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설교방법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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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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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1
1.연구의 동기와 목적 ---------------------------------------1
2. 연구 방법과 범위 한계성 ----------------------------------2
제1장 현대설교의 위기에 대한 고찰 -----------------------------4
제1절 설교의 정의 --------------------------------5
제2절 설교자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해부족 -----------------11
제3절 청중과의 상호 관련성 부재 ----------------------------13
제4절 경청의 문제 ----------------------------------------14
제2장 21세기의 케뮤니게이션으로서의 설교와 멀티미디어 ----------15
제1절 커뮤니케이션의 종류 ---------------------------------15
1. 나와 나의 커뮤니케이션 ------------------------------15
2. 나와 너의 커뮤니케이션 ------------------------------16
3. 매스 커뮤니케이션 ----------------------------------16
4. 나와 물체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17
5. 나와 하나님의 케뮤니케이션 --------------------------17
제2절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설교----------------------------18
1.커뮤니케이션의관점에서 설교에 대한 정의 ----------------18
2. 커뮤니케이션의 일반 원칙 ---------------------------19
3.설교에 있어서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요소 ------------------20
4. 설교의 커뮤니케이션 과정-----------------------------21
5.설교의 커뮤니케이션과정에서 시청각멀티미디어 사용의 효과--22
6. 경험의 삼각추에 비춰본 멀티미디어 사용의 필요성---------23
제3절 현대 멀티미디어 사용 상황과 문제점 --------------------26
1. 멀티미디어의 정의 ----------------------------------26
2. 예배 안에서의 멀티미디어 활용 상황--------------------27
3. 설교소비자의 도전에 직면한 시대의 문제-----------------28
4. 멀티미디어 활용에 대한 신학의 부재 문제----------------31
5. 목회자의 영성문제 ----------------------------------32
제3장 21세기를 위한 설교방법의 실제적 대안들--------------------33
제1절 21세기 설교자들 의식에 있어서의 패러다임 쉬프트--------33
1. 미디어의 변천에 따른 설교방법의 혁신------------------34
가.구전시대----------------------------------------35
나. 구덴베르크이후시대------------------------------35
다. 마르코니 이후시대-------------------------------36
2. 청중의 병화에 따른 설교의 혁신-----------------------38
가. 포스트모던적 설교-------------------------------39
나. 구전,문자,영상적 커뮤니케이션의 종합----------------40
다. 쌍방향적 설교-----------------------------------41
제2절 멀티미디어 활용시 주의해야할 사항들-------------------42
가. 인격적 미디어로서 설교자-------------------------43
나. 멀티미디어로서의 설교자--------------------------45
다. 미디어와 메시지---------------------------------48
제 3 절 각 교회의 영상매체 활용 사례들---------------------52
1.송파제일교회 박정길 부장집사 (고등부 )-----------------52
2.오륜교회 ------------------------------------------53
3. 지구촌교회 (중등1부 )-------------------------------53
4. 분당교회 (중고등부 )----------------------------------54
5. 장충교회 (고등부 )------------------------------------55
6.전농교회 (중고등부)----------------------------------56
7. 성덕중앙교회 (유초등부 담당)--------------------------57
결 론-----------------------------------------------------58
1. 설교에서 멀티미디어 활용의 필요성------------------------58
2. 멀티미디어를 위한 평신도 사역자 양성----------------------62
3. 필요한 장비들------------------------------------------63
가. 빔프로젝트----------------------------------------64
나. 카메라, 편집 및 자막 기기-----------------------------65
4. 마지막 제언--------------------------------------------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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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대비한 설교방법에 관한 연구
서 론
1.연구의 동기와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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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가 다가오고 있다. 많은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세상의 모습만이 아니라 교회의 모습에도 나타나리라고
생각된다. 특히 설교에서 교회는 과연 어떻게 변할 것이며, 어떠한 대비를 하여야할 것인가? 요즘 멀티미디어 시대라는
사회문화를 고려할 때, 교회의 설교에 있어서도 이 문화를 도외시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 변화에 부응하여
교회에서의 설교문화도 어떠한 변화를 이뤄가야 할 것인가? 이는 심사숙고할 중요한 문제로 여겨진다. 지금까지 설교문화는
어떠했었고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미리 살펴볼 때 미래를 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여긴다.
더욱이 대다수의 사역 자들은 설교에 대해 전통적인 면만을 생각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그러한가하는 점과 그러할 때의
문제점을 심층 살펴보고 그에 대한 대안을 찿아봄으로 많은 사역 자들에게 실제적인 면에서의 사고해볼 기회와 해결책을
나누는데 일익을 감당하고 싶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만들고 그에 따라 논지를 전개시켜가려 한다. 우선 설교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고, 그 다음 기존의
전통적인 설교방법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다.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으로의 설교에 대한 이해와 다가올 멀티미디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하는 미래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삶의 모습과 문제점을 살펴보고 그에 따른 설교를 위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은 무엇인지, 각 문제들에 대한 실제적인 대안을 모색해봄으로 이 논문을 마무리 하려한다.
이러한 질문을 통해 이루고자하는 목표는 미래사회에서의 바람직한 설교형태에 대해 실제적으로 살펴보고, 그에 따른 현재
설교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지금부터 미리 해결책을 강구해 가자는데 있다.
본인은 왠지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예배와 설교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이는 어떤 단체의 수련회를 참석하고서 부터이다.
그래서 앞으로의 예배나 설교에도 이러한 요소들이 많이 도입이 되어야 하리라고 믿고 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
삶의 문화가 계속 바뀌고 있는데, 유독 교회만이 변화를 부인하고 고집하고 있다면, 그마만큼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수용성은
여지없이 낮아지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이다.
교회는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선교의 장이어야 한다. 모든 사람을 교회로 이끌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그 사람들의 삶의
양식을 고려하고 접촉점이 될 수 있을 분위기나 환경을 마련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참된 섬김의
모습이라고 본다. 기존교인들을 위한 교회라기 보다 새로올 교인들을 위한 교회여야 바람직한 성숙한 교회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점에서 본인은 멀티미디어를 교회에 과감히 도입해야 함을 주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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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구 방법과 범위 한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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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을 통해 멀티미디어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이것이 각 교회의 설교의 장에 활용된다면, 주님의 지상 명령인
땅끝까지의 복음 전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교회에서 지도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지도자가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한 교회의 전체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논문을 통해 많은 지도자들에게 멀티미디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주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논문을 위한 자료를 모으는 방법에는 기존 논문집, 신문기사, 인터넷 통신에서의 자료, 관련 서적, 월간지, 세미나자료 등을
중심으로 모으려고 한다. 그리고 자료를 분석하는데는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따른 멀티미디어를 사용한 말씀의 가장 효과적인
전달이라는 점에 두어, 이를 위한 내용을 전개해 나가려고 한다.
이 논문은 본인이 앞으로 사역현장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의 과정이므로 앞으로도 많은 개선의 여지가 있으리라
여긴다. 실제로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예배, 설교 등에 아직 경험이 많이 부족한 상태이다. 부족하기 때문에 연구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보다 진보된 멀티미디어 활용과 효과를 얻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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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현대설교의 위기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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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설교의 위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이고 그 원인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일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최한구 교수는 그의 기독교 커뮤니케이션론에서 복음의 본질인 커뮤니케이션의
결여현상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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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주일예배에서의, 목사의 설교를 "재미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많은 청소년들이 교회에서 배우는 것을
실생활과 멀리 떨어진 것으로 생각하여 추상적인 개념으로 복음을 이해하고 있다. 장년들도 설교나 교회의 가르침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이가 적지 않다.---복음의 진리는 본래의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이해가 안되어도 좋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점도 많았지만, 그는 우리에게 충분히 계시(설명)되어 졌다. 이처럼
예수는 그 자신이 수육의 복음이었음과 동시에 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청중의 편에 서서 그들 속에 파고드는 방법을
썼다는 것이다. 이 수육의 과정 즉, 커뮤니케이션이 막히는 것을 죄라고 부르고 이 커뮤니케이션이 성립되는 것을 화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커뮤니케이션은 복음의 본질이요, 복음은 케뮤니케이션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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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체에 대한 이러한 회의적이 반응은 점차로 평신도들 쪽에서 심각하게 제기해오고 있다. 옥한흠 목사는 그의 저서
'평신도를 깨운다'에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을 보면 설교에 들어 있는 선포와 교육의 기능이 둘 다 쇠퇴해 가고 있지
않나 하는 강한 우려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고 하면서, 1975년 여름 전국 주요 도시에 있는 192교회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설교가 당신의 영적 생활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한
592명의 학생들 중 74%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만 가지고 전체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설교가 교육적 기능 면에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반성하게 되는 일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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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대 설교의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21세기의 다변화된 사회 속에서는 더욱 심각할 것이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 설교 방법 역시 그 사회에 맞게 잘 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다가오는 21세기를 준비하며 특별히 설교에서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려면 먼저 설교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하고 거기에서부터 출발해야 겠다. 그것을 기초로 바른 개선 안을
찾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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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설교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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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영어에서 설교란 말을 번역할 때 그 용어들이 서로 다른 어근에서 나왔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설교(Sermon), 설교하는 것(Preaching)은 어근이 각각 다르다. 영어의 Sermon은 라틴어의 sermo에서 나온 말로서 본래는 담화나
연설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근대적인 의미로는 교회에서 예배의 중심으로서의 설교형식을 갖춘 연설로 이해되었다. 이때
Sermon은 넓은 뜻으로서 설교를 말할 때 쓰여진다.
그러나 Preaching은 설교하는 행위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말씀의 선포 또는 복음내용을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preach란 말 자체는 라틴어의 praedico에서 나온 말로서 선포하다, 찬미하다, 예언 하다의 뜻을 가진 말이다. 이 말은 예언을
말하거나 신적 계시인 말씀을 선포하는 의미를 가진 뜻이다
여기서 어원적 고찰에서 설교의 의미를 살펴보았다면 여러 학자들의 정의를 통해 좀더 깊이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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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설교가 무엇인가라는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 설교학자들이 많은 시도를 해보았으나 "말씀의 봉사라는 의미의
사도적 개념이나,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엄숙한 부분인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는 말씀을 크게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아래에서 사전과 설교학자들의 정의를 몇 가지로 생각해보기로 하자.
앤드류 블랙우드는 미국 감독교회의 대설교가인 그는 설교라는 것은 필요한 어 떤것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선정된 인물이
성경의 거룩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사무엘 볼베더는 미국 칼빈신학 설교학 교수인 그는 설교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구두로 행하는 선포라고 정의했다. 필립
브륵스는 인간에 의한 인간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이라 정의했다. 에반스는 설교는 인간에 대한 구원의 선포이다
했다. 영국의 다드교수는 설교는 자기의 말을 전달하는 교훈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를 선택하여 보낸 분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다 즉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설교이다. 펠프는 말하기를 설교의 순수한 개념은 성경에 포함된
종교적 진리를 사람들의 마음을 향해서 연설하는 것이라고 했다 호핀은 설교란 공예배시에 기독교 진리를 계획적이고
구체적으로 확신을 가지고 선포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가르비는 설교의 긍극적 근거를 말하지 않고 설교란 영생을 위하여 인간의
인격을 통한 신적 진리의 전달이다. 라고 정의했다
포사이드는 설교는 복음의 연장이고 복음의 선포이다. 설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중단 없는 행위로서 그것이
계속적으로 반복되어 선언되는 것 이라 했다 짐그레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 주고 설명해 주는 것이다. 고도고상은 설교란
하나님께서 부름 받은 설교자가 성령의 인도에 의하여 성경의 말씀을 고백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증거 하는 것이다.
