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환 목회단상

어머니 장례식에 가지 못한 염동근 목사님/ 안희환

안희환2 2011. 4. 10. 07:16

어머니 장례식에 가지 못한 염동근 목사님/ 안희환

 

 

신학대학을 다니던 시절 저는 또래의 친구들보다는 나이가 많은 형들과 많이 어울렸습니다. 동근이 형, 현호 형, 영학이 형, 광진이 형, 승우 형, 채균이 형 등등. 덕분에 애 늙은이가 된 것 같은 느낌도 있었지만 많은 것을 배울 수도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고 생활하다가 소명 받아 신학의 길에 들어선 형들이었기 때문인지 또래들보다 더 진지하게 파고드는 모습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사람은 동근이(염동근) 형입니다. 동근이 형은 저보다 11살이 많았습니다. 늘 친절했고 자상했던 동근이형과는 급속도로 친해졌고 함께 다니는 일이 많았습니다. 물론 식사도 같이 하고 기도도 같이 하는 그런 사이였습니다. 사실 적은 나이차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에 구애 받지 않고 친형제처럼 지냈습니다.

 

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동근이형은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인천 쪽에다 개척을 하였습니다. 사모님은 선교원을 운영하셨는데 교회 살림과 주일학교 전도에는 보탬이 되는 것 같았지만 염목사님이 목회에 전념하는 데에는 어려움으로 작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틈날 때마다 염목사님이 어린아이들 차량 운행을 해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염목사님은 최선을 다해서 목회를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대림역 근처의 개척교회 담임목사로 풀타임 사역을 시작한 것입니다. 비록 지하교회였고 교인들도 없었지만 최선을 다해 기도했고 전도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전도하기 위해 함께 놀아주었고 아내는 그들을 위해 떡볶이 등을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지상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염목사님의 놀랄만한 전화를 받은 것은 그 무렵이었습니다. 이제 목회를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미국에 유학을 가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미 염목사님은 40대 후반이었는데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는 염목사님의 모습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또 한 면에서는 염려가 되었습니다. 충분한 재정 지원을 받는 상태도 아닌데 온 가족이 미국으로 가면 생계유지나 제대로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염목사님의 결심이 확고하였기에 가지 말라고 만류하지는 않았습니다. 걱정된다는 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다만 가기 전 마지막 송구영신예배 때 제가 담임목사로 있는 교회에 와서 함께 예배도 드리고 성도들에게 안수 기도도 해준 다음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2월 31일 저와 함께 모든 성도들에게 안수기도를 해 준 다음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 후에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다른 분들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소식을 듣는 것이 다였습니다. 미국 내에서도 원활한 교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인지 염목사님 소식을 정확히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주석 목사님이 미국에서 한국에 방문했고 이목사님을 통해 염목사님 소식을 조금 더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며칠 전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수화기를 통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처음에 친구 이름을 댔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염목사님 목소리였습니다. 통화를 하면서 금방 이전의 동근이형과 저와의 관계로 돌아왔습니다. 염목사님은 제 안부를 이것저것 물었고 저는 있는 그대도 답변해주었습니다. 다음으로 제가 염목사님 안부를 물었는데 사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염목사님은 얼마 전에 한국에 들어오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위독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됐냐고 물었더니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저와 전화 통화를 하는 전 날에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한국 생각이 많이 났고 전화번호를 뒤져서 저에게 전화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얼마 후 영주권이 나오는 상황에서 지금 나오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에 형제들이 만류를 했고 그것을 받아들여 들어오지 않은 상황입니다. 준비해서 오노라면 이미 장례식은 다 끝나는 시점이기도 하고요.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하고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못한 염목사님의 마음이 많이 무너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통화를 하다가 먹먹해지는 제 마음을 진정시키느라고 애를 먹었습니다. “사는 게 뭔지 모르겠다”는 염목사님의 말 한 마디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던 염목사님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다니 정말 많이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염목사님의 마음을 위로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현재의 아픔이 훗날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원동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랜만에 들은 반가운 목소리였는데 가슴 아픈 사연을 듣게 되니 마음이 무겁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염목사님과 그 가족들 가운데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주시리라 기대합니다. 다시 얼굴을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 맑은 웃음 가운데 만나게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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