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시대의 선지자 박관준 장로
"사람은 한번 죽을 때가 있나니, 어찌 죽을 때 죽지 않으리. 그대 홀로 죽을 때 죽으면, 길이 죽어도 죽지 않으리. 때가와 죽을 때 죽지 않으면, 살아서 즐김이 죽음만 같지 못하리라. 예수 나 위해 죽으셨으니, 나도 예수 위해 죽으리라." 人生有一死何不死於死 君獨死於死千秋死不死 時來死不死生樂不如死 耶蘇爲我死我爲耶蘇死 이한시(漢詩)는 1938년 장로회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직후 예비검속에서 풀려난 박관준 장로가 신사참배 거부항쟁의 신앙동지인 이인재 전도사에게 써주었다고 하는 유시(遺詩)다. 박관준 장로는 이때 이미 순교를 결심하고 신사참배 거부항쟁에 투신하고 있었다. 박관준 장로는 1875년 4월 13일평북영변에서부농인박치환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위에형들이있었으나 모두어려서죽어, 그는집안의 대를 이을 독자로서 집안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한학을 공부하며 어린시절을보냈다. 그러다가 16세가되던해에 자신보다 2살위인이관선이라는처녀와 결혼하여 다복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얼마후양친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인생의 허무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여 가산을 탕진하였다. 그러던중 그는병까지 얻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하였으나 부인의헌신적인 간호로 회복되었다. 그래도 그는 생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유불선의 경서와 동학서적등을 탐독하며 방황을 계속하였다. 한말에 한때 친지의 추천으로 강계산림별장의 관직을 맡고 서양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기도 하였으나 그때까지만하여도 외도에빠져있던 그는기독교에대해서별다른흥미를느끼지못했다. 그러던 그가 30세가되던 1905년 가을 어느날, 그날도유불선동학서적들을뒤적이며 명상에잠겨있다 가, "절벽이위험하면혈벽에서라(絶壁唯危면, 血壁立하라)"는이상한영음(靈音)을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상하기도하고 그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나, 그는 이것이 자신의 방탕한생활을 청산하고기 독교로 개종하라는 영계의 계시로 해석하여 그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후 그는 곧바로 정봉 익, 강응식같은 친구들에게 전도도 하고 성경을 공부하여 1907년 봄영변감리교회에서 학습을받고, 그해 가을 세례받았다. 그는 신앙을 갖게되면서 새로운삶이 시작되었다. 교회에열심히 봉사하고, 육신의 병과 영혼을 병을함께 고치는사람이 되기위해서 1912년부터 3년간 서울에 올라와 서양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1915년경 개업의 면허증 얻어내고, 고향인 평북영변에 돌아와 제중의원개설하였다. 당시에는 의원이 귀하던때라 의료사업은 날로번창하여이를 통한 전도활동도 활발히하였다. 그러다 1922년 무렵 약을 잘못써한 청년을 죽일뻔 한 일이있고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할 마음으로 3년간무의 촌무료진료를 결심하고 실행하기도하였다. 그후 그는 다시 평북구성읍에 병원을 개설하고 환자를 치료하며 복음을전했다. 그가 자주병원을 옮긴것은 그지역의 연약한 교회를 돕고 새로운 지역에 복음을전하기위해서였다. 그는 1934년봄에 다시 개천읍으로 이사하고 이곳에 십자의원 개설하였다. 그가 경영하는병원입구에는 항상 요한복음 3장 16절성경구절을 쓴큰족자를 걸어두고, 진찰실벽에도 자신이쓴 "나는 육신의 병자보다 영혼의 병자취급을 더갈망한다."라는족자를 걸어두었다. 그만큼 그는 환자의 육체적 질병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에 관심을갖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전도하며 진료에 임했던 것이다. 그는 여기서 군우리 개천읍교회 영수로 봉직하다가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그런데 그무렵 일제가 기독교계 학교에도 신사참배를강요하여 교계에 큰문제가 되고 있었다. 