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를 멋지게 다듬어준 여자/안희환
대단한 여자들(11)
드와이트 무디는 역사상 최고의 설교자 중 한명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입니다. 그의 활동은 왕성했으며 다양한 부분에서 그 역량을 드러냈습니다. 그가 시작한 주일학교는 한해가 지나기도 전에 600명이 넘었고 그 다음해에는 1500명이 되었습니다. 드와이트 무디가 YMCA의 순회 총무로 일할 때는 군인들을 위한 사역자로 보내졌는데 125,000권이나 되는 찬송가를 배부해주었습니다.
드와이트 무디가 목회하던 시카고의 교회는 크게 성장하는 교회였고, 수주일 동안 집을 떠나야 했던 복음전도 사역은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했으며 드와이트 무디를 더욱 유명한 사람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미국만이 아닌 영국에도 미쳤으며 그를 통해 시작된 성경학교는 많은 이들을 탁월한 지도자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 이면에 숨어 있는 드와이트 무디의 모습은 훌륭한 점 못지않게 나쁜 점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던 무디의 아버지는 별 볼일 없는 석공이었는데 그나마도 무디가 4살 되던 때 파산당한 채 세상을 떠났고 무디는 교육다운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학교 교육이 없는 상태에서 중노동을 해야 했던 드와이트 무디은 교양과는 담을 쌓을 수밖에 없었고 그저 돈을 버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런 무디가 어느 날 침례교 선교회를 찾아갔을 때 보게 된 사람이 있는데 그가 후에 무디의 아내가 된 엠머입니다. 엠머는 그때 한 반을 맡아 가르치고 있었는데 까만 눈과 까만 머리를 가진 우아한 여성이었습니다. 무디는 그녀처럼 주일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는데 가르칠 수 있는 실력이 없었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북을 쳐서 학생들을 모으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후에 무디는 자신이 직접 주일학교를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내다버린 화물차 안에서 모였습니다. 드와이트 무디는 북을 치며 아이들을 모았는데 그 모임은 후에 1500명이나 되었고 엠머는 그 주일학교를 돕는 일에 자원하였습니다. 무디와 엠머의 사랑은 깊어져가고 1860년 드와이트 무디는 엠머와 약혼을 하게 되며 1862년에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됩니다.
원래 드와이트 무디의 어머니는 엠머를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영국 출신에다 침례교 신자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무디가 아무리 엠머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해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엠머는 이 일을 불쾌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대응을 했는데 먼저 그녀가 한 일은 무디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었습니다. 몇 차례의 편지가 오고 간 후 엠머는 개인적으로 무디의 어머니를 여러 차례 방문하였고 마침내 마음을 얻어냈는데 두 사람 사이는 가까운 친구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결혼 후 엠머는 드와이트 무디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처음에 무디는 설교 중에 하나님의 진노를 강조하였는데 차차 아내의 지혜로운 조언과 도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더 많이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또 성경도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무디의 설교는 점점 훌륭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엠머는 무디의 성격에도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무디는 거칠고 무례하고 칼날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던 사람인데 엠머 덕분에 점차 부드러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예의범절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문제점을 가지고 있기도 했습니다. 급한 성격이 불쑥 튀어나오거나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있었으며, 아내에게 예고도 하지 않은 채 낯선 손님들을 끌여 들여 정신없게 만들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엠머는 불평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 잘 적응해나갔습니다. 무디는 늘 그런 아내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엠머에게도 감사하고 있음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처럼 훌륭한 아내를 존중하지 않을 남자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거침없는 무디는 훌륭한 아내 앞에서는 자신을 더욱 추슬렀습니다. 오락이나 스포츠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무디가 가끔 즐기는 것이 있는데 경마차타기에 출전하는 것이었고, 그때 무디는 엄청난 속도로 빠르게 말을 몰아 경마차에 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했는데 그렇게 달리다가도 엠머가 보고 있을 때는 속도를 줄여 정상이 되게 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무디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엠머는 결코 무대 전면에 등장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 대신 편지들을 처리하고, 무디의 전화를 받아 메모하는 등 남편을 도울 수 있는 일을 하다 보면 하루가 다 지나가곤 했지만 엠머는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감당해나갔습니다. 자녀들의 교육도 엠머의 몫이었습니다. 무디는 어느 날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미국에서 가장 과대평가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 아내는 가장 과소평가되고 있다.”
무디 성경학교가 시작되기 전 드와이트 무디는 이사진과 교수들 사이의 계속적인 말다툼을 보면서 큰 실망을 했고 자신이 맡고 있던 복음전도협회 회장직을 사임하려고 사표를 제출하였습니다.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무디도 마음이 상하고 지친 것입니다. 엠머는 남편의 행동을 전해 듣고 성경학교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19페이지나 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또 남편 무디에게는 사표를 철회한다는 내용의 전보를 치게 했습니다. 얼마 후 성경학교가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유명한 무디 성경학교입니다.
1899년 드와이트 무디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남편을 잃은 엠머의 건강은 급속도로 쇠약해졌습니다. 시어머니에게 썼던 편지에 “어머니의 아드님은 내게 보석같은 존재입니다”라고 했을 만큼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엠머이기에 무디의 죽음은 큰 상실감을 안겨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신경염을 앓고 난 후 오른손을 쓰지 못하게 된 엠마는 2년간 왼손으로 글씨 쓰는 연습을 하다가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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