헤릭 존슨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사람을 구원하려는 계획과 목적에서 사람을 감동하도록 권면하는 법있는 강화이다
라고 정의했다 정성구는 설교란 구속주인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을 만나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임택진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행위이다. 박희천은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조리있게 잘 표현하여 양떼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끼치는 것. 곽선희는 설교란 계속적인 하나님 말씀에 대한 재해석이다. 천병욱은 설교란 그리스도가 교회에 대하여
말하고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말을 계속하는 은혜의 수단이다. 이주영은 설교는 하나님꼐서 세우신 사람을 통하여 전달되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정의하면서 덧붙이기를 설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선포하는 것 곧 구속사역이
그 중심이 되는 것인데 이것을 선언하고 선포하여 죄인의 마음속에 성령의 역사가 임하여 구원역사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참된 설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박준서는 성경적 의미에서 설교란 성경 본문과 오늘의 삶의
상황을 이어주는 교량이요 오늘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말씀의 의미를 새롭게 재발견하는 작업이요 오늘의 상황을 말씀의 빛
아래서 밝히 조명해 주는 것이요 또한 설교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하는 상황에 적용시켜주는 작업이다 라고 했다.
이 외에도 많은 학자들이 설교에 대한 정의를 내렸으나 그 뜻은 대동소이하고 다 옳은 듯한 표현이다 어쨌든 설교에 대한
정의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설교는 초자연적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계시된 진리의 선포란 점이다.
위의 정의를 인정하면서도 우리 한국장로교회가 전통적으로 내려온 헤릭존슨의 정의를 채용하고 그의 정의에 대한 해석을
함으로써 설교가 무었인가를 더욱 확실히 드러내 보고자 한다. 존슨이 말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사람을 구원하려는
계획과 목적에서 사람을 감동하도록 권면하는 법 있는 종교적 강화이다 라는 정의를 채용키로 한다. 다음 내용은 헤릭 존스의
정의에 대한 곽안련 박사의 해석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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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설교는 강화라는 부분을 생각해보자.
설교는 어떤 형식이 되었든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이다 그런데 설교는 여러 가지 형식도 많고 방법도 많다. 예컨대 개인전도,
노방전도, 등의 무형식적 설교이다. 또 기도회 때 하는 즉석 설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논하는 설교란 법칙이 없이
무원칙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고 안수 받은 목사가 공식 예배시에 설교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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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설교자가 종교적 영적 강화라 함은 이런 뜻이다.
즉 이 세상에는 종교적 진리가 아닌 다른 많은 진리가 있다. 예컨대 과학에서 증명한 것은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수학, 화학,
천문학, 철학, 등의 진리가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학문으로 연구하며 받아들인다. 이런 것들은 설교에 이용하여 도움을 줄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이런 세속적 진리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시에 이런 내용을 설교하는 것은
설교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설교는 종교적 진리를 증거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종교적 진리란 말을 쓸 때 현세와 내세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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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로, 이 세상에는 기독교 외에도 많은 종교들이 있다.
그런데 이런 종교들의 내용은 기독교의 진리와 같은 것이 아니고 그와는 반대된다. 세상의 일반 종교는 모두가 자연 종교이며
자율주의적 종교에 불과하기에 계시종교이며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종교적 진리라고 해서 다
설교라 할 수 없다. 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생명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 이여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기초를 둔다라는
의미는 설교 할 때 매 구절마다 성경구절을 인용한다는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같은 제목 아래 유사한 성경 구절을 나열한다고
설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기초를 둔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성경 본문에 충실해야 된다는 의미이다.
성경은 물론 종교적 진리이다. 그러나 어떤 구절의 핵심이 무엇인지 분명히 모른 채 다만 그 본문에 나타난 현상만 가지고
설교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설교 일 수가 없다. 예컨대 마3:16절에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란 한 구절을 인용하여
비둘기의 특징과 성격, 모양세로부터 여러 가지 교훈을 한다고 하자 . 물론 종교적으로 좋은 강연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이런
것은 설교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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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설교의 목적은 인간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전해야 한다.
설교는 구원과 양육이 포함되어야 한다. 설교는 불신자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천국백성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훈련시키며 성화 과정으로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설교자는 그 설교가
얼마나 훌륭한 웅변인가를 보여주는 기회가 아니다. 연극장에서와 같이 반시간 정도 연극을 하는 것도 아니다 . 참된 설교자는
파선된 배를 보고 그들을 건져내려는 결사적인 노력과 열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 사람들은 겉모양으로 보아서는 모두가
신사숙녀이지만 저들의 마음 가운데는 온갖 이기심 탐욕, 증오심, 죄악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침체되어 있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 그러므로 설교자는 강단에 설 때마다 청중들에게 그 설교가 마지막 설교이며 최후의 설교로 알고 증거 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일 일을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지금 죽어 가는 자에게 최후의 설교를 한다는 심정으로 열과 정성을
다 드려 설교에 임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심령을 움직이는 설교를 원하고 있다. 설교의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 이것은 생명을
내걸고 해야할 사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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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설교는 감동을 받도록 권면 하는 것이다.
감동하도록 하지 않는 설교는 설교라고 할 수 없다. 설교를 듣고 심령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 설교는 듣는 사람들의
의지에 호소하는 것이므로 새로운 믿음 깊은 회개 , 진리에 대한 확신, 경건한 생활에 대한 새로운 결심이 일어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설교는 교육과는 다르다. 설교는 지식전달이 목적이 아니라 그 영혼을 움직이고, 의지를 움직이고 , 인격을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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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설교는 방법론도 중요하다.
설교는 은혜 받은 데로 말하고 싶은 데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설교는 노방전도나 개인 전도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물론 개인적으로 전도하면서 성경을 풀어서 가르칠 수도 있고, 형식이 없이 어디든지 노방에서도 설교는 가능하다. 그러나
설교는 예배에 있어서 중심부로서, 예배순서에서 행해져야 한다. 그 이유는 개혁교회의 예배의 중심은 설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교는 설교 법에 따라야 하며 수사학적으로 꾸며지고 조직된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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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설교는 강화의 형식을 띤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 중에는 글도 중요하나 역시 구두로 하는 말이 중요하다 .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뜻을 전하는데
는 눈, 손, 동작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래도 입으로 하는 말이 가장 효과적이다. 저술가나 화가는 눈으로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화초 장사나 향로 장사는 후각을 만족케 한다 곽안련 박사의, 말 같이 설교자는 사람들 앞에서 손짓 얼굴 표정, 몸짓으로
사람들의 눈을 이용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진리를 넣어주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그의 말로서 그들의 귀를 두드려 더욱 강하게
그들의 영혼에 호소한다. 이것들 보다 더 힘있고 유효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인격이다 라고 하였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인격은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큰 힘이 된다. 이 세상에서는 인격의 힘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 설교자는 그의 인격으로
사람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가령 우리가 어떤 설교자의 감동적 설교를 속기로 해두었다가 나중에 읽었다 하자. 그 때
너무나도 평범한 설교가 어떻게 커다란 충격과 감격을 주었는지 이상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는 인격을 빼버리고 설교
원고만 읽는 다면 별로 감동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직접예배에 참석하고 설교자의 온 몸으로의 설교를 보고 듣는다면 그
말씀 앞에 녹아지게 된다. 그리고 같은 원고라도 누가 설교하는가에 따라서 그 반응도
무척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모두가 설교자의 인격과 관련된다. 설교는 단순히 말이 아니고 인격에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이라야
효과적이며 능력 있는 말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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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을 몇가지로 정리해보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성경 본문에서 말하는 내용으로, 인간을 구원할 기본적인
목적으로,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며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기서 가장 큰 영향력은
설교자의 인격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정의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설교의 방법론의 문제이다. 설교의 방법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으나, 여전히 눈, 손, 동작 등에 머물러 있는 것이 문제이다.
현대와 다가오는 시대는 멀티미디어 시대이다. 멀티미디어의 첨단 장비가 일상생활에 보편화되는 시대이다. 사회가 이런
장비들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전하고 생명을 구원할 무엇보다도 중요한 설교에 있어서
멀티미디어의 활용을 도외시한다면 너무나 시대에 뒤떨어진 21세기의 설교자가 되지 않겠는가? 21세기의 설교자는 21세기의
문명의 이기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21세기의 설교자다운 설교자라고 할 수있을 것이다.
이런 멀티미디어 장비의 활용이 왜 필요한가? 현대 설교의 위기를 살펴봄으로 그 필요성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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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설교자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해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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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설교는 얼마나 정의된 바대로 이뤄지고 있는가? 리챠드 젠슨 교수는 우리는 '문자 이후시대(Post-Literrate)'에 살고
있으며 영상매체가 '읽는 문자'를 대체시키고 있기 때문에 설교자는 청중의 변화된 상태를 인식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커뮤니케이션의 역사이고, 커뮤니케이션은 말씀의 역사로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고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하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성서적 표현들은 말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근원적 의미를 갈파한 대표적 사상으로 평가된다. 즉 말씀의 일방적
선포만으로 설교자의 책임을 다 할 수 없다. 설교에 있어서 그 내용이 어떠하냐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어떻게 전달하느냐 하는
것은 똑같이 중요하다. 설교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열심히 익혀야 한다. 효과적인 전달이 없이는 당신의 생각을 생생하게 남에게
전달할 수 없다. 투수가 그 볼을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볼의 방향과 속도가 정해지듯 연설가는 그의 전달방식에 따라 그의
연설의 힘과 활력이 정해진다. 리이드는 그의 저서 "설교의 위기" 첫 장에서 "오늘날 당면하고 있는 설교의
경시 현상을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문책에 귀를 기울여야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최근에 나타난 설교비평을
종합해서 말하고 있다.
①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말이나 고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설교자들에게 있다.
②오늘날 설교는 대개 실증이 나고 지루하며 재미가 없다.
③오늘날의 설교는 듣는 사람의 형편과 무관한 것이다.
④요즘의 설교는 과감한 것이 못된다.
⑤오늘날의 설교는 상호전달이 안 된다.
⑥오늘날의 설교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⑦이제까지 설교가 너무 강조되어 왔다.
설교에 있어서 전달이 그처럼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설교자들은 이 분야를 너무나 경시하고 있다. 설교의 내용은 준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면서도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서는 전혀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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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 청중과의 상호 관련성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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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엄마 쥐가 자식들에게 세상살이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데 그들 앞에 집채만한 고양이가 버티고 서
있는 게 아닌가. 새끼 쥐들을 겁을 먹고 벌벌 떨었지만 엄마 쥐는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개처럼 멍멍 직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쥐가 짖어대는 소리를 듣더니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멀리 가버리는 게 아닌가. 엄마 쥐가 의기 양양하게 새끼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외국어의 중요성을 이제 알겠지?"
고양이가 말을 걸었을 때 엄마 쥐는 날이 갈수록 확산되는 어떤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엄마 쥐가 직면한 도전은
문화가 다른 청중과 의사소통을 해야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엄마 쥐는 적어도 한 가지 잇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청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것이다.
설교자는 말씀을 선포했다는 것만으로 청중들이 그 말씀을 모두 전달된 것으로 이해하거나 다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려면 대화 당사자간에 깊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인식이 필요하다. 다양한 삶 속에
똑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려 하는 것은 가능성이 전혀 없는 시도가 되고 만다. 청중과의 접촉점이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의도와 삶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책임이 따른다. 즉 설교도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행해져야 한다. 성공적인
설교전달이 되기 위해서는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대상파악이 중요하다. 소외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전달해야 한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원리처럼 목회자는 청중들의 삶에 뛰어 들어와야 된다. 다양한 청중을 무시하고 일방적인 전달의 설교는 무책임한
것이다. 설교는 단순히 지식의 분배가 아니다. 그 보다 큰 무엇인데, 전인은 양측에 다 관계된다. 만일 우리가 이 점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설교는 실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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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절 경청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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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가 산업화 사회라면, 21세기는 정보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우리의 삶의 스타일을 바꿔 놓았다. 현대인에게는 한가지
결과만을 가져오는 직선적이고 일방적이며 독백적인 전통적인 메시지의 전달이 어렵게 되었다. 오늘날 정보매체를 통해 수십
가지 메시지가 동시에 복합적으로 쏟아져 나올 때 관심 있는 것에만 자신을 개방하고 그 밖의 다른 것에는 무관심하고 있다.
