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신매매, 그 아픔의 현주소 - 김춘애
평양시 배급소들은 1995년 6월 하순부터 식량 배급을 중지했다. 군에서 제대된 후, 인민반장으로 일하던 나는 배급 줄 날만 마냥 기다리다가는 세 자식 모두를 굶어 죽이겠다 싶어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살았다.
낮에는 인민반장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고 밤에는 두부를 조금씩 만들어 가내 반에 내다 팔았으며 그 돈으로 강냉이를 조금 사서 두부를 만들 때 남은 비지를 섞어 자식들에게 주군 했었다. 때로는 다른 평양시 주민들처럼 주변 야산인 모란봉에 올라가 능쟁이(돼지 풀)며 쑥을 뜯어 밥 아닌 밥을 상위에 올리기도 하며 살았다.
그러던 1996년 5월 어느 날, 아침밥을 먹고 학교 갔던 아들이 퉁퉁 부운 얼굴로 집으로 돌아왔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며 맥없이 방바닥에 드러눕는 것이었다. 동 진료소와 구역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기초 의약품조차 없었던 병원에서는 쑥에 의한 중독 현상이라고 이야기 해 줄 뿐 주사한대 놓아주지 않았다. 쌀 씻은 물과 녹두가루를 우려낸 물로 해독을 한다, 어쩐다 하면서 한 달을 올려 뛰고 내리뛰면서 겨우 살려 놓았던 아들... 지금도 그때의 중독증세로 얼굴과 량 팔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 아들... 생각하면 할수록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눈 굽이 뜨거워진다. 그러면서도 다행 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병원에서 본 어떤 할머니는 쑥을 너무 먹다가 중독에 걸려 코가 절반이나 달아나고 없어졌다지 않았던가.
그리고 나는, 그때 비로소 우리 가족만이 아닌 평양시의 많은 주민들이 풀과 함께 독을 먹고산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앉아서 당하고 살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나는 1997년 8월, 맏딸에게 자그마한 밥사발 한 개를 쥐여 주며 국경지역인 함북도로 한번 가보라고 했다. 해방 전 시어머님이 시집올 때 가지고온 사발이었는데, 당시로선 돈이 된다던 골동품이 아닌가 해서였다.
그런데 문제의 사발을 가지고 떠난 맏딸이 한 달이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겁이 덜컥 나버린 나는 12살짜리 아들은 아빠에게 남겨놓고 열여섯에 난 둘째 딸만 데리고 함경북도에 먼 친척집을 찾아 떠났다. 그런데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밥사발이 팔리지 않자 맏딸이 돈을 벌어 오겠다면서 중국으로 갔다지 않는가. 딸 하나 잃게 된다는 생각에 (1997년 10월)무작정 두만강에 뛰어 들었다. 뼈 속을 파고드는 산골 물, 미끄러운 돌, 불안과 공포...어리지만 둘째 딸의 손목이라도 꼭 잡고 있으니 죽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굴뚝처럼 치솟았다.
중국 땅... 미스라는 마을에 들어가 인심 좋은 사람을 만나 밥을 얻어먹고, 옷까지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큰딸의 생김새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금시초문이란다. 후에 알고 보니 중국 쪽 국경지역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북한여성들을 상대로 한 인신매매에 환장해 있었다. 북조선 여자들을 보지 못해 못 팔아먹고 있었으며 지어는 북한 사람들을 끼고 사람장사를 하는 인간들도 있었다.
두만강을 건널 때만해도 딸을 찾는다는 희망이 있었건만 졸지에 눈앞이 캄캄해 졌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설 수는 없고... 여기 저기 수소문하며 큰딸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나는 집 주인이 소개를 받아 화룡시의 어느 가정보모로 들어갔다. 말이 가정보모지 막상 소개하는 집에 가 보니, 나처럼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북한 여성이 다섯 명이나 있었다.
제집 아내가 곁에 있는데도 오늘은 이 아이, 내일은 저 여자, 번갈아 가며 성폭행을 하던 중국의 인신매매꾼! 우리와 함께 있던 열여덟의 어린 여자애가 반항을 한다고 해서 스파나(스패너-공구의 북한말)를 자궁에 넣었다 뺐다 하던 두발 가진 짐승! 처녀애의 두 다리에선 붉은 피가 줄줄 흘러 내렸고 인간으로서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고 말 할 수 없는 야만적 행위들이 날마다 반복되었다.
