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땅을 떠나지 말라 룻1:1-5(2007. 8. 10 금요예배 설교)
1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거기 거한지 십년 즈음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거기에는 때로 희생이 있을 수도 있고 고난과 시련이 닥칠 수도 있고 그만 벗어나고 싶은 요구가 생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 나은 자리가 있을 것도 같고, 내가 왜 여기서 이 모양 이 꼴로 고생을 해야 하는 생각도 종종 들고, 그러다가는 ‘에라 모르겠다. 나는 나 갈 곳으로 가련다’하고 자신의 자리를 떠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가출하는 애들도 나름대로 떠나는 이유가 있다. 더 이상 못살겠다는 것이다. 나가버리면 이보다는 나을 것 같은 것이다. 그러나 막상 나가면 누가 그 아이들을 반겨주는가? 이상한 인간들이 반겨주지 않는가? 이용해 먹으려고. 뒤늦게 후회한다. 차라리 집에 있을 걸. 집이 그래도 나았는데... 그나마 집에 돌아올 수 있는 아이들은 괜찮은 편이다. 잃은 것들 투성이라도 말이다. 많은 경우 더 이상 돌아 갈래야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에 빠지기도 한다.
집나가는 여자들이나 자기의 가정을 떠나는 여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지긋지긋한 남편 꼴 보기 싫어 집이 감옥 같다. 세상 어디를 가도 집보다는 나을 것 같다. 혼자서 먹고살기야 못하겠느냐는 생각도 들고, 저놈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서 좀 재미있게 살고 싶은 생각도 든다. 대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다른 누구하고 살아보면 행복이 넘치고 깨소금이 쏟아질 것 같은가? 살아봐라. 또 다시 지옥이 되고 만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가정만 잃는 것이다. 자녀들은 자녀들대로 망가질 테고 말이다.
가정은 우리가 떠나지 말고 지켜야할 자리이다.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은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성장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려는 섭리가 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이유는 무척이나 많다. “교회가 사랑이 없다느니,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하다느니, 교회를 다녀보니 별거 없다느니...” 이런 사람들은 무언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다. 교회 다니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를 까마득하게 모르는 것이다. 여러분이여. 교회에 왜 다니시는가? 교양 쌓으러 다니는가? 친구 만나러 다니는가? 어떤 이익을 찾아 교회에 다니는가? 그런 것들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그런 시시한 것들 때문이 아니다. 죄 때문에 지옥에 떨어질 인생들이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 받고 구원받게 하려는 목적으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암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이 병원에 왜 가는가? 놀러가는가? 친구 사귀러 다니는가? 간호원이라도 하나 꼬셔서 장가가려고 입원하는가? 아니다. 수술하여 살기 위해서 병원에 가는 것이다. 그것이 병원이 존재하는 목적이다. 그런데 병원에 별 사람이 다 있지 않은가? 공연히 소리 지르는 사람들,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 매너라고는 눈꼽 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 어떨 경우에는 정말 꼴도 보기 싫은 사람도 보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보기 싫어서 병원을 떠난다고 생각해보라. 그건 정신병자다. 제정신인 사람은 그럴 수 없다.
그런데 교회를 그런 식으로 떠난다. 생명보다 귀한 영생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교회를 자기 맘대로 벗어나 버리는 것이다.
정말 문제는 뜨내기 교인들이 아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문제인 것이다.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왜 교회를 다녀야 하는지 알면서도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문제인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부디 여러분의 자리를 지키실 수 있기를 바란다. 툭하면 도망하려는 오합지졸 근성을 뿌리 뽑으시고 성령충만 받아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켜 그 자리를 복의 자리로 만드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오자.
1. 약속의 땅이 든 기근
1) 약속의 땅에도 기근이 든다
오늘 본문의 시대적인 배경은 사사들이 통치하던 시대이다. 사사들은 아직 왕이 이스라엘에 나타나기 전에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사람들을 일컫는다. 여호수아 이후부터 사울왕의 전까지 이런 사사들이 등장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렸는데 기드온이나 삼손이나 입다등이 유명한 사사들이다.
그런데 그 사사들이 다스리던 어느 시점에 이스라엘 땅에 흉년이 들었다.