깊이 사고하지 않고 풍요로움에 길들여진 몸은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기질로 변해 버렸다. 젊은 층들은 세속적인 물결로 순수성은
없어지고 쾌락주의나 부정주의적인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더 나아가 현대인의 사고방식은 이기주의와 무관심으로 교회의 문화가
소외 당하고 있고 복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현실이다. 이는 교회의 위기로 청중들을 능동적인 청취자가 되도록 유도해내야
한다. 설교자는 설교를 전하기에 앞서 청취하는 자세를 가지고 설교에 임해야한다. 설교자의청취에 있어서도
케뮤니케이션으로서의 설교에 있어서 일방적일 수 없고 쌍방적이어야 한다. 설교자는 설교하는 일을 자신이 만들어 낼 수가
없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청중 속에서 동시에 쌍방적으로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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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21세기의 케뮤니게이션으로서의
설교와 멀티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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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커뮤니케이션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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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설교의 위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달방법에는 소홀히 하고 설교의 내용에만 관심을 기울여서 발생한 것이다.
깊이 반성할 것은 설교의 전달 방법이다. 이 설교전달 방법은 지금 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시대에 매우 중요하다. 변화된 사회에
변화된 문화가운데 사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달 방법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 즉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바른 이해와 설교에의 과감한 도입을 고려해야 한다.
현대 신학, 교육학, 심리학 등에서 유행어처럼 쓰여지고 있는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말을 사전에서
찿아보면 통신, 전달, 교통, 연락 등의 뜻으로 나와 있다. 즉 두 사람 이상이 무엇인가를 나눈다는 뜻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한 사람의 마음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과정 전체'를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커뮤니케이션은 어떤 형태로 행하여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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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와 나의 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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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의 교제 즉 생각도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이다. 학자들은 이것을 '내적 회화'라고 부르고 있다. 이런 나와 나의
커뮤니케이션이 있음으로서 새로운 사상이니 새로운 의미나 새로운 해석이 창조되는 것이다.
교육은 이 '개인적 케뮤니케이션'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는 문제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소위 주입식 교육관은 '개인적
커뮤니케이션'을 다분히 무시한 것이고 창조적 교육관은 이것을 충분히 이용하려는 새로운 교육사상이다.
시청각교육도 사람의 마음에 이 '개인적 커뮤니케이션'을 어떻게 유발시킬 것이냐 하는 도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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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와 너의 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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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교통이다. 발신자와 수신자가 뚜렷하다. 이 경우 발신자와 수신자가 되는 기회(혹은 가능성)가
서로 균등한 것이 이상적이다. 교사와 학생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설교자만이 일방적으로 가르치려는 태도(전달식)는 좋지
않다. 좋은 교사는 자기가 발신자도 되고 동시에 수신자도 될 줄 알아야 한다. 즉 너와 내가 골 발신과 수신의 기능을 나누어
갖는 것이 이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며 이런 때에야만 정상적인 교육이 성립된다. 시청각 교수법은 이런 '나와 너의
커뮤니케이션'을 보다 효과적으로 맺어주는 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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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매스 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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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콤'이라고 보통 불리우는 이 용어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약칭이다. 집단을 상대로 하는 교통을 말한다. 신문, 라디오
등은 현대 '매스콤'의 대표적인 매개체들이다. 방송하는 사람은 한 명이었으나 그 방송은 수십만명이 동시에 들을 수가 있다. 즉
개인과 집단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진 것이다.
시청각 교재는 '매스콤'의 전위대로 등장하고 있다. 교회교육이나 선교운동이 이런 위대한 방법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그 앞길은
암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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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와 물체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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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은 꼭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총 소리를 들으면 지긋 지긋한 전쟁시절을 상기하게
된다든지 슈바이처의 사진을 보면 아프리카의 원시림을 생각하게 되는 따위는 모두 물체를 상대로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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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크리스챤들이 산간 벽지에서 십자가를 세운 작은 교회당을 보았을 때 흐뭇해지고, 성전에 장식된 제단(예배 센터) 앞에
섰을 때 거룩함을 느끼는 따위는 센티멘탈리즘(감상주의)이 아니라 인간이 물체나 환경에서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받는가를
입증해주는 예이다.
5. 나와 하나님의 케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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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것은 모두 횡적인 교통이었으나 이것은 종적 혹은 종교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다.
이 커뮤니케이션은 신앙으로만 가능하다. 이 교통을 막는 것을 죄라고 부르며 이 교통이 성립되는 것을 화해라고 하고 그
유일한 매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임은 기독교의 중심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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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의 여러 유형을 살펴볼 때, 설교와 연관돤 것이라고 한다면 매스커뮤니케이션이 될 것이다. 설교자 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에게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은 매스커뮤니케이션에 맞춰 그
문제점과 대책을 찿아야 할 것이다. 매스커뮤니케이션에서 지적한 것처럼 시청각교재 즉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설교는 그
효율성을 볼 때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으므로 많은 활용이 이뤄져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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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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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커뮤니케이션의관점에서 설교에 대한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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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뮤니케이션은 설교의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설교학을 이수하고 나서 커뮤니케이션까지 연구하는 설교자는 드물다.
커뮤니케이션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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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커뮤니케이션의 관심 영역이 넓은 이유는 "모든 인간은 커뮤니케이션의 바다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제 각각이다. 어떤 이론가들은 커뮤니케이션을 언어, 그림, 숫자, 그래프같은 기호를
수단으로 하여 정보, 사상, 감정, 기술 등을 전달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를
통해 신도에게 전달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이론가들은 커뮤니케이션은 그것을 통해서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전달수단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관점에서의
설교는 사회적 영향력이나 통제력 안에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신념,태도, 가치관, 행동 등을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시키도록
노력하는 활동이라 해석할 수 있다.
행동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커뮤니케이션은 언어에 의한 기호를 통해서 수신자에게 어떤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한 자극이라
정의 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설교는 설교를 듣는 신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미리 의도한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한
자극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이론은 케뮤니케이션 결과에 그 판단 기준을 둔다. 예를 들어서, 커뮤니케이션 작용은 사람들 간의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서로 만날 때에만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이론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하에서의 설교자의 의미와 신도의 의미가 서로
만날 때에 설교가 비로소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 때 신도의 삶과 생명의 말씀과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설교는 아예
그 기능을 상실하는 셈이 된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의 전과정은 하나의 이론이나 관점만으로 완전히 설명 될 수 없다. 접근 방법이 다양함을 볼 때,
커뮤니케이션 연구는 설교 작업에 새롭고 신선한 통찰력을 불어넣어 줄 풍성한 결실의 잠재성이 있는 분야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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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커뮤니케이션의 일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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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도표를 가지고 설명한다.
첫째, 발신지란 커뮤니케이션 세트라고도 하는데 인간의 두뇌를 말한다.
가령, 김 선생이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가야 합니다." 하는 말을하려고 한다면 이것이 메시지가 된다.
( 메시지 ) → ( 신호 ) → ( 메시지 )
발신지 → 발신기 → 통 로 → 수신기 →목적지
↑
( 잡 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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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시지는 발신기(이 경우는 입)를 통하여 신호(음파, 음성)가 되어 발신된다. 그것이 통로(공간 혹은 전화같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를 거쳐 철수의 수신기(귀)에 전달되고 목적지인 철수의 머리에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게
된다.
그런데 이 도중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는 것(잡음)이 있다. 어떤 방해조건이 삽입되어 철수에게는 "일요일에는
교외(郊外)에 나가야 한다"라는 언뚱한 메시지로 잔달될 수 있다.
이 방해 조건은 그때 그때에 따라 여러 종류이겠으나 어쨋든 커뮤니케이션이 성공되려면 이 방해조건을 제거하는 것이 기술적인
문제이다.
각자의 환경, 지식, 경험 등에 따라 잡음(방해조건)이 다르긴 하지만 좌우간 사람에게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았거나 잘못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즉 멀티미디어를 사용한 시청각 교재 사용은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에 있어서 잡음(방해조건)을 제거하여
순조로운 커뮤니케이션을 이룩하는 훌륭한 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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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설교에 있어서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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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선포의 근거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인간의 사상이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므로 말씀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전달자는 성서기자의 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며 여기에서 석의나 주해 그리고 성령의 역할이 강조되는 것이다. 둘째는 시대적 배경과 듣는 회중을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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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커뮤니케이션의 근원은 설교자이다. 복음의 의미를 전달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 따라서 설교자가 얼마만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가가 중요하다.
"메시지"--설교에 있어서의 메시지의 특징은 메시지 원천이 전달자의 사상이나 경험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설교자는 단순한 전달자이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경청자가 되어야 한다.
"매체와 통로"--설교의 메시지는 매체와 통로를 통해서 회중에게 전달된다. 특별히 예배라는 통로 가운데서 회중에게
전달된다.
"회중"--회중이란 설교자가 매체나 통로를 통하여 전달해준 암호화된 메시지를 받아들여서 자기 나름데로의 관점을
가지고 해독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설교자가 설교를 행하는 동안 회중의 사역은 수동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능동적으로 듣는 것이요, 들을 때에 설교자가 전하려고 하는 그것에 대하여 설명을 요구하고 또 설교자를 격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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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설교의 커뮤니케이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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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메시지 착상, 형성과정: 설교 커뮤니케이션 과정에 있어서 핵심은 설교자이다. 따라서 설교형식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석의, 주해, 묵상이며 또한 회중에 대한 바른 이해와 관심이다.
2)메시지의 암호화 과정 : 형성된 메시지를 적당한 기호를 통하여 공식화하는 작업이다. 여기서는 적절하게 전달할 수 있는
적절한 언어와 표현 양식을 찿아서 메시지를 구성해야 할 것이다.
3)메시지 전달 : 준비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이다. 메시지의 전달 효과를 높여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진실성과
성실성이다.
4)메시지 해석 : 전달된 메시지가 회중들에게서 반응되는 과정을 말한다.
5)회중 : 설교자는 복음을 통해서 회중들로 하여금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여 하나님과 온전한 커뮤니케이션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데 설교의 초점이 있다. 그러므로 회중들에게 나타날 설교의 분명한 효과를 염두에 두고 그 목표에 맞는
설교형태를 적절하고 다양하게 구사해야 한다.
6)피드백 : 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소식을 전하려면 상대방은 끊임없이 반응을 보인다. 돌아오는 과정을 피드백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것은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설교사역을 성공적으로 감당하려면 설교자는 회중으로부터 나오는 메시지인 피드백을 바르고, 정확하게, 그리고 신선하게
파악해서 적합한 복음의 메시지를 적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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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설교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시청각 멀티미디어 사용의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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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가르칠 수 있다. 지도를 말로하는 것보다 보여주면 잠깐이지만 환히 알 수 있다.
나. 시청각 멀티미디어 사용을 하면 배운 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즉 인상적인 교육을 할 수 있다.
다. 시청각 멀티미디어 사용은 배움을 명백하게 한다. 당나귀를 본 아이에게 말로 설명하면 어렵지만 보여주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라. 시청각 멀티미디어 사용은 흥미를 일으킬 수 있다. 학습의 힘은 흥미이다. 흥미가 없으면 주의가 집중되지 않기 때문에
배우려는 의욕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 시청각 멀티미디어 사용은 정서를 움직이는 강한 힘이 있다. 말로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보면 감정적인 영향을 더 빨리 받게
되는 것이다. 영화관에서 울어 눈이 부어 가지고 나오는 사람을 흔히 보지 않는가! 시각의 효과는 굉장한 것이다.
바. 배운 것을 재확인하는 역할을 한다. 즉 시각을 통한 학습이 이미 머리 속에 있던 어떤 개념을 견고하게 하는 콩크리트의
역할을 한다.