일주일만에 채소를 사러 시장을 다녀와 보니 작은 딸이 없어졌다. 주인집에서는 그냥 "모른다"로 일관했고 큰딸을 찾기는커녕 작은 딸까지 잃어버린 나는 1997년 10월 20일부터 화룡 시내 시장과 골목이란 골목은 다 찾아 다녔다. 나아가 용정이면 용정, 연길이면 연길...연변 땅 곳곳을 이 잡듯 뒤집고 다녔으나 잊어버린 딸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중국에서 벌어진 일들은 모두가 후에 알게 된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시치미를 뚝 떼던 주인집에서 어린 내 딸을 흑룡강에 팔아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나에게 한 조선족 남자가 다가 왔다. 애초부터 나를 살펴왔다면서 자기 집에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는 조건으로 4000원에 팔려간 딸을 찾아서,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었다. 길거리에서 만난 남자...한편으로는 팔려간 딸을 도로 사준 남자...억이 막히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그 남자의 집에서 우리 모녀는 머슴과 같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밭에 나가 농사일을 했고 밤에는 소 외양간에서 쥐들과 소와 엉켜 잤으며 소를 먹이고 돼지를 기르고 탈곡을 하는 등 새로운 주인집의 농사일을 도맡아 했다. 그래도 모녀가 함께 있는 것이 좋았고 맏딸을 찾을 때까지 죽어도 헤어지지 말자고 늘 다짐하군 했었다.
어느 날부터 주인집 역할에 남편의 역할까지 도맡아 하던 그 남자, 나보다 열 살이나 이하인 조선족 남자는 주변 야산에 밭 한 쌍 반(중국의 단위-한국 5000평)을 개간할 것을 '명령'했고 술만 마시면 우리 모녀를 주어 패는 활극을 연출했다. 어떤 때는 나와 단 둘이 산에 올라가 힘을 겨루자는 해괴한 제의를 하고는 "내가 이기면 네 딸을 데리고 살고, 지면 너와 살겠다"고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잦아 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달려들어 나의 젖꼭지를 물어뜯으며 발광을 부리던 인간! 자식을 찾아야 하는 의무감만 없었더라면 열두 번도 더 목매달았을 가련한 나의 신세!
1999년 5월 어느 날, 밭일을 하고 들어와 TV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우악스런 젊은이들이 떼로 달려들어 우리 모녀를 끌고 가려 했다. 죽기를 각오한 필사의 몸부림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도망칠 수 있었으나 두 달 후인 7월 2일 밤 11시, 자고 있던 우리 모녀를 다시 덮치려 드는 인신매매꾼들을 피할 재간이 없었다. 기회를 엿보아 딸과 함께 창문으로 달아나려는데 어둠 속에서 내민 예리한 칼날이 가슴을 수~욱~파고드는 것 이였다. 피 흐르는 아픔보다도 소리치면 죽여 버리겠다던 인간들이 더 무서웠고 이런 인간들에 의해 또 다시 어디론가 팔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피 흐르는 상처를 봉합하지도 못 한 채 화룡시 소가자에 끌려갔고, 그곳에서 중국 돈 만원에 내몽고로 팔려 가는 신세가 되었다. 억울하고, 분하고, 하늘 끝에 올랐다 땅으로 뚝 떨어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는 우리모녀의 심정엔 아랑곳없이 인신매매꾼들을 우리를 팔아 넘겼다. 그리고는 화룡 복동이란 곳의 길목을 지키다가 우리 모녀를 다시, 돈을 주고 사간 사람들의 손에서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결국 싸움이 났다. 기회를 틈타 달아나는 우리 모녀를 판 놈, 사간 놈들이 개 무리처럼 뒤쫓아 왔다. 그러는 와중에 주민들의 신고로 화룡시 행정대 공안원들이 개입했고 우리 모녀는 공안국 구류장을 거쳐 1999년 8월 10일 화룡 교두를 통해 북한의 무산군 보위부로 강제 압송되었다.
