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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딸 떡볶이' 이경수 사장한현우 기자 hwh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안희환2 2011. 9. 3. 22:07

'아딸 떡볶이' 이경수 사장

입력 : 2011.09.03 03:04 / 수정 : 2011.09.03 15:14

목사되려던 이 남자, 떡볶이로 年매출 1200억 올리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이 사내는 목회를 천직으로 알고 자랐고 신학대학원을 나왔다. 대학 때 자신의 피에 사업가 기질이 흐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졸업 후 아버지의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해야 했다. 그러다가 교회에 재정적 위기가 찾아왔다. 교회를 살리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적은 자본으로 할 수 있는 떡볶이집을 동네에 차렸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26㎡(약 8평)짜리 떡볶이집이 전국 850개 매장에서 연 매출 1200억원을 올리는 '떡볶이 기업'으로 성장했다. 지난 7월엔 중국 베이징에도 점포를 냈다. 코웃음은 자제하시길. 삼성은 이병철이 1938년 3만원으로 창업한 '삼성상회'였으며, 현대는 1937년 정주영의 쌀집 '경일상회'로 출발했다.

떡볶이 프랜차이즈 '아딸'의 본사인 오투스페이스 이경수(42) 사장은 자신감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창업설명회를 하면 오후 1시30분부터 밤 10시까지 쉬지 않고 강연한다더니, 인터뷰가 3시간을 훌쩍 넘겼다. 지난 16일 서울 성내동 그의 회사에서 이 사장을 만났다.

동네 떡볶이집을 연매출 1200억원대 기업으로 키운 오투스페이스 이경수 사장은 창업 이후 한 번도 체인점 모집광고를 내지 않았다. 그는“광고 한 번 내지 않고 1000호점까지 개설하면, 그 자체로 화제가 되고 회사의 자산이 되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사장이 회사 근처‘아딸’매장에서 오랜만에 떡볶이 조리대 앞에 섰다. 동영상 보기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파리바게뜨 옆에 떡볶이집을 차려라"

―점포 위치 선정하는 원칙이 독특하던데요.

"저는 창업주들께 '아파트 입구, 횡단보도 앞, 파리바게뜨 옆'을 추천합니다."

―'파리바게뜨 옆'은 뭡니까.

"파리바게뜨는 전액 포장매출입니다. '아딸'의 목표와 같습니다. 그리고 사는 사람은 어른이지만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이란 공통점도 있습니다."

―파리바게뜨는 되고 뚜레쥬르는 안됩니까.

"(웃으며) 됩니다. 그런데 파리바게뜨 숫자가 훨씬 많습니다. 장사 잘되는 저희 점포를 보면 대개 파리바게뜨 옆입니다. 횡단보도는 동네와 동네를 잇는 다리입니다. 그곳에 사람들이 모이죠. 신호를 기다리면서 건너편 가게들을 보게 되는 이점도 있습니다."

이날 사진을 찍으려고 오투스페이스 본사에서 가까운 '아딸' 둔촌2호점에 들렀다. ―'꿈과 열정'은 식상하게 들리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사업하려면 약아빠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재료도 아끼고 조금씩 속여서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거죠. 저는 정반대로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 통닭을 튀겨 팔아도, 그 누가 기름 색깔을 보지 않아도, 내가 정한 원칙대로 정직하게 음식을 만들어 팔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업가는 지극히 도덕적이어야 하고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모든 기업가들이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하죠.

"올봄에 처음으로 세무조사를 받았습니다. 3주를 뒤졌는데 단 한 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조사팀장이 '정말 세금을 100% 다 냈느냐'면서 놀라더라고요. 바닥에 떨어뜨린 떡 하나를 주워서 떡볶이를 만들다가 손님이 그걸 보면 그 가게는 망합니다. 떡 한 개 때문에 말이죠."

'아딸'은 '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의 준말이다. 이 사장이 2000년 11월 서울 금호동에서 처음 떡볶이집을 열었을 때 그는 1972년부터 경기도 문산에서 튀김집을 해왔던 장인을 금호동 가게로 모셔와 함께 일했다. '아딸'의 아버지는 이 사장의 장인, 딸은 아내인 것이다. 처음 상호는 '자유시간'이었다. 간판 달 돈조차 없었던 그는 직전 가게의 간판 '자유시간 호프'에서 '호프'자를 지웠다. '아딸'은 그가 2002년 4월 이화여대 근처로 가게를 옮겼을 때 지은 이름이다. 장인과 장모는 사위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2004년과 2002년 각각 세상을 떠났다.