사. 시청각 멀티미디어 사용을 통하여 세계를 교실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즉 시간과 공간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 시청각 멀티미디어 사용은 대용의 경험의 역할을 한다. 경험을 통한 배움이 효과적이나 실제로 경험할 수 없는 일이 많다.
이런 경우 시청각 재료는 실제 경험을 대신하는 대리 경험의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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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시청각 멀티미디어 사용은 의사 전달에 있어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에서처럼 큰 효과가 있다. 특히 커뮤니케이션에서
그 사이의 잡음이,되는 것을 제거하는데 탁월하다. 분명한 것을 쉽고 확실하게 전할 수 있는 좋은 전달방법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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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험의 삼각추에 비춰본 멀티미디어 사용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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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에드가 데일박사는 그의 저서 "시청각 교수법"에서 경험의 삼각추라고 불리우는 도표를
발표하였다. 이 도표는 시청각 교재들을 분석하고 그 성과에 대한 신중한 연구와 검토 끝에 그려진 것이다.
이 그림에서 아래로 내려올수록 그 교수 방법은 구체적인 것이며 위로 올라갈수록 추상적이다. 즉 위로 올라감에 따라 차차 그
효과가 적어진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언제나 절대적인 공식은 아니다. 그때그때 달리하되 큰 참고가 되고
기본적으로 이해해야될 문제이다.
우선 아래로부터 3층까지는 자기가 무엇을 해보는 것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위로 4층부터 8층까지는 자기가 직접
움직이지는 않고 누가 하는 것을 보거나 듣는 성격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맨 꼭데기 두 층은 상징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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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밑바닥은 직접적인 경험들이고 가운데 토막은 간접적인 경험들이고 꼭데기는 상징이니까 간접의 간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구 이 모두가 경험에 의한 교수법이나 효과로 볼 때 어떤 차이가 있음을 곧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험의 삼각추를 볼 때 멀티미디어를 사용한 설교가 훨씬 전달의 효과가 큰 것을 볼 수 있다. 예전엔 융판을
사용하고, 여러 시청각 보조재를 사용하여 하였다면 이제는 문명의 이기인 멀티미디어를 사용한 설교가 보편화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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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어
상징 추
구 상
체 시각적 적
상징
적 레코오드
라디오, 사진
영 화
텔 레 비 젼
전 시
견 학
연 시
연 극 적 경 험
모 형 ( 계획적 경험 )
직 접 적 목 적 적 경 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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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 현대 멀티미디어 사용 상황과 문제점
시청각 사용 방법은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좋은 역할을 한다. 오늘날 이 시청각 자료는 많은 발전을 이루어 멀티미디어를
통해 이뤄지게 되었다. TV와 같은 영상시대에 매체들에 익숙하여 성장한 영상세대들에게 있어서는 인쇄매체들이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진다. 빠른 화면 전환과 화면을 가득 메우는 현란한 색상의 조명들, 화려한 의상과 적극적이고 뇌쇄적인 출연자들의
몸놀림등---. 이같이 멀티미디어의 지대한 영향을 박고있는 시대상의 변화에 따라서 점차 설교의 강단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보여주는 설교, 대화식 설교, 파트너 설교등이 새로운 설교전달 방식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멀티미디어의 물결
속에서 드라마와 영상을 이용한 차세대 목회의 움직임들도 일어나고 있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 크릭교회'(빌하이벨스
목사 시무)는 멀티미디어를 잘 활용하는 교회로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예배시 멀티미디어를 활용하는 교회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서울 상계동의 성덕중앙교회(김준수 목사 시무)와 서울 홍제동의 홍성교회(이근수 목사 시무), 서울 사랑의
교회(옥한흠 목사 시무)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며, 그 수는 해마다 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1. 멀티미디어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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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의 사전적인 뜻은 '여러 가지 매체', 또는 '다중매체'이다. 멀티미디어(Multi-media)란 복합, 다양함의 뜻을 가진
multi와 매체를 뜻하는 media의 합성어로서, 다중매체 혹은 복합매체란 뜻이다. 미디어의 종류도 셀 수 없이 많을 뿐 아니라
계속 새롭게 발전해오고 있다. 미디어를 가리켜 정보의 전달과 처리, 보존을 위한 수단을 말한다고 한다면 멀티미디어는 새로운
미디어라고 하기보다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미디어에서 단일한 출구로 검색될 수 있도록 통합하여지는 것을 말한다.
넓은 의미의 멀티미디어란 인간의 의사소통의 여러 수단들 즉 음성, 동영상, 그림, 문자등을 통합시켜주는 시스템이다. 즉
음성이나 영상, 그림, 문자 등의 여러 미디어를 모아서 하나로 통합된 것이 멀티미디어이다.
반면 좁은 의미의 멀티미디어란 음성, 영상 문자 등의 다양한 미디어를 컴퓨터라는 하나의 매체로 통합하여 상호 작용성 즉,
대화성 등의 총체적인 기능을 제공하는 컴퓨터 시스템으로 정의한다.
2. 예배 안에서의 멀티미디어 활용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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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익 목사는 설교의 권위를 회복하려면 설교의 다양성과 전달 방법의 갱신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전달방법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대인들은 TV에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의식 전달 방법이 유일한
설교방법이라는 고정 관념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때로는 시청각 교재를 활용한다든지 드라마나 대화의 방법도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예배 특히, 주일 밤예배나 교육기관 예배에서 오에치피(OHP)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서서 각
교회들은 움직이는 영상(동화상)까지도 볼 수 있는 시설들을 설치하여 사용하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에치피(OHP)와 슬라이드 프로젝터로 대표되던 주일학교의 시청각교육은 이제 드라마와 영상으로 탈바꿈되면서 장년에배까지
적용범위를 넓히고 있다. 문제는 목회자들이 뉴미디어시대에 걸맞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어느 시점에 시도할 것인가와
소프트웨어를 제작,운용할 수 있는 영상일꾼들의 양성과 헌신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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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설교소비자의 도전에 직면한 시대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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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세게는 3세대의 소비자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전쟁 전 세대로 46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전후세대(Baby
Boomer)는 46-64년 사이의 사람으로 30-50까지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64년 이후(Baby Buster)에 태어난 신세대들이 같이 살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사고가 완전히 다른데에 문제가 있다. 그들은 전쟁이나 심한 경제적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전
세대보다는 낙관적이며 적극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많은 정신적인 우울함과 염려와 스트레스를 겪는
세대이다. 60년대에 비하여 갑절로올라간 이혼율은 그들의 이와 같은 면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들이 특징은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으로부터 장점들을 취하기를 원하지만 그들의 동료로들로 부터 이상하다고 생각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따라서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보수적이며 인간 지향적이어서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기를 원한다.
또한 이들은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현재를 중요시하며 모든 일에 즉각적인 결과를 기대하는 방법을 찿으면서 성공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직업과 보수에서 만족을 얻기를 원하는 이들은 일에 있어서도 전 세대와 다른 점을 보이는데, 부머들은 결코
'일' 중독자들이 아니다. 즉 부머들은 일 때문에 일에 얽메이지 않으며 목표 때문에 목표에 얽메이지도 않는다. 그 전 세대들은
일이 성취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했지만 부머들에게 있어서는 일의 양질이 중요하다. 그들은 "해야할 가치가
있는 일은 잘할 가치가 있다. "는 금언을 따라 일하는 자들이다. 이전 세대가 종종 일을 본질적이지만 즐겁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한 반면 부머들은 일이란 성취감을 주는 긍정적인 것으로 본다. 따라서 그들은 직무수행의 목적들(기능) 뿐 아니라
쾌적한 장소와 바람직한 환경(형태)을 원하며 진행과정 자체를 즐긴다.
일을 함에 있어서 부머들은 회사나 조직을 찬성하는 편이 아니다. 비록 그들이 성실하다고 할 지라도 그들이 가장 성실해야 할
대상은 그들 자신이다. 그들은 회사를 위해서 중대한 일을 성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회가나 사장이 설정한
목표에는 잘 반응하지 않고 자신들이 함께 참여하여 설정한 목표나 목적에는 반응을 잘하는 특성을 보인다. 따라서 그들은 팀
접근법이나 분담된 지도력에 의해서 경영되는 회사에서 일하기를 원한다.
한편 부머들의 교회관을 살펴보면 그들은 교회를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본다. 즉 그들은 교회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가? 교회가 자신의 부족을 충족시키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 "그들은 시간과 노력과 돈을 투자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서 무엇인가 가치있는 것을 원한다."는 말은 이같은 부머들의 실용주의적 시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해결의 열쇠가
되는 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부머들은 그들의 사생활에 대해서 직장이나 사회의 간섭을 거부하는 것처럼 교회의 간섭도
거부한다. 그들은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기를 원하며, 자신과 무관하게 결정을 내리는 교회에는 일반적으로 참석하려고 하지
않는다. 부머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정하려하기 때문에 "강단에 의해 지배되는" 교회보다는 "사람들에 의해
유도되는" 교회에 참석하려고 히고, 과거와는 달리 자기에게 맞는 교회를 찿아 떠나는 일을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한다.
그들은 돈에 대한 강박적인 호소에 싫증을 내며 죄책감이나 전통으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완고하고
권위주의적인 목회자를 거부하며 그들의 교회에서 자신들의. 목소리가 반영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이러한 부머들이 교회의
주도적인 세력이 될 21세기에 있어서는 진지함과 열심, 그리고 이제까지의 재래적인 목회패턴만으로는 그들을 교회에 붙잡아두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50세 이상된 사람들이 세계 지도자적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러므로 기존 체계에 과히 어긋나지 않게 왔다. 그러나
지금부터 전후세대가 지도자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런 시대에 교회가 당면하는 도전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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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이동시대의 교회는 영혼이 쉬어가는 휴게소 형태로 되는 도전이다.
지금의 새로운 시대는 너무 많이 이동하는 시대이다. 자기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직장, 학교 등에 의해 이동하는 시대이다.
이러한 현대 시람들은 한 교회에 오랫동안 있지 못하다. 따라서 종신교인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런 사람들은 한 교회에서 2-4년
정도로 만족한다. 이들이 좋게 느끼는 것은 세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교회에 대한 부담이 없다. 둘째, 목사님의 설교를
바꿔가면서 들으므로 좋다. 셋째,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서 좋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교파의 개념이 없어진다. 따라서 교회가
영혼의 휴계소라는 말이 나온다.
둘째, 특정 설교자를 선택하고 자기에게 맞는 예배시간을 찾는 도전이다.
지난 25년 동안 미국의 주류 교단 교회는 쇠퇴하고 주거지 이동에 따라 편리한 교회, 편리한 시간을 찾게 되었다. 사람들은
교단의 전통보다는 필요와 만족도에 따라 선택하게 된다. 따라서 특정 설교자에 의해 교회를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에배시간도
나에게 맞추게 된다. 예배시간에 내가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고 싶은 시간에 드리는 예배시간을 찾게 된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예배를 드리자는 말도 있다.
셋째로, 종합병원 형태의 교회에 집중하는 도전이다.
이들은 교회를 선택할 때 종합병원과 같은 교회를 선호하게 된다. 비록 내가 가지는 않을지라도 묘지까지 있고, 여러 기관이
제대로 갖추어진 교회를 찿게 된다. 그래서 교회에 여러 프로그램이 있어서 활동도 많고, 많이 배울 수 있다고 생각되는
교회를 찿아가게 된다. 그리고 교회의 연령이 고령화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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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제 상황에 접할 때, 21세기의 교회의 설교자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고,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좋은
방법을 개발해 나가야 한다. 앞으로 주역이 될 지금의 신세대들은 일컬어 영상세대라 한다. 영상세대인 그들을 효과적으로
섬기는데는 역시 교회내에 영상 즉, 멀티미디어를 사용하는 방법이 보편화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이는 교회에서 가장 중요시
된다고 하는(물론 모든 예배의 순서가 다 중요하지만) 설교에의 과감한 도입을 시도해 나갈 때 설교사역을 보다 시대에 맞게
효과적으로 감당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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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멀티미디어 활용에 대한 신학의 부재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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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로 말미암아 도래한 정보화 사회는 근대주의의 최대산물로서 영적인 지식은 초자연적인 것으로서 배제하고 있어 이성을
통해서 분석가능한 자연적 지식만을 철저히 추구한 결과, 자연과 은총의 조화를 깨고 태어난 정보화사회는 매우 위험한
현상이라고 진단한다.