열 명의 여자들을 감방에 가두어놓고 옷을 벗겼다. 가슴띠(브래지어)며 팬티까지 모두 벗겨 놓고는 손을 몸과 90도 방향으로 들게 했다. 그리고는 각자 60번씩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게 했다. 그러면 여성들의 자궁이나 항문 속에 숨겨두었을지 모를 돈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다음에는 머리검사라는 것을 실시했다. 머리핀을 빼게 하고는 이 잡듯이 머리카락을 흩어 나갔다. 유방이 큰 여성은 따로 불러내어 이리저리 흔들어대며 무엇을 숨기지 않았나 살펴보는 것이었다.
우리들 중 임산부가 한 명 있었는데 “똥뙈놈”(중국인을 비하하여 부르는 말)의 씨를 받아왔다고 구두 발로 배를 걷어차는 것이었다. 한 여인은 태어난 지 두 달 밖에 안 된 어린애를 안고 있었는데 역시 뙈놈의 씨라고 두꺼운 책으로 머리를 내려치는 것이었다. 보는 사람의 입에서조차 "악!"하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때 우리모녀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미국놈의 바지"라면서 빼앗아 버렸다. 결국 우리는 속내의 바람으로 보위부에서 무산군안전부 단련대로 가게 되었다. 썩은 밀가루에 호박을 넣은 죽 한 사발을 먹고 낮에는 강제노동을, 밤에는 군인 식 제식훈련을 해야 했으며 잠자리에 누워서도 빈대와 벼룩, 이들의 성화를 받아야 했다.
1999년 8월14일, 나는 배추 모 심는 일을 하다가 경비가 느슨한 틈을 타 도망을 쳤다. 퉁퉁 부은 다리를 끌고 산길 60 리를 달려 길을 헤매다 또 다시 두만강 물에 뛰어들었다. 장마철이라 사품치는 물살이 내 몸을 허공 들어올렸다. 정신을 잃고 한참을 물에 떠밀려 갔던 것 같다. 눈을 떠보니 어떤 집에 누워 있었고 곁에는 조선족 할머니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로는 두만강 하류(중국 쪽)에서 논일을 하던 조선족 청년이 시체인 듯이 떠내려가는 나를 발견하고 건져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또 한번의 탈북을 강행했고 저주스러운 북한을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큰딸의 행적은 알 수 없고, 작은 딸은 작은 딸 대로 북한의 노동단련대에서 고생을 하고...살았다고 생각하니 자식들을 다 팽개치고 나만 산 것 같아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하나밖에 없던 나의 남동생은 1999년 8월, 누이를 찾는다고 중국으로 나 왔다가 북한 보위부 특무들에게 걸려 북한으로 끌려갔으며 중국 생활 중, 남조선 사람의 도움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정치범으로 분류,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는 곳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내가 노동단련대에서 도망친 후, 그곳에 남은 어린 딸은 엄마를 대신해 모진 매질과 중노동을 강요당했다 한다.
그렇게 나에게 차례 진 고통마저도 두 어깨에 짊어졌던 열여덟의 막내딸이 끝끝내 두 번째 탈북에 성공했고 중국 용정시에서 살고 있던 나를 찾아왔다. 사람들은 "끝끝내"라는 말을 쉽게 하지만 열여덟 어린 나이에 엄마를 찾는다고 두만강을 다시 건넜고 강을 건너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딸을 납치한 인신매매꾼들에게 붙들려 도문에서부터 단동으로, 단동에서 다시 심양으로, 문자그대로의 천로역정을 헤쳐 온 딸애의 이야기를 생각할 때면 하도 가슴이 떨려 지금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곤 한다.
그렇게 우리 모녀는 다시 만났다. 그러던 2000년 7월, 우리는 또다시 탈북여성들을 찾아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다니는 조선족 납치꾼들에게 납치되었다. 죽어도 안간 다거니, 공안에 넘긴 다거니...마을 한 복판에서 난투극이 벌어졌고 우리 모녀는 다시 화룡시 변방 구류장에 두 번째로 갇히게 되었다.
운명의 7월 25일을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날이다. 중국으로부터 또 다시 강제 북송된 우리 모녀는 곧바로 청진집결소로 이송 되였다. 이제는 영락없이 죽었구나! 하면서 끌려간 청진 집결소 감방에서는 정말로 우리모녀를 죽이려고 작심 한 듯이 무리 지운 빈대가 꾸역꾸역 달려들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빈대가 배꼽이며 손가락 짬을 후비고 들어가 피를 빨아먹는가 하면 귀 구멍이며 입 언저리를 막논 하고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파고들었다. 자고 일어나면 온몸에서 팥알만 한 빈대들이 후둑 후둑 떨어졌다.
