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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웨슬레와 여인들

안희환2 2017. 12. 6. 17:21

요한 웨슬레와 여인들

 

감리교와 성결교 그리고 구세군의 신학적 아버지인 요한 웨슬리는 1703년 영국 링컨 주의 엡워드에서 영국 국교회 사제인 사무엘 웨슬리와 어머니 수산나의 아들로 태어 났다. 그의 삶은 곧잘 죽음의 위험에 빠지는 험난한 인생이었다. 그의 나이 7세 때인 1709년 불 타는 사제관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했고, 1736년에는 조지아를 떠나는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을 만나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다. 1738524일 올더스게잇의 모라비안 집회에서 낭독되는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듣다가 구원의 확신을 얻은 그는 1742년 어머니 수산나와의 사별을 통해 깊은 슬픔에 잠기기도 했다. 1743년에는 웬스베리에서 폭도들에 둘러 쌓이는 곤경에 ?지기도 했고, 1755년 영국교회와 분리되는 아픔을 겪었다. 1763년에는 런던 지진을 경험하고, 1788년에는 사랑하는 동생이요 충실한 동역자였던 찰스 웨슬리를 잃었다. 요한 웨슬리는 1791년 시티로드에서 별세하여 채플 뒷뜰에 뭍혔다.

 

그러나 이런 힘겨운 인생여정보다 더욱 험난했던 것은 여성과의 사랑이었다. 물론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이미 알려진 대로 그의 아내는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샨티페,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와 함께 세계의 3대 악처로 유명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의 아내 메리와의 결혼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랑은 늘 실패의 연속이었다.

 

웨슬리의 이상적인 여성상은 그의 어머니 수산나였다. 웨슬리는 그의 나이 6,7세 때 이미 어머니 같은 여자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아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하곤 했었고 결혼한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만큼 주님을 향한 마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결혼에 적극적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사랑은 운명과 같은 것. 샐리 커크햄(Sally Kirkham)이라는 여성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요한은 그녀의 마음을 잡기위해 용기를 내어 프로포즈했으나 그녀의 태도는 매몰찼다. 이 경험은 요한의 관심을 경건생활로 이끌었다. 1725년부터 영적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또 찾아왔다. 로빈 그리크스라는 여인을 사랑했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목사안수를 받고 처음 부임하여 목회하던 엡워드에서는 키티 하그리브스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의 실패는 유망한 목회자에게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웨슬리가 미국 조지아로 선교의 길을 떠난 것은 1735년이었다. 고국에서 실패한 사랑의 열정은 이국 땅 미국 조지아에서 이뤄지는 듯 했다. 소피 홉키(Sophy Hopkey)라는 여인을 깊이 사랑하였던 그는 나무 막대기를 책상 위에 세워 놓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어처구니없는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내가 소피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면 이 막대기가 앞으로 넘어지게 해주시고, 아니라면 뒤로 넘어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무심한 것이었다. 막대기는 뒤로 넘어졌다. 그녀는 윌리암슨과 결혼하였고 웨슬리는 그녀가 담당사제인 자신에게 사전통보를 하지 않았고 신앙생활이 나태해졌다는 이유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킬 정도로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다시한번 웨슬리의 무대에 한 여인이 등장하였다. 그녀의 이름은 그레이스 머레이Grace Murray)였다. 그녀는 남편이 바다에서 익사한 과부로서 감리교의 속장으로 웨슬리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웨슬리는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내가 만약 결혼을 한다면 당신과 할 것이다"

 

이제 가련한 노총각 목회자가 짝을 찾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결혼을 언약했다. 그러나 사랑의 실패는 엉뚱한 데서 꼬리를 비치었다. 동생 챨스가 둘의 결혼을 반대한 것이다. 이유는 둘의 결혼이 감리교 발전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란 것이었다. 표면적인 반대 이유는 그러했지만 챨스의 아내는 좋은 가문 출신이었으나 그레이스는 겨우 하녀생활을 면한 비천한 출신이었던 것이 실제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웨슬리의 마음은 착잡했다. 그는 기도하기로 마음 먹었다. 하나님의 응답이 꿈에 이뤄지기를 기대하면서... 드디어 기도가 응답되었다. 그러나 꿈의 내용은 그녀와의 사별이었다. 그녀는 챨스의 주례로 1749년 존 베네트라는 남자와 결혼했으나 얼마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랑에 있어 불행한 남자 요한 웨슬리에게도 드디어 결혼의 날이 왔다. 배필은 네명의 자녀를 둔 41세의 미망인 메리 버자일(Mary 혹은 Molly Vazeille)이었다. 1751210일 런던 다리를 건너다 부상당한 웨슬리는 그녀의 집에서 간호를 받았다. 병상에서 사랑의 화살은 그녀를 향해 날았다. 48세의 노총각 웨슬리는 자기 주위의 수많은 여자들의 유혹을 벗어나야 했다. 그는 결혼을 결심했다. 그의 결혼에 대하여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무튼 둘은 부부가 되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달콤한 로맨스를 허락지 않았다. 그녀는 인기있는 목회자 웨슬리의 여성관계를 늘 의심했고 그녀의 정신은 날로 불안해 갔다. 요한의 동생 챨스의 부인을 의심하기까지 했으며 전도여행에서 숙소를 제공하였던 많은 미망인들을 의심하여 정탐꾼을 보내기도 했다. 의심은 꼬리를 물었고 수많은 여인이 그녀의 도마 위에 오르내렸다. 결국 부부는 별거라는 극약처방으로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웨슬리는 그녀가 언제 죽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장례식에 웨슬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18세기 영국의 암흑을 비추었던 빛, 세계를 바꿔 놓은 요한 웨슬레의 사랑은 비극적이었다. 때론 사랑에 목마르고, 때론 사랑에 아팠으며, 때론 걷잡을 수 없는 흔들림 속에 놓여 있었던 웨슬리! 세계는 얻었으나 여인은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만약 웨슬리가 달콤한 스위트 홈을 얻을 수 있었다면 오늘의 웨슬리안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사랑의 실패는 영성생활과 선교의 열정에 바쳐졌고 그의 빈 옆구리엔 여인과의 로맨스와는 결코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연서 성경책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의 영성은 하나님의 체험적 사랑의 영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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