컴퓨터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많은 사람들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결과는 무엇이나 틀림없는 것처럼 맹신하거나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정된 명령어들만 수행하도록 만들어진 전자장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컴퓨터 자체는 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컴퓨터를 움직이는 소프트웨어에는 그것을 만드는 프로그래머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 신앙관이 어떠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컴퓨터는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소프트웨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휴먼웨어이고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피스토스(신앙)웨어일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무한한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들을 모으시고 훈련하시고 사용하신다. 단지
하나님은 인간의 믿음의 크기에 대하여 제한을 받으실 뿐이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하여 바로 아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에서 출발한다. 이러므로 컴퓨터를 활용하는 것에 대하여 교회는 분명한 신학적 토대를 갖추고 있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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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목회자의 영성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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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충분하리 만큼 자료들이 구축되지 않았지만 조만간 컴퓨터는 상당한 위력을 바휘하게 될 것이다. 만약 지금까지의
신학 논문들이 데이터베이스에 수록되 있다고 가정해 보라 논문의 제목과 함께 내용이 담겨져 있는 자료들이 마치 책자를 들추듯
펴 볼 수 만 있다면 아니 우선적으로 소위 검색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내가 원하는 내용이 어느 회사에서 출판한 무슨 책 몇
페이지에 있다는 사실 한 가지 만이라도 상당한 도움을 줄 것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료들을 내 것으로 삼아 생명을 살리는데 유익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컴퓨터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말씀 연구보다는 급한 김에 이용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
목회자는 컴퓨터로 인하여 영성에 해가되지 않도록 스스로 노력하여야 한다. 목회에 꼭 필요한 부분만을 응용하여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가능한한 교회직원이나 평신도들에게 사역을 분담시켜 단계적인 조직을 편성하고 교회에서 필요로하는 분야의
직업들을 점차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것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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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21세기를 위한 설교방법의 실제적 대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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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절 21세기 설교자들 의식에 있어서의
패러다임 쉬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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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대는 문자시대를 탈피해 영상세대로 볼만한 세대이다. 즉 멀티미디어 세대인 만큼 각종 정보와 음악 및 온갖 류의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가 집약된 매스미디어에 익숙해지고 있는 시대의 아들들에게 구태의연한 방법을 적용시킨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비효율적인 방식이 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시청각적인 요소를 가미한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설교형태는 아마도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성경적 전파기재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피설교자들을 살리기도 하고 죽일 수도 있다는 경계심만 늦추지 않고 21세기적 패러다임 쉬프트를 이뤄낼
수만 있다면 그것은 대단히 혁명적인 위력으로 21세기를 전진해가는 복음의 도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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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디어의 변천에 따른 설교방법의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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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효 사정권 밖의 방랑자들이 많아질 때 종래의 구태의연한 틀을 수정하지 않는 것은 자칫 교회를 화석화할 위험이 충분히
있음을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이다. 사도바을의 이런 고백은 의미있다.
"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9:19-23)
21세기는 급변하는 기술사회가 될 것이 확실시 되는 가운데, 문명의 이기들을 적절히 이용하지 못하고 방치한다는 것은
게으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복음 전파를 위한 설교의 내용이나 형태면에서의 현명한 취사선택을 거친 변화는
미래세대를 위한 복음의 교두보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하기 보다는 그 물결을 얼마나 슬기롭게
타느냐에 따라서 설교문화가 만개하거나 쇠락하는 역사를 이뤄내게 될 것이다.
발전된 설교문화를 계속 이뤄가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미디어의 변천사를 살펴보고, 앞으로 사용할 미디어의 변천에 따른
설교형태가 어떻게 되야 할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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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구전시대
구전시대에는 수사학의 원리에 충실하였다. 특징은 현대와 달리 특정한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중복현상이 많이 나타난 점이다.
이때의 설교는 아래의 그림처럼 원형적이고 반복적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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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구덴베르크이후시대
구전문화에서는 반복과 회전이 전형적인 양식이었지만 문자문화에서는 메시지의 전달이 서론부터 결론에 이르기까지 곧장
이어지는 직선형태를 띄게 되었다. 메시지의 단락 단락은 반복적이지 않고 상호 대체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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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마르코니 이후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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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니가 무선전신를 발명한 후, TV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면서 인류는 읽고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에 기초하여 인식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오늘날에 와서는 TV화면 위에 나타난 이야기들이 실제적 현실보다 더 와 닿는 사실로
이해되곤 한다. 따라서 현실 자체가 전파매체에 의하여 형성된 메시지에 위협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위기는 단지 일상
생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가치체계에까지 찾아 왔다.
TV는 이미지와 사운드라는 독특한 효과를 지닌다. 여기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조정적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of
modulation)에 대하여 매우 민감해진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자신이 마치 보이지 않는 카메라 앞에 있듯이 말하고 행동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물에 대한 이해력과 집중력을 키우기도 전에, TV가 개발한 플래쉬 커팅(Flash
Cutting,속보편집) 기술력에 의하여 아무 노력 없이도 메시지를 이해하게 되고, 또한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말하는 가? 뉴미디어에 근거한 메시지를 전하는 기술이 발달화면 할수록, 인간은 본능적 감각 사용에 익숙하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인간 자신의 내적 이해 기능은 저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뉴미디어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환경가운데 TV를 제작하고 있기 때문에, 높은 시청률을 확보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타사와의 경쟁가운데 살아남기 위해서 전통적으로 유지해 온 인간의 높은
윤리관을 경쟁적으로 깨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청자들이 윤리적으로, 합리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없도록 장면을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회전시킨다. 내가 TV를 보는 것이 아니라. TV가 나의 눈과 귀를 조정하는 것이다. 나는 TV메시지에 완전히 함몰된다.
그래서 일할 때 현대인은 전문가가 되지만, TV 앞에 앉아 있을 때는 의사 앞에 환자처럼 되어 버린다. 자기가 여러 의사가운데
한 의사를 선택하여 찾아갔지만 그 후에는 철저하게 그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채널을 고정시킨 후에는 TV가 기획한 메시지가
시청자의 눈과 귀를 통해서 철저히 입력된다.
만일 TV시대에도 여전히 구텐베르크 인쇄문화에 입각한 직선적 설교로 일관한다면, 메시지 전달의 성공률은 감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 원고가 듣는 이들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자신의 원고를 충실하게 그리고 매우 세심한
주의력을 가지고 따라올 것이라는 전제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면 실제로는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설교자가 자신의
원고에 집착하는 것처럼 집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설교의 직선적 논리의 전개에 제대로 따라가기보다는 이리저리로
헤메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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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TV시대의 설교의 구성은 텔레비젼 커뮤니케이션 형식을 참고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것은 뉴스, 광고, 오락, 드라마
등을 계속적으로 시청할 수 있도록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는 플래쉬(Flash,속보)를 연속적으로 편집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앞뒤의 우선순위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또한 인과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중요한 것은 관심을 끌만한 흥미로운
메시지가 있느냐는 것이다. 좋은 프로그램이 준비되었으면 사전예고 방송이 나간다. 어떠한 메시지일지가 선보여진다. 단편성,
비연속성, 일시성, 즉흥성이 그 특징인바, 이미 TV의 표현은 포스트 모던적 문법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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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살펴본 것처럼 멀티미디어 문화에 익숙한 시대에서의 설교형태는 플래쉬 커팅(Flash Cutting,속보편집)을 잘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속보 형식을 중간 중간에 잘 유지하여 설교에 계속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용어로만
멀티미디어 용어를 사용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멀티미디어를 설교에 도입하여 활용해 본다면 더욱 효과적 일 것이다. 왜냐면
직접적인 프래쉬 커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멀티미디어를 사용할 때도 역시 이 원리를 주의해야 한다. 무작정 영상을
활용했다고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 구성에 있어서도 플래쉬커팅의 성격을 잘 살려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진부한 내용이
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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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중의 변화에 따른 설교의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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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받는 세대가 어떤 세대인지를 분석하는 일은 필요한 것이다. 복음의 내용은 성경적인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하지만, 그
내용의 수용을 위한 밭을 탐색해서 접촉점을 발견하고 씨를 뿌려야함을 놓쳐선 안된다. 복음의 대상을 고려하는 설교는 매우
유익이 있다. 즉 그 대상에 따라서 유연한 복음의 내용이 결정되어지고 그에 따른 선포가 이뤄져야 한다. 이혼 결손가정 등으로
앞으로 생겨날 비정상적인 형태의 청중들을 감안하여 복음의 핵심 이외의 부수적인 접촉점들의 개발은 불가피할 것이다.
다가오는 시대는 정보화 멀티미디어의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를 염두에 두고 설교의 변화를 시도해 나가야 한다.
멀티미디어 시대를 다양한 각도에서 규정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구전, 구텐베르크, 마르코니 시대를 동시적으로 한꺼번에
경험하는 시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또한 말과 글과 몸짓, 즉 소리와 문자와 영상 매체를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전달하는 ' 쌍방향적 커뮤니케이션 시대이기도 하다. 따라서 멀티미디어 시대의 설교는 이러한 미디어 환경이 익숙해가고 있는
21세기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 양식을 신학적으로 성찰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매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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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포스트모던적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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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적 설교를 살피는 것은 새로운 미래를 낙관적으로만 보지 않고 반성하기 위해서 이다. 모더니즘은 객관적 과학의
발전과 보편적 도덕과 법의 발전, 이들이 지니는 내적 논리에 의거한 자율적 기술을 추구하여 왔다. 또한 이러한 지식을
일상생활의 합리성과 인간해방을 추구하기 위해서 사용하자는 것이 계몽주의적 모더니즘의 프로젝트였다. 이와 같은
"계몽주의적 프로젝트"에대한 거부하는 몸짓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간단히 말해서 근대주의가 추구한 프로젝트를
부정하고 넘어서려는 노력이다.
모더니즘에 기초한 20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시대가 얼마나 합리적 사고에 의하여 비인간화되고, 기술발전에 의하여
환경이 파괴되고 있는지를 철저하게 경험하고 있다. 근대적 낙관주의의 붕괴를 보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이러한 붕괴는 이
세계가 단순히 낙관주의를 상실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모더니즘의 산물들이 인류를 향해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것으로
변모하고 있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러한 상황하에 있는 오늘의 인류에 대해 테리 이글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지금 근대주의의 악몽으로부터 깨어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던 다원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근대주의는
그 동안 이성으로 모든 것을 조정했으며 총체성을 맹신해왔다. "
인류의 이러한 자각과 근대주의를 청산하려는 포스트모던적 정신은 21세기에 들어가면서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즉 멀티미디어
시대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철저히 이루어 가는 새로운 세기가 될 전망이다 .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설교의 포스트모던적 특징은 어떠한 것인가? 포스트모던적 설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격에 비추어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메타이야기(meta-narrative), 즉 추상적 이야기를 거부한다.
둘째, 총괄적인 담론을 거부한다.
셋째, 단명, 불연속, 단편을 긍정한다.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가 음악유선방송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뮤직비디오'를 소개하는 MTV의
존재를 잊고 있다고 러셀존스는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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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구전,문자,영상적 커뮤니케이션의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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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탈피한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설교는 여전히 '말'로써 전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기조로 하고 있는 한, 서론으로
시작하여 본론을 거쳐 결론으로 맺는 직선적 전달은 여전히 유효한 방법이다. 그러나 멀티미디어 시대 사람들은 그 이전의 어떤
시대보다 하나의 설명을 오래 듣는 것을, 더욱이 논술적 주장을 펴나가는 듯한 산문식 전개에 대해서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라도 긴 것은 참지 못한다. 짧고 또한 속도감이 있어서 강렬함을 체험해야 한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설교는
5분마다 듣는 자를 사로잡아야 한다. 그러므로 한 편의 설교는 3-5번 정도의 플레쉬 커팅이 요청된다.