어느 곳인들 다르랴만 한 달 여 동안 우리가 감금되어있었던 청진집결소는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거의 한달 간 우리모녀는 창가에 박쥐처럼 매달려 자는 둥, 마는 둥 했으니, 창가는 창가대로 모기들의 성화가 말이 아니었다. 도무지 한 달 밖에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평생 목격할 수 없는 일들도 목격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가 갇혀 있던 감방에 임신 8개월 여성이 있었는데 조산한 아이, 그래도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생명을 담요에 싸서 그냥 버리는 것이었다.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그냥 내 동댕이쳐 있던 산모는 어디론가 끌려갔었다. 또 다른 여인은 중국에 들어가 얼마가 성폭행을 당했는지 매독에 걸려 자궁이 썩고 있었는데 아침저녁으로 당번이 정해져 여인의 자궁을 소금물로 닦아 내군 했었다.
8월 30일, 우리는 평양의 보위부로 호송되던 중, 호송병들이 조는 틈을 타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청진 역에서 성인 "꽃제비"로 두 달러를 보냈다. 2000년 10월 20일은 우리 모녀가 다시 북한을 탈출한 날이다. 또 다시 눈물의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 화룡시 숭선마을의 택가라는 사람을 만나 벼랑꼭대기의 산 막 집을 임시 거처로 삼았고 택가가 하라는 대로 밤이고 낮이고 호박씨를 까서 그에게 바쳤다. 어느 날, 택가가 산 막으로 찾아와 산동성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팔려 가는 가부다~생각하니 세상에 우리 모녀처럼 불행한 사람들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한국말을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산동성의 한족들이 우리를 죄인 마냥 감시하며 열차에 태웠다. 조양천 역에서 또 한번의 기회가 왔다. 한족들이 무슨 일 때문인지 서로 싱갱이를 하며 우리들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는 것이었다. 화장실 가는 척 하며 달아난 우리는 왜서인지 제2의 고향처럼 느껴지던 용정으로 숨어들었다. 그렇게 숨어든 용정에서 얼마를 더 보내다가...2001년 3월에 둘째를 데리고 산동성의 교주로 들어갔다. 교주 시내의 제노라하는 노래방에 주방아줌마로 들어가 월급도 받게 되었다.
어느 날 북조선 처녀들이 다섯 명이나 아가씨로 노래방에 팔려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딸이라면 딸 같은 애들인데 매일처럼 중국의 색마들에게 유린당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도망칠 수 있는 방법과 개구멍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도망치는 날과 거의 같은 시기에 얼마간 모아두었던 돈으로 잡지 광고를 냈다. 중국 조선족들이 발간하던 송화강 잡지에 "김춘애 어머님께서 큰딸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란 짤막한 문구와 연락처를 남겨 두었다.
광고를 낸지 두발이 지났을까. 기적처럼 큰딸이 나타났다. 기뻐서인지, 슬퍼서인지, 가슴이 아프다 못해 온 몸에 경련이 일었다. 우리 세 모녀가 한 지붕 밑에 모였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울었다. 아픔과 슬픔과 지나온 모든 치욕을 눈물로 씻어 버릴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고 울었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또 울었었다.
눈물이 마를 새 없이 나는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이번에는 중국공안에 잡혀서가 아니라 제 발로 두만강을 건넜다. 북에 남겨둔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아들을 찾아야겠다는 생각, 인제는 아들까지 함께 모여 사람다운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각오 하나로 북으로 들어가 아들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2003년 3월 6일, 북한에 있는 아들을 찾아 중국으로 데려왔다. 아빠는 죽었단다. 꽃제비라고 평양시 간리 9호 보호소에서 고생하던 아들을 품에 안던 날에는 웬일인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딸들을 만날 때 눈물샘이 영원히 막혀 버린 것 같았다.
6년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6년여의 세월이지만 나에게는 40대의 머리를 파뿌리로 만든 세월이었다. 그 통한의 6년여를 뒤에 남기고 아들과 두 딸을 데리고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2003년 6월 10일은 그렇게 우리 가족이 새 삶을 찾은 날이다.