박관준장로 는 60세가되던해인 1935년봄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던중 환상가운데 "이제부터 십자가의 정병을 뽑는다. 나를위해서 피를 흘릴 자가 누구냐?"는음성을 들었다. 그는곧 "내가피를흘리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그는 신사참배 거부의 사명이 자신에게있다고 믿고 이를 저지하기위한 투쟁의 일선에나 섰다. 그는 우선 신사문제의 중심지인 평안남도 도청을찾아가 학무국장에게 신사참배문제를 재고해주도 록 요청하고 그렇지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우가키총독에게도 1935년 10월 "만약에총독각하의 시정이 신사참배를 강요하고나선다면 외람 되오나 각하의 나라 대일본제국은 필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을것"이라는경고문을 보냈다. 그후 새로 미나미 총독이 부임하고 신사참배 강요정책이 교회에까지 미치자 그는 1938년 2월직접 미나미총독을 찾아가 신사참배강요정책을 항의하면서 이를 철회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하라고권고하기도하였다. 그는 이러한 행동때문에 1938년 3월평양경찰서에 20일간 유치당해 취조받고, 광신자로 낙인이 찍혀 석방되었다. 그러나그는이에굴하지않고 미나미총독에게 전후 10여차례에 걸쳐 항의서와 경고문을 보냈다. 이와함께 그는 1938년 9월장로회총회의 신사참배결의를 저지하기위한 시위계획도 세웠다. 그래서 그가 외칠 다음과 같은 신사참배 반대구호까지 만들어두고 총회날을기다렸다. "신사참배는 하나님께 대한죄악이다. 하나님의사람들은 우상앞에 절하지 말라. 정부는 교회에 신앙의 자유를 주고, 양심에 없는 신사참배를 강요하지말라. 우리총회는 하나님의 성회다. 바알신에게절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이 총회가 하는 일을 지켜보고계신다." 그러나 이계획은 일제 경찰이 장로회총회를 앞두고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을대거예비검속함으로써그 도평양선교리경찰서에 20일간유치취조를받게되어수포로돌아갔다. 그러자그는예비검속에서풀려난 1938년 10월부터생업인의업을 완전히 포기하고 전적으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에 투신하여보다 효과적인 투쟁방도를 생각하기시작했다. 그는총독부에 아무리 경고하여도 먹혀 들어가지않자 일본 본토에 건너가 경고할 계획을세웠다. 그리하여 기도중에 같은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하던 안이숙선생을 대동하고 1939년 2월일본에건너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박장로의 아들 박영창과함께 일본정계요인들을 찾아가 한국의사정을 알리고 신사참배강요정책을철회할것을 요구하며 일본의멸망을 경고하였다. 이들의내방을받았던전조선총독우가키는 1939년 2월 28일자그의일기에이러한사실을다음과같이쓰고있다. "어제평양에사는예수교신자박관준일족 3명이내방하여관헌의압박상황을호소하였다. 사실이라면 이들신자에게는불행한일이요, 또한성대(聖代)의 불상사이다. 미나미(南次郞)씨가공을세우기에 급급하다는 평을 여러차례들었다. 그일단이 드러난것인가 ? 간과할수 없는일이다!" 박관준장로 일행은 40여일간의 이러한 유세도 별효과가 없는것을 알게되자보다 자극적인방법으로 일본을 경고하고 시위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 그때 종교단체의 국가통제를 목적으로 한종교단체법이상정된 제74회일본제국회의가 개회중이라 여기에 들어가 경고문을 투하할 계획을 세웠던것이다. 그들은 경고문을준비하고 방청권을 얻어 3월 23일사전답사를한다음 24일 일본제국회의중 의원회의장에 들어가 계획대로 박장로가 "여호와하나님의 대사명이다."하고 외치며 두루말이로된 경고문과 건의서를 단상을 향하여 투척하였다. 이들 경고요지는 다음과같다. "1. 일본제국의이전란시에가장급선무의국정은국교를개정창정하는것이다. 신도(神道)를기독교로 개종할것. 2. 명치천황, 대정천황은하나님께불경치는않았으나소화천황은여호와하나님께불경이다. 신사참배 강요등 악법실시의 강요와 양심적인 교역자의 투옥등을 철폐할것. 3. 일본제국은 참신여호와하나님을경외하고 그율법을 준행하면 복을 받을것이요, 도리어 참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알지도 못하는 우상을 숭배하고 여호와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준행하지 않으면 저주를받으리니, 이두가지중에서한가지를자취할것." 