본업. 참소. 비난. 욥의 고난의 시발점인 사단. “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1)

 

다섯째로 비난하지 말라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이 명령보다 중요하고 절대적이며 급한 것은 없지 않은가?

 

주님은 말씀하셨다.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7)

 

3) 그러나 심각한 문제

 

그러나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리의 혀가 통제되지를 않는다고 하는 점이다.

7절과 8절을 함께 보자.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내 것인데 내 맘대로 안 되는 것 몇 가지가 있지 않은가? 감정이 내 것인데 내 맘대로 안된다. 그리고 바로 혀가 그렇다. 내 것인데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통제가 안되요. 마음대로 안되요”.

 

당연한 이야기이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

 

성경을 읽다보면 성경에 없었으면 하는 구절이 있다. 그중 하나가 열왕기하에 나온다. 여기에는 엘리사가 나오는데 여러분이 알다시피 그는 하나님의 종이다. 사람을 살려야 하는 선지자이다. 그런데 화가 나니까 통제 못하고 저주하는 말을 한다.

“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24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 이명을 찢었더라”(왕하 2)

 

이렇게 자기 것임에도 통제가 안 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혀인 것이다.

 

 

결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차피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 아니니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런데 그럴 수가 없다. 혀의 파괴력이 얼마나 무섭고 큰지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파괴력으로 그대로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치 않은 모습이라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사람은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나니 이는 그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무슨 말인가? 마음에 가득 채워진 것이 자연스럽게 말로 표출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만 바꿀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뀌면 된다. 사람의 속에 정말 채워야 할 것들로 채우면 되는 것이다.

 

여러분 이해가 되시는가? 속에 채운 것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좀 추한 이야기로 뱃속에 무엇으로 채웠느냐에 따라서 트림이 다르다. 마늘 먹고 장미향 풍기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고기 먹고서 사과 냄새 풍기는 사람 본적이 있는가? 생강 먹고 향수냄새 풍기는 사람 본적이 있는가? 뱃속에 마늘이 들었으니 트림을 하면 마늘 냄새가 나는 것이고, 뱃속에 생선이 들어갔으니 트림을 하면 생선 냄새가 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 여러분은 마음에 무언가를 채워야 한다. 그래야 채워진 것으로 입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여러분이여 우리가 무엇을 채워야 하겠는가?

 

말씀을 채워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입에서 나올 것이 아닌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 기도하라는 것이다. 누구와 대화하느냐에 따라 언어가 달라진다. 욕 많이 하는 친구들과 오래 있으면 자기도 욕이 몸에 배지 않는가?

 

결국 기도와 말씀으로 성령충만 받으라는 것이다. 성령이 충만하면 충만한 성령의 것이 우리 입에서 흘러나오지 않겠는가?

 

스테반. 성령이 충만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런 씨 졸라 아프네”. 이런 말이었나? 그랬다면 사도행전 7장은 한편의 코메디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스테반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따라서 그의 입에서는 성령의 말이 나왔다. “아버지의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의탁하나이다라는 예수님의 언어를 그대로 따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우리 말대로 된다. 우리말에 따라 우리 인생이 달라진다. 그러면 성령충만으로 우리의 말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이 죽으면서 까지 하나님을 모독했다가 저주받은 표본들도 있다. 제럴드 우인로드는 유명할 만한 하나님 모독 자였다. "만일 하나님이 있다면 내 무덤은 뱀들로 들끓을 것이다"고 말했는데 그의 말대로 죽고 난 뒤 무덤을 팠는데 무덤자리에서 네 마리의 구렁이를 죽였다.

체스터 버텔이란 사람은 자신이 생전에 만든 동상의 오른손에는 '인류의 정신해방'이라는 두루마리 들고 왼발에는 성경을 뜻하는 '미신'이라는 두루마리를 밟고 있는데 그도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내 몸을 뱀으로 들끓게 해 보라"고 했는데 그의 무덤은 벌집처럼 뱀굴로 유명하고 하루에 20마리를 죽인 적도 있다고 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는 망한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들.

 

우리는 이들과 정반대의 말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찬양합니다.

 

가나안 정탐. 내 귀에 들린 대로 시행하리라. 열명의 정탐군은 자신들의 말대로 죽음. 여호수아와 갈렙. 자신의 말대로 가나안을 차지함.

 

가정에서 어떤 말을 할까?

교회에서 어떤 말을 할까?

우리 교회는 잘 될 거야. 어려울 때조차도. 우리 교회는 부흥할 거야. 우리 교회에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역사가 있어.

 

우리 기도하자. “오 주여. 내 안에 성령이 가득하게 하셔서 우리의 언어가 바뀌게 하소서. 언어가 가진 놀라운 힘을 우리가 축복받는 도구로 사용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