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의 재산 환수에 찬성하며/ 안희환
친일파로 맹활약하고서도 오히려 후손대대로 부를 소유하고 누리는 사람들에 대한 본격적인 제재가 시작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면서 일본 사람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이 나라에 해를 끼친 사람들과 그 자손들이 이 나라 안에서 잘 먹고 살산다고 하는 것은 확실히 문제 있는 것이기에 친일파의 재산 환수 방침에 대해 환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을 진행할 기구는 친일반민족행위재산조사위원회(이하 친일재산조사위,위원장 김창국)로서 8월 18일 조사위 사무실에서 현판식을 갖고 공식 출범하게 됩니다. 김창국 위원장을 비롯하여 9명의 위원이 지명된 상태이고 사무국 위원의 경우 법무부, 경찰청, 재경부, 국세청, 산림청 등에서 파견된 공무원 등 모두 104명에 달합니다.
조사대상은 특별법에 규정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1904∼1945년 취득한 재산을 우선 조사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매국노와 일왕으로부터 작위 또는 은사금을 받은 자, 귀족원이나 중의원 의원, 중추원 참의 이상’이 우선 조사대상이며, 을사오적(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과 정미칠적(송병준, 고영희, 이병무, 이완용, 이재곤, 임선준, 조중응) 등은 정밀 조사의 대상입니다.
일단 위에 언급한 인물들 중 일부 인사들의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완용
이완용은 매국노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는 그런 인물입니다. 한일합방 당시에 내각 총리대신이었으며 러일전쟁시에 일본이 유리한 것을 내다본 이완용은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하였고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주동합니다. 그 덕분에 을사오적의 대표적인 인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됩니다. 대표라는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을사보호조약에 대한 반대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을 때 이 조약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헤이그 밀사 사건입니다. 일본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고종의 황제직 이양을 요구하는 무지한 행동을 하는데 한심하게도 이 나라의 신하였던 이완용은 그에 동조하여 고종의 양위를 건의하기도 합니다. 그것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말입니다.
결국 압력을 견디지 못한 고종은 황태자에게 양위를 하게 되는데 이에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서 이완용의 집에 불이 나서 전소하고 맙니다. 이완용의 가족들은 이토의 보호로 왜성구락부에 들어가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만큼 이토는 이완용을 아꼈던 것입니다. 이 나라의 신하이면서도 일본을 유익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나라를 비참하게 몰고 간 그는 일본인보다 더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2. 송병준
이완용과 더불어 친일파의 쌍두마차라고 볼 수 있는 송병준은 처세술의 달인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인물입니다. 민씨세력에게 줄을 대어 중추원 도사, 사헌부 감찰, 양지현감 등의 관직에 올랐으며, 갑신정변 이후에도 민씨세력들의 도움으로 영월군수, 흥해군수, 은진군수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난 후 권력 배경을 잃어버린 송병준은 러일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일본에 머물러 있게 되는데, 러일전쟁 당시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공작대금을 받고 귀국합니다. 그의 임무는 친일단체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유력인사를 친일화하고 러일전쟁에서 동학이 일본에 협력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군내 정세와 주요 인사들의 동향을 수시로 일본에 보고하였습니다.
이완용 내각이 들어갔을 때 송병준은 농상공부대신이 되었는데 이준 열사의 헤이그밀사 사건이 터지자 송병준은 칼을 차고 어전회의에 들어가 고종에게 엄포를 놓았습니다.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 천황에게 사죄하든가, 통감 이토에게 무릎을 꿇어 사죄해야 하는데, 이토에게 사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만일 그럴 경우에는 폐하를 죽이고 자살하겠다." 이로써 송병준은 자신이 이 나라의 신하가 아닌 일본의 신하임을 분명히 하였던 것입니다.
3. 박제순
박제순은 상당히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통리아문 주사, 주차천진종사관, 청국전권대신, 외부대신, 호조 참판, 예조팜판, 이조참판, 전라도 감사, 충청도 감사 등이 그의 경력입니다. 박제순이 충청도 감사할 당시에 농민전쟁이 일어났는데 농민군 탄압에 지대한 공을 세우기도 합니다.
박제순의 친일행적으로 대표적인 것은 을사조약 당시 외부대신으로 조약을 체결했던 당사자라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박제순은 처음 고종과 각료들이 회담할 때에 조약의 체결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주장을 분명히 해야할 때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이 이토의 뜻대로 진행되도록 방치하였습니다. 을사조약의 공로로 박제순은 부총리격인 참정대신이 됩니다.
박제순은 일본의 신임을 많이 얻었는데 이토가 이완용 내각을 조직했을 때 박제순은 중추원 고문이 되었고, 일진회 출신 송병준이 실각한 후에는 그 자리를 이어 내부대신이 되었으며, 이완용이 이재명에게 부상을 당하여 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내각총리의 임시서리로도 활약하였습니다. 그런 경력으로 인해 한일합방 후에는 [조선귀족령]에 의해 자작 칭호를 받은 데 이어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경학원 대제학이 되었던 인물이 박제순입니다.
4. 이지용
이지용은 고종의 종질이며 사도세자의 5대손입니다. 그는 다양한 벼슬을 했는데 그다지 평이 좋지 못한 인물로서 뇌물을 받고 군수직 15개를 팔아 탄핵을 받기도 합니다. 그가 친일파로 비난을 받는 것은 먼저 그가 한일의정서에 조인하였기 때문입니다. 한일의정서는 군사용 부지를 허용하고 일본 군 사령관의 서울 주둔을 허락하는 조약입니다. 일본이 이 나라를 짓밟을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한일의정서로 인하여 국내에서 반대여론이 높아지자 정부에서는 그를 일본국 보빙대사로 특파하였습니다. 귀국 후에는 법부대신, 규장각학사, 판돈녕부사, 교육부총감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이지용의 친일매국행위는 1905년 내부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찬성하여 조인함으로써 그 절정에 달합니다. 그는 을사조약으로 명실상부한 매국노의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이지용은 1910년 일본으로부터 백작의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에 임명됩니다. 일제의 훈장을 세 개나 받았으며 한일합방 시에는 백작을 수여받습니다. 특이한 점은 한일합방 후 날마다 도박으로 소일하며 지냈다는 점입니다. 나라를 팔아넘기고 얻은 엄청난 재산을 도박판에서 아낌없이 날린 그의 모습은 매국노의 풍모로서 조금도 아쉬운 점이 없습니다.
네 사람을 언급하고 말았지만 이들 말고도 우리나라가 어려움을 당하는 시기에 일본에 빌붙어 출세하고 많은 재산을 축적했던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해방 후에도 재산을 자손들에게 대물림하였고 그 자손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지 아니 느끼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거대한 부를 지금도 소유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을 한 분들의 후손들이 어렵게 사는 것과 대비를 이루면서 이 나라의 비극적인 면을 부각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다른 면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업적을 떠올리려 하면 생각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만 이번 친일파 후손들에 대한 재산 환수 작업은 부디 성공적으로 끝나기를 기대해봅니다. 제대로 세워나가지 못한 역사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발목 잡는 암초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나라의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는 것에 욕심을 보태어 정치적인 도구로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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