그리고 이어 어느 종교가 참종교인지알기위해 장작더미위에 신도불교등 각종교 대표자와 기독교대표로서 박장로 자신을 올려놓고 불을 질러 시험하자는 제안도하였다. 이들은 즉시 '제국의사당소요'죄로 체포되어 40여일간일본경시청의취조를 받고본국으로 강제송환되었다. 박장로는경시청에서취조를받을때도조금도굴하지않고 "만약 나의 생존중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자손의 대에이르기까지라도 목적관철을 이루기위하여 이같은 행동을 계속 감행하겠다"고 호언하였다. 박장로는 본국으로 송환되고나서도 요시찰인물이 되어감시를 받았으나 신사참배 거부항쟁을 하다가 구속된 동지들을 석방시키기 위하여 신의주경찰서와 평북지사를찾아가 항의하고 총독에게도 경고문을보내, 그해가을도당국의 지시에 의해 영변경찰서에 다시 검속되었다. 그는 얼마후 신의주 경찰서로 이감되고 다시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어 독방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극한투쟁 을하는가운데서 자주기도중에 영음을 듣고 환상을 보았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예심법정에서도 조금도 굴하지않고 일제에게 멸망을 담대히 경고하고증거하였다. 그는 해방이 되기 이미 1년전에 1945년 8월에일제가패망하고 우리나라가 해방이 될 것이라는것을 알고 예언하기도하였다. 그는 자주 옥중에서 오랫동안 금식기도를 하였는데 최후의 승리를 내다본 그는하나님께 감사하며 1945년초부터 다시 금식기도를시작하였다. 예정된 금식기도를 마치던날 그는빈사상태로 피를 토하고쓰러져 평양기독교병원으로옮겨졌다. 박장로는 그곳에서가료를 받으며 찾아오는 친지들에게 옥중체험과 성경말씀을 증거하였다. 그러다가입원한지 5일만인 1945년 3월 13일오전 "우리나라는앞으로이사야 11장 10절로 16절의말씀과 같이됩니다. 여러분 끝까지신앙을 잘사수하시다가 앞날 영광스러운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하는유언을남기고 70세를일기로평화롭게소천하였다. 장례는 이튿날 오정모 집사의 집례로 조촐하게 치러져평양장로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신사참배문제로 같이 옥고를치른 서정환전도사는박장로에 대하여해방후에 다음과같이증언하고있다. "박장로님이 생각납니다. 그는 에스겔 3장 18절말씀을마음에새겨두고있었어요.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죽으리라할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말로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길을 떠나 생명을구원케하지아니하면그악인은 그 죄악중에서 죽으려니와 그피값을 네손에서찾을것이요.' 그는자기를 일본의 파수꾼이라고생각했습니다. 그는 일본의 우상숭배를 경책하고다니며 여러번 일본경관에게 잡혀서 매도 맞다가 드디어 내가있던 신의주 형무소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열심있는 신앙가였습니다. 나는그로부터 많은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느날 그는 일본사람들에게 몹시 매를 맞았는데 좀더때려 달라고부탁했습니다. 죽을때까지 때려달라고요.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기를 원했습니다. 경관들은 어쩔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그같은 일을 도저히 이해할수가 없었지요. 결국그들은그의 소원을 듣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후부터 그들은 다시 그를 때리지 않았습니다. 사실그는섭섭해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순교적신앙과 용기는하나님의심판과일제의패망을 예언하여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을뿐만 아니라, 그와함께 신사참배 거부항쟁을 하던 동지들에게도 무한한 희망을주고 격려가 되었으며 불굴의 신앙투쟁의 본보기가 되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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