―목사가 되려던 사람이 어떻게 분식집을 열었습니까.

"그때 아버지의 교회가 방이동에서 금호동 아파트 상가 지하로 이사를 했습니다. 신축 아파트라 은행에서 분양가의 50%까지 대출을 해준다고 해서 갔는데, 정작 교회라서 대출을 못해준다는 겁니다. 7500만원이 필요한데 주변에서 싹싹 긁어모으니 3500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게 분식집이었습니다."

―그게 소위 '대박'을 낸 것인가요.

"떡볶이는 오랫동안 팔려왔고 다들 좋아하는데 왜 어른들은 사먹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위생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서는 지저분해도 아무 생각 없이 먹었는데, 어른이 되면 비위생적인 게 보이거든요. 그래서 늘 깨끗하게 해놓고 유니폼에 요리사 모자를 썼습니다. 계량스푼과 계량컵을 써서 정량화를 시도했죠. 늘 맛이 똑같은 떡볶이를 만든 겁니다. 그때 웰빙 열풍이 불어서, 튀김가루에 허브를 섞었습니다. 식용유도 콩기름, 옥수수기름, 채종유를 가장 맛있는 비율로 섞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른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어요. 가게 주변에 봉제공장이 많았는데 간식으로 사가기 시작하더군요. 떡볶이와 튀김을 6만원어치씩 사갔습니다. 이렇게 하루에 10건만 팔아도 60만원이에요." 요즘 잘 팔리는 튀김집은 거의 예외 없이 튀김가루에 허브를 섞는다. 이 사장은 "그건 우리가 원조"라고 말했다.

지난 7월 4일 개업한 중국 베이징의‘아딸’해외 1호점에서 이 사장과 직원들이 파이팅을 외쳤다. / 오투스페이스 제공
떡볶이로 연 40억대 파는 점주도

전국 '아딸' 매장 중 하루 매출액이 150만~200만원에 이르는 곳도 있다. 150만원으로 잡아도 월 매출 4500만원이다. 그런 점포를 9개나 운영하는 점주도 있다. 이 경우 월 매출은 4억원대로 치솟는다. 떡볶이로 연 매출 48억원이라면 '기업' 말고는 묘사할 단어가 없다. '아딸' 프랜차이즈의 폐점률은 5.6%. 프랜차이즈 업계 최저 수준이다.

전주 출신인 이 사장은 우석대 국문과와 침례신학대학원을 나왔다. 대학원 졸업한 뒤 3년쯤 전도사 생활을 하다가 떡볶이집을 차렸다.

―언제 '장사꾼 기질'을 발견했습니까.

"대학 때 외사촌형 일을 돕게 됐습니다. 그때 형이 건어물 납품을 했는데 교회 한구석을 칸막이로 막아 포장 기계를 들여놓고 건어물을 포장해 팔았어요. 전형적인 가내수공업 형태였죠. 그렇지만 원칙이 있었습니다. 좋은 물건을 남들보다 싸게 판다는 것이었습니다. 전국 특산품 장터 같은 행사장에서 특히 돈을 많이 벌었는데, 하루에 1000만원어치 팔 때도 있었습니다. 열흘간 1억원어치 판 적도 있으니까요. 장사가 너무 재미있어서 학교도 빼먹을 정도였습니다."

―또 어떤 사업을 해봤습니까.

"장사 수완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교인들이 어려울 때마다 저더러 도와달라고 했어요. 방이시장에서 과일장사를 하는 분이 계셨는데 이분은 하루 사과 5상자 파는 분이었습니다. 저는 가락시장에서 사과 100상자를 떼왔습니다. 5상자 파는 것보다 100상자 파는 게 훨씬 쉽습니다. 원가 이하로 밑지고 팔면 됩니다."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건 전형적인 거짓말인데요.

"그게 저의 작전입니다. 재래시장에 오후 5시쯤부터 사람이 몰려서 7시쯤엔 바글바글합니다. 그 두 시간 동안만 밑지고 파는 겁니다. 100원에 사오면 보통 140~150원에 파는데, 저는 80원 받고 팔았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죄다 저한테 몰립니다. 저는 가장 좋은 물건만 떼왔습니다. 싼 데다가 맛도 있는 거죠. 그렇게 두 시간 동안 50박스를 팔아치우고 그다음부터는 120~130원에 팝니다. 이렇게 열흘만 하면, 그때부터 사람들이 다른 가게엔 가지도 않습니다."