설교의 주제는 한 가지로 충분하며, 단순하고 명확해야 한다. 이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설교의 단락마다. 종결 적으로
나타나서 처음 단락에서 놓치더라도 그 다음 단락에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각 단락은 같은 주제를 전하고
있을지라도 설 다른 짧은 '이야기'(Flash Cutting)을 통해서 듣는 자들 스스로가 이미지화 혹은 영상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대신 주제를 이끌어가는 말들이 선언적이고 결단을 촉구하는 종말론적 성격을 지닐 때, 듣는 자는 단순히 주관적 이해에
그치거나 주제를 피해가지 않고 말씀과 직접 대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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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쌍방향적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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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가 쌍방향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설교에서 일대일의 대화적 특성이 강조되어야 함을 말한다. 과연 어떻게 한사람이
다수의 청중에 대해서 개별자적 대화의 상황을 만들어 갈 수 있단 말인가? 금세기 전반기 미국에서 잘 알려진 설교가는 뉴욕시
리버사이드 교회의 해리 포스딕 목사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매 주 정기적으로 신자들과 상담시간을 가지는데, 설교를
준비하고 전달하기 위하여 그들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 알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설교는 카운 셀링이다.
대중을 향한 설교가 어떻게 일 대 일의 카운세링이 될 수 있는가? 이를 위해서는 설교의 전개가 관념론적 개념에 의존하는
접근이어서는 안된다. 연역적 추상을 피하고, 오히려 귀납적 경험에 근거한 구체적 일상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전달자 자신이
확신하는 진리로 듣는 자를 설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듣는 자의 삶 속에서 내재하는 문제를 밝혀 줌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면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경험을 다 담아내는 보편적 개념은 설교용어에서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어떤 한 상황에만 적용될 수 있는, 예를 들면 거리나 장터, 사무실 등에서 쓰는 말이 적당하다. 금세기 후반에
언론은 미국의 전직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을 "가장 탁월한 커뮤니케이터"로 지목하였다. 그가 대국민 연설을 할 때,
듣는 사람들은 마치 대통령과 일대일로 대화하는 듯한 분위기를 느낀다는 것이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설교자는 큰 목소리와
제스쳐로써 자신의 의도로 관중을 이끄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 한사람, 한사람을 찿아가서 그들의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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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멀티미디어 활용시 주의해야할 사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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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에 대한 바른 이해가 주의할 점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할 뿐 아니라, 변화하는 대중의 의식과
제반 문화의 흐름에 민감해야 한다. 과연 그 동안 인쇄가 주도적으로 이끌어온 문자시대를 넘어서, 이제 소위 멀티미디어
시대라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한 사회 속의 교회는 어떠한 변화를 겪을 것인가? 환경의 변화는 인간이해의 변화를 몰고 오기
때문에 설교자는 변화되어 가는 인간이해와 환경문제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더불어 창조적 대안 제시를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포항 북부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계지영 목사는 멀티미디어 시대의 설교를 위해서는 상상력을 사용하라고 한다. 이는
읽는 문화에서 보는 문화로 달라진 시대에서의 바람직한 설교방법이라는 것이다. 즉 눈과 귀의 싸움에서 언제나 눈이 이긴다는
것이다. 청중들에게 메시지를 정확하게, 설득력 있게, 그리고 저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메시지를 기억하게 하는 데는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단어를 통해 이미지를 형성하는 방법을 권하고 있다. 성경의 저자들이 이와 같은 이미지를 사용했고 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은유와 그림 같은 언어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여기서 더 나아가 멀티미디어 영상매체를 활용한 실제적인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다면 더 효과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말씀의 이미지화와 더불어 실질적으로 영상의 활용방법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선 설교자의 영상화
작업을 위한 더 한 층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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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격적 미디어로서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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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가 익명의 비인격적 미디어로 전달되는 것과 인격적 미디어로서의 설교자를 통해서 직접 전달되는 것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설교자는 이러한 사실이 무엇인지 잘 파악하여 미디어 자체의 수용여부와, 메시지의
특성에 따라 미디어를 바르게 선택하는 원리를 파악해야 한다.
십자가의 복음을 드라마나 영상으로 전달하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단순히 십자가 사건을 기록한 복음서를
읽어주거나 강해하는 것으로서 십자가의 복음이 영상매체로서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주기철 목사나 손양원
목사의 삶을 드라마화 함으로써 십자가 복음의 영상적 커뮤니케이션은 한층 실제적으로 가능할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는 일반적인 메시지와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복음적 메시지의 커뮤니케이션이 바르게 일어지는 곳에서는
단순히 특정한 '사실' 전달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심판과 구원의 사건까지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듣는 자는 새로운
사실을 알고, 인정하는 정도로 머물 수 없고 개개인의 인격적 신앙의 결단까지 요청 받는다. 이러한 복음적 케뮤니케이션은
십자가의 고난과 그 안에 나타나는 능력, 부활에 대한 소망, 신앙의 인내와 같은 복음적 메시지를 이미 자신의 삶으로 증거하는
설교자의 모습을 통해서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내용을 그대로 뉴미디어를 통해서 중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의 인격과의 살아있는 만남에 의한 감동을
재현하는 것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월드컵 축구를 보기 위해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TV생중계를
마다하고 게임을 직접 관람하기 위해서 많은 경비와 노력을 들여 현지의 경기장을 찿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최첨단 멀티미디어 기기가 준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복음의 '증인'이 가서 직접 만나서 증언하는 행위는 결코
뉴미디어에 의해서 대체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가다가 쓰러지고 죽더라도 적의 고지에 가서 깃발을 직접
꽂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말로 다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영혼과 그 삶을 그리스도에게로 복종시키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멀티미디어 시대에도 복음의 증인인 설교자는 여전히 그 사명이 막중하다. 멀티미디어에 의환 복음의
증거는 마치 전쟁에서의 공수지원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많은 공수지원이 있더라도 보병이 몸으로 적의 진지를
탈환해야만 전쟁의 승리가 주어지는 것처럼 가상 현실의 일대일 상호 만남을 가능케 하는 멀티미디어를 인터넷으로 접속하여
세게 구석구석까지 복음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지라도 직접적인 전도자 파송이 없이는 복음의 결실은 없다.
구덴베르크 이후 지금까지 인쇄된 복음서적이나 팜플렛은 전투병에게 새롭게 제공된 무기 중에 하나였다. 이제 멀티미디어는
더욱 새로운 장비로 부상하고 있다. 문제는 영적으로 잘 준비된 사람이 있느냐는 것이다. 복음의 능력을 자신의 삶으로 드러내는
설교자가 있을 때, 멀티미디어는 본래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게 된다. 구전시대에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문서시대에는 말은 잘
못해도 글로 잘 표현하는 사람이 팔요했던 것처럼 멀티미디어 시대에는 말과 글과 그림을 하나로 잘 조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 우선은 올바른 인격을 갖춘 목회자가 되어야하고, 또한 필요한 것은 말과 글과 그림을 하나로 조화시킬 수 있는 그러한
노력을 지금부터 해나가야 한다. 대개는 이 분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실질적인 강습이나 배움을 통해서 꾸준히 개발해 나가야
한다. 이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성숙돼 갈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앞서가고 있는
교회의 목회자들은 차세대를 위하여 영상활용에 대한 세미나 등 실질적인 노하우를 부지런히 나누고 개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본인도 이러한 차원에서 하나의 디딤돌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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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멀티미디어로서의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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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설교자들이 빠질 수 있는 가장 큰 위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시대의 틀에 맞추어 전달하려는 것이다. 특히
뉴미디어가 등장하게 되면 정당한 신학적 반성도 거치지 않은 채, 서둘러 뉴미디어가 제공하는 새로운 기능을 통해 메세지를
전달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위험한 이유는 뉴미디어란 단순한 매개자뿐만 아니라 세속적 정신을 반영하는 하나의 틀을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관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에 복음을 땅 끝까지 전달하라는 마태복음 28:18-20의 내용은 '위대한
사명이 아니라 '위대한 캠패인으로 축소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뉴미디어에 적응시킴으로써 시대적 흐름과
유행이 제공하는 패러다임에 하나님의 말씀을 맞추는 격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사무엘 에스코비는 "경영선교학"이라 부른 바 있다 .소위 경영 선교학의 원리는 메시지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그림으로 축소하며 표준화된 시자의 원리에 맞춤으로써 철저히 시대정신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 원리에서
오랫동안 권위를 유지한 바 있는 제임스 엥겔이나 시장 경영 원리를 성서적으로 철저히 응용해 보려 하던 실천가들 모두가 이
'경영선교학' 불행항 심지어는 위험한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뉴미디어는 시대적 정신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복음의 내용을 더욱 명확히 전하는 기능 역시 없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뉴미디어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통해서 멀티미디어의 정당한 활용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야 된다. 멀티미디어
이전까지의 매스미디어는 대중 속의 개인을 일 대 일의 개별자로 볼래야 볼 수 없는 매체였다. 그러나 멀티미디어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이다. 즉 대중을 대중이 아닌 개별자로서 일대 일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지닌다.
하지만 인격적인 상호 만남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멀티미디어에도 근본적인 한계점이 있음도 인정해야 한다. 복음선포에 따른
회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 차원에서 경험함으로써 온전한 것이 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미디어를 통한 간접적인
만남이 아닌 일대일의 인격적 만남은 설교에서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점이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강조해야 할
일은, "복음이란 대중적 상업방법으로 제시되는 소비제품이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인류가 새로 개발한 매체를 통해서 세계를 급속히 복음화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쉽게 가진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특정매체가 어떤 마술적 힘을 가지고 자신의 과업을 스스로 수행할 것이라는 상상 하에서만 가능하다. 텔레비전
광고하듯이 또는 전단 돌리듯이 전한다고 복음이 들려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복음이란 다른 메시지 같지 않아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때로는 '어리석은 것'으로, 때로는 '무능력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음의 메시지를 담은 인쇄물이나 녹음테이프, 비디오테이프를 보여줌으로써 믿지 않는 영혼을 얻을 수 있다는
낙관적이며 매우 편리한 선교방법을 재고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러한 반성 없이 멀티미디어 시대를 맞이할 때, 똑같은 방식으로
멀티미디어에 어떻게 복음을 담아 전달한 것인 가만을 생각하는 오류를 범할 것이다.
멀티미디어가 복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멀티미디어가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멀티미디어는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다.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멀티미디어는 사랑 충만한 교회이다. 복음은 성령을
의지하는 설교자를 통해서 역사 한다.
멀티미디어 시대는 하이테크가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외형적일 것 같지만, 그것은 외형적일 뿐이거나 혹
그것에 영향을 받을 것뿐이지, 인류가 진정으로 요구하는 가치는 '하이터치', 곧 '함께 있고자 하는 것'이다. 인류가 편지로서
다음에는 전화로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했지만, 오히려 정보통신 수단의 발달은 사람들의 직접적인 만남에 대한 욕구를
강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멀티미디어가 시공간의 제약을 놀라울 정도로 극복한 혁신적 정보통신의 방법이라 할지라도, 사람간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한 복음의 메시지 전달을 대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멀티미디어 시대에 '모이기를 더욱 힘쓰는 일'과 '말씀을
서로 나누는 일'이야말로 21세기에 성서가 가장 절실히 요구하는 목회일 것이다.