“1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라고 오늘 본문에 말씀하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이스라엘이 지금 머물고 있는 땅이 어디인가? 가나안땅이다. 도대체 이 가나안 땅은 얼마나 의미 있는 땅인가? 하나님께서 430년이나 이집트의 노예로 고생하던 이들을 모세의 손으로 구원하여 내시고 여호수아를 통해 얻게 하신 땅이 아닌가? 한 마디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땅이요, 하나님이 친히 허락하신 땅이다.
신명기 11장에는 그 땅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10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신 11장) 세초부터 세말까지 하나님의 눈이 지켜보시는 땅. 얼마나 대단하고 얼마나 의미 깊은 땅이다.
그런데 그 땅에 흉년이 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는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곳에도 시련과 고통은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실수하셔서 생긴 현상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있으셔서 그런 시련과 연단의 과정을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이해를 못한다. 머리가 딸리기라도 하는지 고난만 겪으면 정신을 못 차리고 혼란해 한다.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댄다.
어떤 청년은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우리 집은 이렇게 고생만 합니까?”. 참 한심한 소리이다. 그 동안 주일학교 다니면서 학생회 다니면서 또 청년회에도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숱하여 들었으련만 하나님의 말씀은 다 잊어버리고 천치같은 소리만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힘들고 어려운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든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는 모습이다. 아니 하나님이 이런 과정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관심조차 없는 모습인 것이다.
여러분은 잘 기억하시라. 약속의 땅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에도 고난과 고통이 있을 수 있다.
2) 약속의 땅에 기근이 든 예
실례로 아브라함도 동일한 것을 겪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기 전에 아브라함이 유하던 땅이기도 하지 않는가?. 원래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가 고향이다. 그런데 그곳을 떠나 아버지 데라와 함께 하란에 있다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장)
그리고 아브라함은 75세라는 나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간다.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창 12장)
결국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에 자기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다. 원했든 원치 않았던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여 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있으라 한 곳에 있으니 만사형통하게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 영 딴판이다. 오히려 그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아브라함의 처지가 막막해 진 것이다. “1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창 12장)라고 셩경은 말씀하고 있다.
3) 왜 하나님은 기근을 허용하시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궁금함을 금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왜 약속의 땅에 기근을 허락하시는가 하는 점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그런 의문이 생기지 않는가? (아무 생각없이 사시는가?)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하나님은 지혜로우신 분이다. 또한 나와 여러분을 사랑하신다. 지혜로우실 뿐 아니라 나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허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다. 우리는 그 뜻을 섭리라고 부른다.
때로 우리는 가족들로 인해서 고통을 겪는다. 때로 우리는 수많은 인간관계로 인해서 힘이 든다. 때로 우리는 직장에서도 애를 먹을 때가 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조차 시련을 당하기도 한다.
이럴 때 많은 사람들이 그 현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힘들어한다. 원망과 불평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정말 지혜롭고 믿음 있는 성도라면 좀 다른 생각을 할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 이 고통을 통해 하나님은 나의 어떤 부분을 깎으시려는 것일까? 이런 시련과 탄식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신앙의 내용을 나로 하여금 습득하게 하시려는 것일까?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나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우리 안에는 못 되먹은 근성이 있다. 또한 너무 약해빠진 모습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좋은 환경 속에서는 보완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눈물이 찔끔나는 상황 속에서 정말 제대로 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져 가는 것이다.
연철은 어떻게 해서 강철이 되는가? 연단을 통해서이다. 뜨거운 불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 쇠몽둥이로 얻어맞고 또 뜨거운 불 속에 들어가고 나오자마자 쇠몽둥이로 얻어맞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연철은 절규한다. “나는 왜 이럴까? 밤낮 뜨거운 불 속에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와 살만하면 쇠몽둥이로 얻어맞고 그러다가 또 뜨거운 불 속에 들어가니... 아이고 내 팔자야. 참 기구한 운명이구만”. 그러던 연철이 어느덧 자신이 쉽게 부서지는 연철이 아닌 아주 튼튼한 강철이 되어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뜨거운 불길과 쇠몽둥이는 연철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정말 강하고 쓸모있는 존재로 만든 것이다.
야곱의 생애가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니었는가?