―다른 상인들한테서 욕도 먹었겠는데요.

"다른 사장님들이 원가 이하로 팔면 어떡하냐고 따지죠. 저는 '죄송합니다. 저희 작은아버지가 과수원을 하셔서…'라고 했습니다.(웃음) 재래시장에서는 수박도 서른덩이쯤 놓고 파는데, 저는 한 차(車)! 차떼기로 사왔습니다. 한 차 50만원에 떼왔으면, 어떻게 팔든 50만원만 넘기면 되는 겁니다. 50만원어치 팔면 나머지는 전부 밑지고 팔아치웁니다."

―말만 들어도 신나게 장사한 것 같은데요.

"장사엔 '펀(fun)'이 있어야 해요. 어떤 손님은 5000원짜리 3000원에 달라고 합니다. 그럴 땐 '예' 하고 그냥 주지 않습니다. 깎아주려면 명분과 이유가 있어야 돼요. '왜 그렇게 달라고 하느냐'고 물어본 다음에 깎아줍니다. 그 손님은 저를 반드시 기억합니다. 그땐 다들 수박을 작게 잘라서 먹어보고 사갔습니다. 저는 그냥 팔았습니다. 대신 큰 소리로 말합니다. '맛없으면 다시 오세요. 무거운 수박 집에 두고 그냥 오세요. 하나 더 드립니다.' 그래도 기어이 수박 반통을 들고 와서 바꿔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소리지르죠. '그냥 오라는데 이걸 왜 들고 왔어요?' 그러면서 더 큰 걸로 한 통 줍니다. 구경하던 사람들 얼굴에 '감동'이 지나갑니다."

이경수 사장은 미용실 인테리어도 혼자 도맡아서 한 적이 있다.“ 나는 국문학과 신학을 전공했지만 전공과 상관없는 일들을 무척 많이 경험했다”며“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큰 즐거움이었다”고 말했다. / 오투스페이스 제공

건어물·과일·수영장·중국집… 손대는 것마다 '대박'

―수영장 사장도 했다면서요.

"대학 4학년 때 건어물로 돈 번 외사촌형이 전화를 했습니다. '너, 꼭 학교 가야 되냐?' 그래서 '안 가도 된다' 했더니 경기도 원당의 수영장을 인수했는데 회원이 700명이래요. 이걸 1200명으로 늘려달랍니다. 근처에 다른 수영장 회원 수가 1200명이었습니다. 형네 수영장은 시설도 낡고 냉난방이 안 좋더라고요. 그래서 '인테리어 새로 해야 된다. 이거 안 하면 나 못한다'고 했죠. 그래서 인테리어부터 싹 다시 했습니다. 과일은 맛, 오징어는 짜지 않은 울릉도 쫄쫄이 오징어, 수영장의 핵심은 물입니다. '물을 얼마 만에 가느냐'고 물으니 갈지 않는답니다. 1년에 한 번도 물을 안 갈아요. 수영장 물 빼고 청소하고 다시 채우는데 2, 3일이 걸려요. 지금도 수영장 수질 알아보려면 '1년에 며칠 쉬느냐' 물어보면 됩니다. 쉬는 날 없으면 물 안 가는 겁니다. 3분의 1씩 갈고 소독약은 계속 넣죠. 수영장에서 넘치는 물도 정수시설을 거쳐 다시 수영장에 들어옵니다. 정수필터 교체하고 1년에 두 번 물을 전부 갈고, 한 달에 한 번 물 3분의 1을 갈았습니다."

―회원이 늘어나던가요.

"아니죠. 살펴보니까 배 나온 중년 강사가 가르치는 반은 회원이 없고 젊은 총각강사 반은 북적북적해요. 50~60대 여자분들도 젊고 잘 생긴 남자를 보면 가슴이 뛴대요. 그래서 키 크고 잘생긴 총각들로 강사를 싹 바꿨습니다. 강사들한테 삼각 수영복 입히고 사진 찍어서 전단을 만들었죠."

―미남계(美男計)군요.