위와 같은 내용은 멀티미디어를 너무 과신하는 것을 경계하는 아주 좋은 지적이다. 이 사실은 앞으로 멀티미디어를
활용하고자하는 모든 이들이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만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즉 중요한 것은 직접적인
만남, 이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며, 이를 극복 못하는 것이 멀티미디어의 한계라는 것이다. 여기서 설교자는 멀티미디어에
너무 깊이노력을 기울이고, 오히려 인격개발에 소홀히 한다면 큰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멀티미디어를
활용하는데는 제약이 있다. 어떤 제약 인가하면, 즉 인격개발을 하고도 남을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야만 활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우선 인격개발이며 그러고서 시간이 부족하다면 영상활용에 대한 시간적인 투자를 보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나의 여건이 영상을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인가를 먼저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그럴만한 시간을 드릴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한가지방법이 있다. 그것은 영상일군을 키우고 그로 하여금 이 이 분야를 맡아 도와나가도록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협력사역이 미래사회가 될수록 더욱 절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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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디어와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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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에 나타나는 복음적 '영상과 소리'의 메시지는 편집인의 각본에 따른다. 그리고 그 각본의 메시지는 '설교'(또는
특정 그리스도인의 삶, 간증, 신학 등)에 근거한다. 또한 설교의 메시지는 '성서'에 준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서' 본문의
메시지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사건이다. 이 말씀 사건은 메시지 그 자체인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 누구인지를
계시하는 미디어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은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미디어가 된다. 현단계에서
뉴미디어로 전달되는 메시지란 전 단계에서는 그 이전 단계의 메시지를 전하는 미디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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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디어와 메시지간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달하는 매체의 다양한 발전과정이 있지만, 최초의 복음을 듣고,
믿어 , 말로 옮기기 시작한 주체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각양의 미디어가 담고 있는 내용은 사람, 곧 복음을 전하고
듣는 '사람들'이 매체를 통한 케뮤니케이션의 메시지를 결정하게 되어 있다.
결국 어려운 문제는 비인격적 매체를 통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현실이 아니라, 특정 매체들 자체가 지니는 강력한 자극적
전달 체에 의하여 과부 하에 걸리는 일로부터 자신을 어떻게 지켜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즉 미디어 자체가 지니는 흡인력과
메시지가 주는 힘 사이의 구별, 달리 말하면 미디어가 자아내는 분위기 때문에 감동되는 것과 메시지의 내용 때문에 감동되는
것은 엄연히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디어에 의하여 수용자가 얼마든지 조종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뉴미디어가 기존의 미디어보다 복음전달에 탁월한 점이 있는가? 기존의 미디어로는 전할 수 없던 복음의 특정 내용이
뉴미디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전달되는 그런 일이 있을 것인가? 책을 통해서 전달할 수 없던 것을 멀티미디어로 전달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멀티미디어의 메시지는 책이기 때문이다. 책에 실린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전할뿐이지, 책이
전달하는 내용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뉴미디어는 이전 미디어가 전하지 못하는 메시지까지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다.
예를 들어, 멀티미디어로 홍해사건을 가상현실로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성서의 출애굽기를 넘을 수 없다.
홍해사건의 구원사적 메시지가 출애굽기를 일고서도 들리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이 멀티미디어의 가상체험을 한다고 그것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뉴미디어를 통한 성서의 메시지 전달이라는 차원은 전적으로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뉴미디어는
이전의 미디어를 대체할 수 없다. 메시지의 케뮤니케이션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뉴미디어의 가치는 기존의 것이 비하여 인간의
다양한 감관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내용 면에서는 성서의 상황과 메시지를 이미지 화함으로써 편집 및 제작의
과정에서 과장하거나 생략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전통적인 교회의 강단설교는 성서시대로부터 시작하여 멀티미디어라는 뉴 미디어 시대에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복음의 케뮤니케이션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복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설교자의 인격을 매개로 하여, 듣는 자와
일 대 일로, 인격적으로 부딪치는 실제적 만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믿음과 선택에 텔레비전이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리라는 '느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와 다르다는 조사들이 있다. 비록 오래된 자료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경우, 60년과 70년대의 교회성장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전도의 산물이라고 받아들여 왔지만, 여러 독립된 조사에 의하면 이러한 입장을 신용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1981년 영국 BBC 방송연구부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더 이상 교회 출석을 안하는 신자들에게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영향은
거의 없을 정도라고 하였다. 더 큰 이유는 세속화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텔레비전은 신앙인들에게 단지 사소한 선택에만
영향을 미친다는 조사가 나왔다.
다음은 신앙생활 영위에 중요한 요인의 우선 순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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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점은 비인격적 미디어(서적,음악,TV,라디오)보다는 인격적 미디어(부모,성직자)가 신앙생활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인격적 실재는 시공간의 제약을 많이 받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매개하는 가장 탁월한 미디어임이
확인된다. 따라서 설교자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매개하는 중추적 담당자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위의 내용은 멀티미디어 사용에 일종의 쐐기를 박는 것이다. 즉 멀티미디어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즉 멀티미디어는
과장되게 할 우려가 있고, 멀티미디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더 많은 내용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 설교의 위기를 살펴볼 때, 그 위기가 전달방법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대개의 경우,
전달방법의 개선을 위한 노력이 많이 이뤄져야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분명 설교자 한 사람이 미치는 영향력이 다른 어떤
매체가 미치는 영향력보다 크기는 하지만, 그것은 원론적인 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 현대 설교의 위기에서 오늘날의 설교가
재미없는 설교, 이해가 안되는 설교라고 지적되고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중요한 매체이나 그 매체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전달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설교자 한사람의 인격성이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마찬가지로 전달방법에 있어서도 많은 노력이 기울여져야 한다. 그 전달방법의 개선 안으로
설교에의 멀티미디어를 도입하는 것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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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절 각 교회의 영상매체 활용 사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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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주제제기용 영상물을 제작하는 조코재미 프로덕션이 있다. 이 조코재미 비디오를 활용하는 경기도지역 교회 당당
교역자들에 대하여 전화로 그들의 활용사례를 알아보았다. 영상활용 내용과 그 효과와 고려사항의 순서로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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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송파제일교회 고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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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영상 활용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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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부에서 주일오후에 설교 아닌 별도 모임 중 영상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총 300여명이 6-7명씩 조를 짜서 갖는 조별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조장들은 미리 영상물을 보고 토의를 준비합니다. 이렇게
준비된 토의주제로 조원들이 조장 인도로 토의를 하고 목사님이 마무리를 지어주심으로 마칩니다.
공과의 내용과 비디오의 내용이 안 맞을 때 공과와 관계없이 별도로 시간을 진행합니다.
교회내 영상부가 없어서 부장님이 스스로 촬영하고 편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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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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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세대라 이해를 빨리하고 재미있어합니다. 그리고 역동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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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고려할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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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적으로 갖춰져야 합니다. 즉 영상물을 본 후 이동 안하고 바로 토의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현재 화면이 크지
않은 것이 흠입니다.(대형 TV로 보고 있음) 화면의 크기 따라 감도가 다른데 빔프로젝터를 쓰면 화면이 커져서 큰 효과가 있을
겁니다.
영상 소재를 앞으로 닥칠 부분의 내용이 다 포함되도록 잘 편집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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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오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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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전에 주제 제기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설교의 서론으로 영상을 하고 설교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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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구촌교회 중등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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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영상활용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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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물 사용은 설교시 설교의 서론으로 합니다. 문화와 관련된 영상물은 낮은 울타리에서 구합니다. 사랑의 교회의 영상자료도
활용합니다. 천주교계통에도 장충체육관 쪽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과 연관되 있는 곳에서(T 279-7429) 영상물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TV를 보다가 수시로 필요한 영상은 녹화해 둬서 편집해 사용합니다. 편집은 교회 방송실에서 합니다.
촬영을 위해 개인적으로 영상 촬영학원에서 1달 정도 수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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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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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보다 반응이 떨어졌는데 그 원인은 영상물 내용이 드라마형식이 아닌 다큐멘터리 형식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드라마
형식으로된 여러 편은 효과가 아주 좋았습니다.
친구초청잔치 때, 복음적 내용으로 4주간 매주 영상물을 보여주었는데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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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려할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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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시간이 한정되있기 때문에 비디오 내용이 짧을수록 좋습니다.(약 10분 정도)
영상 내용과 기존 공과의 내용과 연결되지 않아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분반시 성경공부를 하지 않고 적용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영상으로 주제 제기하여 설교로 연결하는데는 좋으나 분반 공부로 연결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매주 공과
가이드 교재를 만들어 배부하여 설교와 공과내용을 병행해서 교사들이 가르치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이를 받아들이고 잘 수용할 수 있는 교사의 단합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또한 이런 사역을 전담할 전임대우의 사역자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이 본교회의 해당 부서 인물이라면 더 효과적이라고 봅니다. 앞으로 영상팀을 만들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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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분당교회 중고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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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활용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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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시 활용하고, 분반공부 때도 그 내용으로 공부함
전문인이 따로 없는 상태에서 활용하고 있음
처음에는 어색했으나 5개월이 지나가며 적응이 되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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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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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첫 주에 영상물을 보여주는데 학생들이 기다리고 교사도 반응이 좋음
요즘 아이들 시각적인 것 좋아함 그래서 종종 학생들과 함께 영화관에서 함께 영화를 보는 기회를 가지고 그 내용을 소재로
설교도 하고 하는데 학생들에게 어필이 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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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고려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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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물에 더 집중하고 설교에는 집중하지 않는 것
영상활용 예배드리기에 어려운 점으로 시설에 제대로 안 되 있어 큰 TV를 성도 집에서 빌려오고 갖다 주고하는 번거로움이
있음
예배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전통적인데 영상물은 현대적으로 흐름에 어색함이 있음 그래서 찬송가 대신 복음성가를 함. 그리고
중고둥부 구분 않고 않도록 함
현재 영상물에서 딱딱한 감이 있음 15분 정도인데 길더라도 작품성 있게 했으면 함
설교내용으로 분반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영상물에 따른 설교준비가 급하게 되어 일관성이 부족함
영상과 설교와 성경공부가 연관되어 교회내 적용되도록 프로젝트화 되었으면 함
중고등부용으로 같이 나오고 있는데 중등부용, 고등부용 좀더 세분화 시켰으면 함(고등부가 유치해 함, 그리고 어필이 약함)
현재 조코재미 내에서의 자료만 아니라 교회내 실무진들의 모임을 가져 현장성 있는 소재들을 더 다룰 수 있었으면 하고,
제작비의 어려움도 협력하여 더는 계기가 있었으면 함
앞으로 목회도 열린 목회를 고려하고 있음. 즉 세대별로 맞는 목회를 하고자 함. 그들이 원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함. 목사님께
양해를 구해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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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장충교회 고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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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활용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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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많이 사용하였으나 요즘에는 한 달에 한번 정도로 사용함
설교시 핀 마이크를 사용하여 왔다갔다하며 설교하고 있음
그리고 설교시 도입을 항상 다르게 하고자 노력하고 있음
여기 저기 영상활용 가능성이 높은 것을 모아 그 때 그 때 활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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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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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 대속 등 반응이 매우 좋았음. 보기만 해도 감동 받고, 말씀도 잘 받음
) -->
다. 고려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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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담, 대속과는 달리 급히 만드는 경향이 있는 듯하여 설교적용에 딱딱한 감이 있음
설교에의 영상 도입시 그것에 치우치는 것을 조심할 것
예배형식이 기존의 정통적 방식에서 탈피해야 영상활용의 현대적인 것과 접목이 가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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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전농교회 중고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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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활용 내용
설교시 영상물을 활용하는데 비디오 등의 열악한 환경에 투자가 약하여 월 1회정도 하고 있음
예배전 충분한 찬양으로 감성을 준비시키고 말씀을 전함
설교통해 얻지 못하는 것을 영상으로 전달하고 이것을 성경적으로 말씀을 통해 조명하고 말씀 후에는 느낀 점을 중심으로 분반
토의를 진행시킴으로 소화시킴
그 주의, 한 주제에 모든 초점을 두어 찬양, 영상, 말씀, 성경공부, 토의를 진행시킴
영과 지와 감성의 종합적 예배스타일을 지향하는 중임
) -->
나.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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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 어필이 부족한 전통예배에서 탈피하고자 노력중임. 그 형식으로는 아이들에 접근이 곤란함. 컴퓨터 비디오 문화에 갇힌
아이들이기 때문임
20세기가 진리는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다면 21세기는 감성과 영성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임
영상을 통해 나아갈 방향을 잡아줄 수 있어야 할 것임
) -->
다. 고려사항
) -->
교회에서 관심이 부족함
주제에 맞는 영상물이 필요함
아이들을 위해 시청각에 관심이 필요함
) -->
4. 성덕중앙교회 유초등부
) -->
) -->
*Media 자체는 중립적인 것이기에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활용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으며 또 사용하는 것이
현 세대에 접근하는 방법이 될 수밖에 없다. 영상세대는 영상으로 접근해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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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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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에서 멀티미디어 활용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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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문제, 구체적으로 한국 교회의 가르침과 그 결과에서 나타난 문제는 '수육의 복음'이 '복음의 수육'에까지 이르지
못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앞으로의 한국교회를 위해 심각하게 다루어야만 할 근본적인 문제라고 본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요1:14) 바로 그 말씀이다. 여기에서 '육신'이라는
말은 인간성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입장에 머물러버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입장에까지 내려온 것이다.