수없는 고난을 겪은 다윗 또한 그런 모습이 아닌가? 왕궁에서 곱게 자란 솔로몬보다 연단을 수없이 겪은 다윗이 더욱 위대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스스로에게 자꾸만 상기시켜라. 고통에는 뜻이 있다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과정을 통하여 내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나를 다듬어 가시고 강하게 하시는 거라고 말이다.
그것이 곧 나를 진정으로 살리고 축복을 안겨다 주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고기잡이 배들이 뉴잉글랜드의 동부 연안에 있는 한 작은 어항으로부터 출어하였다. 오후에 그들은 큰 폭풍을 만났다. 밤이 되었을 때 그 어선들 중 단 한 척의 배도 항구로 들어오지 못했다. 밤이 새도록 그들의 부인들, 어머니, 아이들, 그리고 애인들은 해변을 오르내리면서 손을 모아 하나님께 그들을 구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 상황에 공포는 더하여, 한 오두막이 불타게 되었다. 그러나 남자들이 모두 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집을 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악재가 겹치는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 이게 뭐란 말인가?
그런데 아침이 되었을 때 기쁘게도 모든 어선들이 연안에 있는 항구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러나 거기에는 절망의 얼굴을 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의 집이 불타버린 남자의 아내였다. 육지로 올라 와서 그의 남편을 맞이했을 때 그녀는 울며 말했다.
"여보, 우리는 망했어요. 우리 집과 그 안에 있던 모든 것이 불에 타버렸어요."
그러나 남자가 말하였다. "그 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오. 모든 어선들을 항구로 무사히 인도한 것은 우리의 불타는 오두막에서 나오는 불빛이었다오 ! "
고난 중에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실 수 있기를 축원한다.
2. 약속의 땅을 떠난 사람들
1) 약속의 땅을 떠난 사람들
그런데 실상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나 섭리를 헤아려볼 지혜나 믿음이 없는가보다. 자신이 다듬어지는 자리를 지키면서 기도로 믿음으로 이기기보다는 그 자리를 피해 도망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으니 말이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사람들이 나온다. 바로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 그리고 그 아들들인 말론과 기룐이다. 온 가족이 약속의 땅을 떠나 이민을 간 것이다.
“1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이들은 기근시에 경제적인 고통을 겪으면서 왜 자신들이 그런 고통 속에 놓여있게 되었는지를 묻지 않는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려는지를 탐구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채워주시고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들은 분명 출애굽시에 하나님이 굶어죽을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시려고 만나를 내리시고 메추라기를 땅에 떨어뜨리셨다는 것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말씀이고 현실은 현실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 우리 주변에도 많지 않은가? 아니 여러분들도 그럴지 모른다. 말씀은 말씀이고 현실은 현실이고, 성경에 기록된 것과 나와는 별로 상관도 없고... 자기와 상관없는 말씀 들으려니 재미도 없고 지루하고 졸리기만 한 것 아닌가? 다 믿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다만 믿는 척만 하는 것이다.
사마리아에 기근이 들었을 때 엘리사가 말함
“1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때 왕의 장관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가능한 말씀이라고 반박함
“2 그 때에 한 장관 곧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엘리사가 어떻게 말하는가? “엘리사가 가로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왕하 7장)
여러분이여. 그 장관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하나님의 기적적인 방법으로 사마리아의 기근의 원인인 아람 군대가 도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동안 먹지 못했던 배를 실컷 채우게 된다. 그러나 장관은 한줌도 먹지 못한다.
“16 백성들이 나가서 아람 사람의 진을 노략한지라 이에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이 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17 왕이 그 손에 의지하였던 그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의 한 말대로라 18 일찌기 하나님의 사람이 왕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한즉 19 그 때에 이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랴 하매 대답하기를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였더니 20 그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었으되 곧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죽었더라”(왕하 7장)
죽었으니 어떻게 먹겠는가?
여러분. 명심하고 기억하라. 말씀은 말씀이고 현실은 현실이라고 말한다면 그 말대로 될 것이다. 그게 아니다. “말씀은 현실 속에 이루어진다”. 단 믿는 자에게.
어쨌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보지도 않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도 없었던 한 가족은 자신들이 있어야 할 약속의 땅을 떠나버렸다.