"그 전단을 오후 6시부터 두 시간 동안 근처 아파트 집집마다 붙였습니다. 관리사무소에서 당장 떼라고 전화하더군요. '예, 알겠습니다' 하고 안 뗐습니다. 우리가 안 떼도 주부들이 수영복 남자들 사진보고 다 떼가거든요. 그 다음 날부터 전화가 쏟아지는데, 회원 수가 1500명까지 늘었습니다."

―대학 4학년이면 고작 스물 몇 살일 텐데요.

"강사들이 말을 안 들었죠. 안전요원이 없기에 1시간씩 돌아가며 안전요원을 하라고 했더니 징그럽게 말 안 들어요. 그래서 계좌로 부쳐주던 월급을 현찰로 직접 줬습니다. 월급날 강사들을 일렬로 세우고 "수고하셨습니다" 하면서 월급봉투를 나눠주고 악수를 했습니다. 이게 협박이에요. '내가 월급 주는 사람이다'라는 뜻이죠. 그 다음부터는 말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이 수영장에서 일하던 '미스 리'가 이 사장의 부인 이현경(39)씨다.

―그다음 해본 사업은 뭡니까.

"IMF 때 중국집 사장을 한 6개월 했습니다. 역시 저희 교인 사업이었는데 70평짜리 중국집이 하루 매출 150만원에서 30만원으로 뚝 떨어진 거예요. 제가 오후 3시쯤 갔는데, 사장님과 주방장, 배달원이 모여서 고스톱을 치고 있더라고요. 제가 '화투 다 치우라. 나가서 전단 돌려야지 뭐 하는 거냐'고 호통을 쳤죠. 짜장면을 먹어보니까 맛이 없어요. 월급 250만원짜리 A급 주방장을 내보내고 180만원짜리 B급 주방장을 들였더라고요. 당장 전 주방장 집에 찾아가 두 시간 동안 무릎 꿇고 빌었습니다. 원하는 대로 해드릴 테니 제발 와달라고요."

―주방장이 돌아왔습니까.

"예. 그런데 이 중국집은 문제가 하나둘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테이블 줄이 제멋대로예요. 테이블 줄부터 맞추고 '수저통, 식초, 간장은 항상 테이블 왼쪽 끝에다 놓으라'고 했습니다. 배달원들은 샛노랗게 머리를 염색한 데다 귀고리 달고 껌을 짝짝 씹고 있더라고요. 학교 안 다니는 애들이라 100만원 줄 것 70만원만 줘도 된다고 하더군요. 그런 애들은 배달 가서 '짜장 왔어요!' 소리치고 신발장 앞에 짜장면 내던집니다. 걔들을 불러서 '염색 풀고 귀고리 빼면 월급 30만원 올려준다. 할 수 있겠느냐'고 했죠. 그 길로 나가서 염색 풀고 오더라고요. 그 아이들에게 '배달 가면 인사부터 해라. 보든 안보든 인사해라. 언젠가는 본다. 음식은 꼭 식탁에 올려놓고 오라'고 가르쳤습니다. 고객은 작은 것에 감동하는 법입니다."

―매출이 오르던가요.

"몇 가지를 더 바꿨습니다. 오디오를 사다가 음악을 틀었습니다. 재료도 제일 좋은 걸로 바꿨습니다. 재료를 큼직큼직하게 썰어서 '옛날짜장' 메뉴를 추가하고 전단에다 '옛날 짜장 오셔서 드시면 2500원짜리 2000원!'이라고 썼어요. 70평이나 되는 식당인데 전부 배달이었으니까요. 주방장 바꾸고 좋은 재료를 썼을 뿐인데 손님들은 '역시 옛날짜장이 최고야' 하면서 감탄했습니다. 그다음엔 중고생들한테 전략을 썼습니다. 학생들이 짜장면을 시키면 무조건 곱빼기를 줬어요. 또래집단의 의사소통 속도가 굉장히 빠릅니다. 한 명만 잡으면 반 전체가 와요. 소문이 나니까 오후 3시30분에 중학교 끝나면 식당이 메어터집니다. 5시30분에 고등학교 파하면 또 꽉 찹니다. 그 아이들 짜장면 먹고 갈 때 가게 스티커를 주면, 집에 가서 붙여놓습니다."

―다들 긴축하던 IMF 때 너무 모험적인 시도 아니었습니까.