이렇게 말씀이 인간의 입장에까지 내려온 이유는 자기를 주고 자기를 전달해주기 위해서 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주고 자기를
전달하려면 우선 자기가 상대편의, 입장에 서야만 한다. 이러한 이치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이 기독교 복음의 진수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예수라는 인간의 입장을 취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복음 전파방법에도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다. 즉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 복음을 상대편의
입장에까지 수육(受肉)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복음을 수육 시킨다는 말은 복음을 상대편에게 이해시킨다는 말이다. 동시에 이 말은 복음을 생활과 결부시킨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말씀의 권위를 인정한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말씀을 선포만 한다든지 나 혼자 중얼댄다면 그것은 아직 복음이 수육에까지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이해와 생활에까지 내려가 정착되어야 비로소 그 복음은 한 사람의 소유가 된 것이며 소위 선교가 성립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수육 시키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철저히 연구되어야 하며 우리가 논하는 시각이나 청각은 육 즉 인간성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수육을 위해 무엇보다도 적절한 방법으로써 채택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어린이들이 주일학교에서의 성경공부나 아동 설교를 '재미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많은 청소년들이 교회에서 배우는 것을
실생활과 멀리 떨어진 것으로 생각하여 추상적인 개념으로 기독교 복음을 이해하고 있다.
장년들도 설교나 주일학교 공과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이가 많다. 신학교를 갓나온 교역자가 시골 교회에서
희랍어 성경풀이를 하거나 곧잘 영어마디를 내뿜는다. 이래가지고 복음이 수육 되기는 지극히 어려울 것이다.
이렇듯 모르겠다. 나와는 관계없다 느끼며 말하는 것은 복음이 수육 되지 않았다는 뜻이며 다른 말로 하면 진리가 번역되지
못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말이다.
복음의 진리는 본래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존재이므로 이해가 안되어도 좋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일찍이 예수는 말씀을 설교하실 때 '예언자'라는 인상도 주었지만 그보다도 '선생(랍비)'의 인상을 더욱 많이 주었다. 그것은
권위를 가지고 내려 던지는 말씀의 선포라기보다는 오히려 이해를 촉구하는 교사의 입장에 서 계셨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교사로서의 말씀 전달의 방법을 깊이 생각하셨고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는데 그 중에도 시각을 이용한 시각교육을
많이 하신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한 문제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4-45)
여기에서 보듯이 원수사랑이라는 초자연적 진리를 가르치는 소재로 가장 자연적인 해나 비를 들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태양이라든지 비는 모두 휼륭한 시각 소재인 것이다.
예수는 아무리 어려운 진리라도 그것을 어렵게 다룬 일이 없다. 그 가르침의 구석구석에 "어떻게 하면 쉽게, 어떻게 하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할까?" 하는 부심의 자국이 역력히 드러나 있다. 되도록 어렵고 유식한 문자를 쓰려는 요즈음의
설교자나 교사와는 정반대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거기에 대한 인간의 신앙과 같은 어려운 진리를 가르치실 때도 극히 단순한 말을 쓰셨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6-28)
여기에서 엿볼 수 있듯이 예수는 사람들에게 공중을 나는 새들을 '보게'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임기응변의 시청각 교육이었다.
때마침 머리 위를 날아가는 새를 포착하여 예수는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교재로 삼았던 것이다.
또한 들에 핀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게 ' 하였다. 그 자리에 백합화는 없었으나 '생각'이라는 작용을 통하여 머리 속에 백합화
그림을 그려주었으며 이것 역시 넓은 의미의 시각교육을 실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 가르치신 많은 비유 이야기들은 모두 생생한 실물을 보는 듯한 회화적인 효과를 지니고 있다. 한가지 예만 들어보자
유명한 탕자의 비유를 들으면 그 장면이 영화처럼 눈앞에 나타난다. 그것은 장면들이 인상적으로 구성되어 잇기 때문이다. 이런
교수 방법은 화술의 문제이기도 하나 동시에 시각 교육에서도 다룰 중요한 문제이며 시청각적 응용 심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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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예수는 그 자신이 '수육의 복음'이었음과 동시에 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대중의 편에 서서 그들 속에 파고드는
방법을 썼던 것이다.
시청각 교육 방법은 복음의 수육에까지 이르게 하는 가장 구체적이며 효과적인 방법이다. 따라서 가장 효율적인 앞으로의
선교와 교육은 이 새로운 무기를 충분히 이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다가오는 시대는 멀티미디어, 정보화 시대이다. 이는 모든 분야에서 멀티미디어의 활용이 보편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다가오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전파에 이런 문명의 이기를 최대한 활용해야 겠다. 그것은 미래를 준비하는 설교자로서
깊이 생각하고 준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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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멀티미디어를 위한 평신도 사역자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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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는 말씀 사역에 전무해야한다. 왜냐하면 목회자로서 마땅히 해야할 바요, 말씀이 능력이 있어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 능력의 말씀을 제쳐두고 멀티미디어에만 신경 쓴다면 그 결과는 참으로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혼자서 다해야할
경우, 우선은 말씀 준비가 충실히 되야 하며, 그 후에라야 멀티미디어를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목회자가 말씀
사역에 전무하려면, 이에 따른 모든 멀티미디어 등을 준비시키고 실행시킬 수 있는 평신도 사역자의 육성이 절대로 필요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은 이를 위한 헌신의 계기를 갖도록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본인의 경우는 지난여름 청년부 하기
수련회를 인도하며, OHP를 통한 주제 발표를 행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러한 영상이 앞으로 더욱 활용되어야 하며, 이를 위한
청년들의 헌신이 있어야 함을 역설하고 기도의 시간 중 헌신자를 찾았을 때, 두 사람이 헌신을 했다.
헌신 후에는 영상교육기관(조코재미 프로덕션)에 교육을 의뢰했고, 과감한 영상 장비의 투자를 교회에서 했다. 현재 영상부에는
청년들이 팀을 구성하여 작품을 정기적으로 만들어 상영하며, 교회 예배 중 활동해 나가고 있다.
참고로 조코재미 프로덕션에서 교육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촬영실습, 조명이론과 실습, 편집이론과 실습, 비디오의 음처리,
토크쇼 제작, 드라마 또는 뮤직 비디오 제작등 이다.
또한 중요한 문제는 그들을 지도할 담당자 역시 전문인을 세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멀티미디어 활용기술이
매우 앞서 있는데 교회의 그 수준이 낮게 된다면 사람들에게 미치는 그 효과가 상당히 감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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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필요한 장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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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경우 교회에서의 투자 부족이 큰 문제이다. 즉 멀티미디어 장비를 구하는데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는데
있다. 그러다 보니 교사나 담당 교역자가 관심이 있어 멀티미디어를 활용하고자 하여도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교회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대개의 장비들이 고가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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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빔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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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프로젝터는 비디오용과 데이터급이 있다. 비디어용은 주로 비디어 플레이어로 연결하여 비디오물을 보여주는데 그치고
컨버터를 통하면 컴퓨터에 연결하여 모니터 내용을 보여줄 수 있기도 하나 그 화질이 매우 낮아 활용도가 낮다. 그러므로
비디오와 컴퓨터를 같이 연결하여 사용할 수 있으려면 테이터급의 빔프로젝터가 필요하다.
데이터급의 공통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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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의 요구사항
1. 가격이 저렴할 것
2. AS가 신속할 것
3. 교회 경험 풍부업체일 것
4. 천장에 매달려면 반전기능이 되야 함
5. DATA급일 것
6.부품공급이 원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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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별 가격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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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카메라, 편집 및 자막 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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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로 된 기기등 을 구입하려면 그 품질에 따라 수천, 수억원의 설비 투자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쉽게 활용 가능한
컴퓨터 기기가 출시 되고 있다 즉 컴퓨터 상에서 편집, 자막, 음처리, 등등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식회사 나래에서 나온
것이(miro-dc30 plus) 그러하다. 즉 영상 편집용 컴퓨터와 그 컴퓨터에 편집 전용 보드를 장착하면 수 백만원이면 가능하다.
계속해서 새로운 제품이 나오는 만큼 관심을 가지고 주위를 살펴보면 얼마든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카메라 역시 각 가정에서
잠자고 있는 것을 동원하면 별 어려움 없이 촬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장비들을 구입해 놓고 교회 성도 중에서 자원자를 모집하여 헌신토록 하고 계속 키워간다면, 그리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노하우를 계속 쌓아 나갈 때, 다가오는 21세기에 보다 훌륭한 설교자로 자리 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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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지막 제언
사이버 스페이스 전쟁의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1990년 임신한 아내를 살해하고 그 죄를 정체불명의 흑인에게 돌린 혐의로 기소된 한 남자의 유명한 사건을 추적 조사하던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지 기자가 이웃에 사는 여자에게 그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의 말을 믿습니까?"
"그 남자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당신은 그가 모든 것을 허위로 날조했다고 봅니까?"
"모르죠."
그 여자는 대답했다.
"결말이 어떻게 나는지 알 수 있게 영화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네요"
나는 이 여자가 농담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빈정대고 있었다거나, 아니면 대답을 회피하고 있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 여자가 한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그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영화가 그녀에게 무엇이 진실인지를 -그녀
자신의 경험보다 정확하게 - 말해줄 것이다. 그 후 1년이 채 못 지나서 TV용으로 제작되었던 <잘 자요, 내 사랑 : 보스턴의
살인자 >라는 영화가 바로 그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내가 이 일화를 끄집어 낸 것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널리 퍼져있는 문화적 추세, 다시 말해 우리가 현실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인식하건 인식하지 못하건 간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가짜를 진짜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들은 현실에 대한 TV나 인쇄매체의 묘사에 지나치게 종속한 나머지 경험을 박탈당한 채 세계를
"묘사"해 주는 매개체를 더 기꺼이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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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에서처럼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는 대단하다. 앞으로 다가오는 21세기의 사회일수록 더욱 더해 갈 것이다.
이런 시대 상황을 볼 때, 사이버스페이스를 사탄의 도구로만 놔둘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전파인 설교, 가장
중요한 설교에의 과감한 도입이 절실한 것이다. 이런 설교에의 도입은 바로 설교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다가오는 세대의
설교자로서 이 부분에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는가! 가능한 한 얼마간의 시간을 내어 영상제작 훈련을 직접 받아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소규모의 교회일 경우 영상작업을 설교자 스스로가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상 일군을 양성하는 일에
대한 안목을 가지기 위해서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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