2) 떠나고 머물고는 선택의 문제
어떤 사람들은 이 가족을 동정하여 이렇게 말할 것이다. “목사님. 어쩔 수 없잖아요. 얼마나 힘들면 약속의 땅을 떠났겠습니까? 더구나 자신들은 견딘다 해도 자녀가 굶주리는 꼴은 볼 수 없는 것이 부모 아닙니까? 너무 그 가족을 몰아치지 않으면 좋겠네요”
그러나 여러분. 약속의 땅을 떠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어렵고 힘든 일이라고는 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어렵다는 말과 불가능하다는 말은 전혀 다른 차원이 아닌가? 결국은 선택의 문제이다. 어렵더라도 자리를 지키느냐 아니면 좀더 편해지기 위해 자리를 떠나느냐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3) 우리에게도 있는 선택의 문제
그리고 이런 선택의 문제는 곧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말씀대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문제는 말씀대 로 살려하니 원수 마귀가, 세상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무릇 하나님을 향하여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지 않았는가? 말씀대로 살려고 하기에 때로 세상 속에서 핍박을 받는지, 아니면 좀 편하게 신앙생활하기 위해서 말씀을 슬그머니 저버리든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도 그렇다. 힘들어서 예배를 못 드리는 것이 아니다. 어려워서 오후예배를 빠지는 것도 아니다. 수요예배나 금요기도회에 나와서 은혜 받고 사명으로 무장하고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것도 불가능해서 안 나오는 것 아니다. 다 선택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하는 자리를 지켜야 하는데 자신이 좀 편하려고, 자신이 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려고, 자신이 좀 쉬거나 즐기려고 예배의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를 선택하는 것이다. 정말 쓸모없는 바보상자 앞에서 바보가 되기를 선택하든지, 친구들과 수다 떨기를 선택하든지, pc방에 가서 게임하기를 선택하든지, 아예 퍼져 자버리는 것을 선택하든지 하는 것이다.
새벽기도도 마찬가지이다. 새벽기도는 물론 어렵다. 힘이 든다. 자신의 의지와 싸워야 한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할 수 있다. 더욱이 특별새벽기도회는 일년 내내 하라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하나님께 맡기자는 의미로 특별새벽기도회인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나와 일하면 하루에 돈 100만원 준다고 할 때 안 나갈 사람 있는가?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하고 100만원하고 뭐가 더 귀한가? 당연히 100만원이다. 그러니 안 나오는 것 아닌가? 여러분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신앙이 성장하려면 때로 우리는 어렵고 힘든 것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왜 좁은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는가? 골탕 먹이려고 작정을 하셨는가? 아니지 않는가?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장)
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는가? 그 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오늘날의 세상에서 신앙인이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분명 힘든 일이다. 좁은 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선택하는 여러분에게 달려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를 선택하기를 소원한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생명이 되기 때문이다.
3. 약속의 땅을 떠난 결과
약속의 땅을 떠난 가족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겨보자. 좀 편안해지려고 약속의 땅을 떠난 가족은 편안해졌는가? 더욱 윤택하게 되었는가?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풍성하게 받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최악의 상태로 전락한다.
1) 더 큰 죄악으로 빠져듬
먼저 그들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게 된다.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무슨 말씀인가? 그 가족의 두 아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여인과 결혼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한 죄이다.
포로기 이후에 예루살렘에 귀환한 에스라는 돌아온 유대인들의 죄 때문에 엉엉 운다. 무슨 죄 때문인지 아는가?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가로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과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과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2 그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3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4 이에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가 이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인하여 다 내게로 모여 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5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대로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6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스 9장)
에스라가 통곡하며 회개했던 죄를 약속의 땅을 떠난 가족들이 범한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던 가족이 큰 죄를 범한 것이다.
잘 기억하시라. 머물러야 할 자리를 떠나는 것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또 다른 죄악을 유발하는 것이다.
이 금요예배 시간에 교회가 아닌 술자리에 있다고 생각해보라. 술자리에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반드시 죄로 연결되는 것이다.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을 범하게 되든지, 해서는 안 될 말이나 행동을 하게 되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든지(그들도 그리스도인인줄 알테니까), 정신 상태가 들뜨고 흥분되어 추한 꼴을 보이든지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말했는가? 아니지 않는가? 실제로는 이보다 더한 죄악들이 연말 술자리에서 벌어지지 않는가?
