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환사랑이야기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요 13:36-38

안희환2 2011. 5. 26. 23:02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요 13:36-38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영화 가운데 [쿼바디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원래 폴란드의 작가인 센키비치(H. Sienkiewich)1895년에 쓴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온갖 삶의 풍상을 다 겪고 난 듯한 한 노인이 나자리우스라는 한 소년과 함께 산길을 가고 있습니다. 로마의 황제 네로가 로마시에 불을 지르고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박해하기 시작했을 때 초로의 노인은 지친 걸음으로 터벅터벅 길을 걷고 있습니다. 로마를 뒤로하고 그리이스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리이스의 어느 한 해안에서 고기를 잡으며 황혼을 맞이하고저 은둔의 길로 떠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산등성이에 우뚝 서있는 나무 위로 밝은 빛이 비취었습니다. 노인은 이전에도 한번 이 빛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 빛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노인은 무릎을 꿇고 말합니다.

 

""quo vadis Domine?"(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때 무릎꿇은 노인 곁에 선 나자리우스의 입이 열렸습니다.

 

"로마의 내 백성들이 널 부르고 있다." "로마의 내 백성들이 널 부르고 있다."

 

"네가 내 백성들을 버리면 난 로마로 돌아가 두번 십자가에 못박힐 것이다."

 

나자리우스의 음성은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구나" "가자! 나자리우스"

 

어디로 갈것인지 묻는 소년의 질문에 베드로의 대답은 로마였습니다.

 

" 로마로..."

 

베드로는 자기의 가던 길을 돌이켜 로마로 향합니다. 그는 거기서 체포되어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처형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 본문에 생키비치가 감동하여 소설의 영감을 얻었던 바로 그 질문이 나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애절한 베드로의 질문입니다. 뒤 이어 나오는 베드로의 장담은 죽기를 각오하고 예수를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이러한 장담을 거침없이 하고 있는 베드로가 나약한 한 인간으로 보일 뿐입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 본문에 의하면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는 마치 평행선을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불과 같은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났습니다. 참으로 야속한 마음뿐입니다. 그토록 예수님을 따라다녔건만 예수님은 자기의 충성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베드로의 불같은 항의가 튀어 나왔습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왜 본문은 이와같은 평행선을 그려내고 있을까요?

 

이 본문을 잘 살펴보면 몇가지 숨겨진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생각과 베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수난의 길은 베드로가 생각하는 죽음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홀로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속의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대속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9:22)"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러한 섭리에 완전히 복종하심으로 인류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몰아내고 영원한 새생명을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용기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제자 그 누구도 예수님의 말씀에 침묵하였지만 베드로만은 예수님의 말씀에 즉시 반응했습니다. 이 장면은 베드로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베드로를 곁에 두셨습니다.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관심과 사랑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는 베드로도 언제나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기의 사랑과 우정과 충성을 확신시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베드로의 장담은 다른 것에 기인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필리아의 사랑 즉 인간적인 사랑의 차원을 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몸을 버려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 그 아가페의 무한하고 조건없는 구속의 사랑이 베드로에게는 아직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는 참으로 과감하고 충성스럽기까지 합니다만 애석하게도 주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직 왜 예수께서 죽음을 당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대속의 은혜 즉 주님의 사랑의 정점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둘째,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않은 인간은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있게 말합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의 용기있고 가상한 태도를 칭찬하고 감격하기는커녕 오히려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가슴 터지는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관원들에게 체포되실 때 그 서슬퍼런 상황에서도 베드로는 자신을 돌볼 생각을 하지 않고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내리치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용기있고 충성스럽고 담대한 베드로의 모습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 있어서 그것은 구속의 사역을 막는 한낱 치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26:52)고 충고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보실 때 베드로도 한낱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지는 베드로의 장담이나 칼을 빼어든 베드로의 담대함도 어쩌면 그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연약함을 보셨습니다. 그가 비록 호언장담하며 예수님의 뒤를 따르겠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의 눈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빌라도의 법정에서 자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게 될 베드로의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용기와 능력, 자신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베드로에게는 인간적인 나약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가르치심을 통하여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베드로는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은 후에 비로소 베드로는 담대하고 위대한 설교를 통하여 예수를 죽인 자들을 고발하고 예수의 구주되심을 선포하였습니다.(2:1-47)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세상을 향하여 담대할 수 없습니다. 사탄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는" 이 때에 바른 신앙 안에서 세상을 향하여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때에 가능합니다.

 

셋째, 인간의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 때문에 더욱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키십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셨기 때문입니다.(4:15)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꿇는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입니다. 자신은 죽고 그 죽음으로 인하여 오직 주님만을 의지한다고 고백할 때 주님의 사랑은 폭포와 같이 우리에게 쏟아질 것입니다.

인간은 나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강하신 오른 팔로 우리를 잡으시고 오늘도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내가 죽을 때에' 내 빈 그릇에 채워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거하기 원하십니까? 주님 앞에 손들고 나오십시오.

 

"첨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