"그 집 사장님도 걱정이 태산이었어요. 주방장·배달원 월급 올렸지, 재료값 올렸지, 짜장면 값은 내렸지, '도대체 어떻게 할 거냐'고 하더라고요. 거기까지는 쉽습니다. 그다음에 원칙을 지키는 게 어려워요. 그때 원칙을 지키는 게 바로 '추진력'입니다."

"불황은 하늘이 준 기회"

―이른바 '공격 경영'입니까.

"경기가 어려울수록 기회가 좋은 겁니다. 다들 움츠리고 있을 때 제가 벌떡 일어서면 눈에 띄죠. 다들 잘 될 땐 일어서봐야 보이지도 않아요. 저는 '경기가 어렵다? 오케이, 하늘이 준 기회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중국집은 지금도 잘 됩니까.

"아니요. 망했습니다. 6개월간 영업해주고 두 달 뒤에 가보니까 다시 옛날로 돌아가 있더라고요. 테이블은 삐뚤빼뚤, 음악도 안 틀고. 주방장을 또 바꿨더라고요. '성격 더러워서 잘랐다'고 합니다. 내 참, 성격 더러운 사람 달래서 데리고 있는 게 사장의 역할입니다. 자르면 안 됩니다. 사업이 어려울 때, 긍정적인 사람은 매출을 끌어올리려고 하지만 부정적인 사람은 비용을 줄이려고 해요. 그 사장님은 밀가루값 올랐다고 2000원짜리 메뉴도 없앴습니다. 밀가루 한 포에 겨우 몇 백원 올랐는데 말이죠. 그분은 지금도 형편이 좋지 않습니다. 쉽게 절망하고 포기하면 성공 못 합니다. 어떤 분은 근처에 경쟁업체 들어선다는 소문만 듣고도 가게를 내놓습니다. 도전자가 링에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기권하는 거죠. 그런 분들은 자기 원칙이 없어요. 남의 말만 듣고 갈팡질팡하다가 퇴직금 전부 날리고 담보대출 받은 것까지 다 털려요. 최악의 경우 자살까지 합니다. 가족 전체가 무너지는 거죠."

―떡볶이 회사로 돈을 많이 벌었습니까.

"체인점이 70개쯤 될 때까지는 저축을 못했습니다. 챙겨야 할 식구가 너무 많았어요. 돈을 벌면 교회 월세부터 냈고, 부모님 생활비와 제 생활비, 남동생 둘의 학비를 대야 했지요(그의 삼형제 중 막내동생은 회사의 이사로 일하고 있고 둘째는 미국에서 신학 공부 중이다). 지금도 큰돈은 벌지 못합니다. 법정 최고액까지 기부를 합니다. 교회에 절반을 헌금하고, 나머지 절반은 여기저기 후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회사는 경기 이천의 보육원인 성애원과 굿네이버스, 전북 완주의 삼례여중 축구부 등을 후원하고 있다.

―성공의 요체가 무엇입니까.

"대형마트 정육코너에서 파를 써는 일을 하게 됐다고 칩시다. 어떤 사람은 이 일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파 써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치지만, 어떤 사람은 '어차피 돈 때문에 하는 거니까' 하면서 시계만 봅니다. 후자는 뭘 해도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에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이 뭘 해도 성공합니다."

이 사장은 "소망이 있다면 내 주변 사람들로부터 '당신과 함께해서 행복했다'는 말을 듣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들로부터는 '당신이 내 아버지여서 행복했다'는 말을, 아내에게서는 '당신이 내 남편이어서 행복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정말 어려울 때부터 함께 해 온 하청업체 사장님들이 10년, 20년 후에 '당신과 함께 일해서 행복했다'고 한다면 원이 없겠습니다. 그분들이야말로 내가 정한 원칙을 믿고 따라와 준 분들이니까요."

그의 사무실엔 책상 두 개와 컴퓨터 두 대가 있었다. 두 책상에 사람이 앉으면 등이 닿을 만큼 좁은 공간이었다. 그의 막내동생인 이준수(38) 이사와 함께 쓰는 방이다. 이 사장에게 "목회를 해도 잘할 것 같다"고 했더니, 그는 "목회를 해야 할 때가 오면 할 것"이라며 "늘 내게 주어진 것에 순종하고 감사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목회를 하면 몇 개월 내에 '스타 목사'가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