“목사님. 차마 그 자리를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선배 때문에, 상사 때문에, 동료 때문에, 직장 때문에, 내가 거기에서 맡고 있는 것 때문에..등등”.
그러나 다 핑계다. 아까도 말했듯이 선택의 문제이다. 어렵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아니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그까짓거 하나 NO라고 대답할 수 없는가? NO라고 대답함으로써 생기는 불이익하나 감당할 수 없는가? 성경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데 거꾸로 감당치 못할 세상, 아니 세상도 아니고 감당치 못할 몇 사람을 잔뜩 두고 살아갈 것인가? 명심하고 또 명심하라. 자신의 자리를 쉽게 이탈하는 사람은, 가지 말아야 할 곳에 자꾸 가는 사람은 죄도 쉽게 짓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도우심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먼저 우리의 죄악을 철저히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세상에 넋을 놓아 쉽게 교회를 떠나고 진리를 떠나고 있지 말아야 할 곳에 머물면서 죄짓는 것을 우습게 여겼던 우리의 흉악한 죄악을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우리가 중심으로 회개할 때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게 때문이다.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1 1장)
2) 비참해지는 가족
본문으로 돌아오자. 약속의 땅을 떠남으로서 첫단추를 잘못 끼었던 한 가족은 죄를 짓는 중간 단추를 끼울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비참해진 가족이라는 마지막 단추를 끼우게 된다.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무슨 말인가? 다 죽고 세 과부만 남은 것이다. 과부촌의 원조이다. 이게 무슨 꼴인가?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의 자리를 떠난 결과가 절대로 행복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시겠는가? 처음은 좋은 것 같은데 곧 속에서 쓴물이 나오고 마지막 남은 것 하나까지 다 토해내야 함을 깨닫지 못하시는가? 내 속에서 울음이 나온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이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말이다.
왜 이토록 부담스러운 말씀을 나누는지 이 젊은 목사의 마음을 부디 이해하시기를 바란다. 나는 사랑하는 여러분들중 단 한 사람도 불행해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 품에 있어야 하는데 그 자리가 싫고 다른 곳이 더 좋아보여서 떼를 써 받은 유산을 가지고 며칠이 못되어 먼 나라로 간 탕자의 처지를 알지 않는가?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장)
결국 아버지의 품이 가장 행복한 것인줄 철부지 탕자는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3) 약속의 땅만 못한 이방땅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탕자의 비유에서 먼 나라가 아버지의 품보다 못하다는 것을 비참해진 후에야 깨달은 탕자처럼, 약속의 땅을 떠난 후 모압땅에서 비참해진 후에야 힘들어도 약속의 땅이 축복의 자리임을 뼈저리게 느낀 가족들처럼 시행착오를 격은 후 약속의 땅에 머물러야겠다고 생각하고 싶은 분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번 따라해보자. “세상의 어떤 곳도 약속의 땅만 못하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다듬어 가시는 과정임을 기억하시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
한 해가 벌써 기울어가고 있다. 지나간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고난 중에 뒤로 물러난 자신의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편해보려고, 지금 당장의 고난과 시련을 줄여보려고,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쉽게 떠났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그 결과로 우리는 죄만 더 지었고 상황은 더욱 비참해지고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죄송한 모습으로 설 수 밖에 없었던 기억들을 잊지 마시라.
부디 사랑하는 여러분은 약속의 땅을 떠나지 마시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 하나님이 거하시는 자리,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자리를 귀히 여기시라. 그 자리에서 받는 고난은 고난조차도 영광으로 변한다는 놀라운 비밀을 가르쳐 드렸으니 남은 시간도 잊지 않고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라.
특별히 우리에게는 약속의 땅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가 있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해를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한다. 문제가 있으면 무조건 교회로 오라. 속상한 일이 있으면 일단 교회로 오라. 틈만 나면 교회에 들려라. 아무 것도 안 해도 교회에 있는 것을 좋아하시라. 성전을 떠나지 않았던 청년 여호수아처럼 말이다. 교회에서 맡겨진 여러분의 자리를 절대로 놓치거나 빼앗기지 말라.
약속의 땅을 떠나지 않는 여러분의 생애가 되시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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