글을 마무리하자니, 저 세상의 남편께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든다. 당신만의 아내였던 나, 김춘애가 본의는 아니라고 하지만 색마들에게 끌려 다녔던 순간들이 있었음을 용서받고 싶다. 자식들을 찾고, 자식들을 살리겠다고 그랬다지만 다 자란 자식들 앞에서 눈길 둘 곳 못 찾을 때가 허다하다.
죽어서 남편을 만나면 소복단장하고 끓어 앉을 생각이다. 저 세상에 가서라도 남편께 다시 사는 순정을 바치고 싶다. 그리고...나처럼 고생 많았던, 지금도 저 중국과 3국을 떠돌며 눈물과 한숨의 삶을 사는 내 고향의 여인들을 위해 늘 기도하련다.
낮에는 인민반장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고 밤에는 두부를 조금씩 만들어 가내 반에 내다 팔았으며 그 돈으로 강냉이를 조금 사서 두부를 만들 때 남은 비지를 섞어 자식들에게 주군 했었다. 때로는 다른 평양시 주민들처럼 주변 야산인 모란봉에 올라가 능쟁이(돼지 풀)며 쑥을 뜯어 밥 아닌 밥을 상위에 올리기도 하며 살았다.
그러던 1996년 5월 어느 날, 아침밥을 먹고 학교 갔던 아들이 퉁퉁 부운 얼굴로 집으로 돌아왔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며 맥없이 방바닥에 드러눕는 것이었다. 동 진료소와 구역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기초 의약품조차 없었던 병원에서는 쑥에 의한 중독 현상이라고 이야기 해 줄 뿐 주사한대 놓아주지 않았다. 쌀 씻은 물과 녹두가루를 우려낸 물로 해독을 한다, 어쩐다 하면서 한 달을 올려 뛰고 내리뛰면서 겨우 살려 놓았던 아들... 지금도 그때의 중독증세로 얼굴과 량 팔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 아들... 생각하면 할수록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눈 굽이 뜨거워진다. 그러면서도 다행 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병원에서 본 어떤 할머니는 쑥을 너무 먹다가 중독에 걸려 코가 절반이나 달아나고 없어졌다지 않았던가.
그리고 나는, 그때 비로소 우리 가족만이 아닌 평양시의 많은 주민들이 풀과 함께 독을 먹고산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앉아서 당하고 살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나는 1997년 8월, 맏딸에게 자그마한 밥사발 한 개를 쥐여 주며 국경지역인 함북도로 한번 가보라고 했다. 해방 전 시어머님이 시집올 때 가지고온 사발이었는데, 당시로선 돈이 된다던 골동품이 아닌가 해서였다.
그런데 문제의 사발을 가지고 떠난 맏딸이 한 달이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겁이 덜컥 나버린 나는 12살짜리 아들은 아빠에게 남겨놓고 열여섯에 난 둘째 딸만 데리고 함경북도에 먼 친척집을 찾아 떠났다. 그런데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밥사발이 팔리지 않자 맏딸이 돈을 벌어 오겠다면서 중국으로 갔다지 않는가. 딸 하나 잃게 된다는 생각에 (1997년 10월)무작정 두만강에 뛰어 들었다. 뼈 속을 파고드는 산골 물, 미끄러운 돌, 불안과 공포...어리지만 둘째 딸의 손목이라도 꼭 잡고 있으니 죽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굴뚝처럼 치솟았다.
중국 땅... 미스라는 마을에 들어가 인심 좋은 사람을 만나 밥을 얻어먹고, 옷까지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큰딸의 생김새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금시초문이란다. 후에 알고 보니 중국 쪽 국경지역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북한여성들을 상대로 한 인신매매에 환장해 있었다. 북조선 여자들을 보지 못해 못 팔아먹고 있었으며 지어는 북한 사람들을 끼고 사람장사를 하는 인간들도 있었다.
두만강을 건널 때만해도 딸을 찾는다는 희망이 있었건만 졸지에 눈앞이 캄캄해 졌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설 수는 없고... 여기 저기 수소문하며 큰딸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나는 집 주인이 소개를 받아 화룡시의 어느 가정보모로 들어갔다. 말이 가정보모지 막상 소개하는 집에 가 보니, 나처럼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북한 여성이 다섯 명이나 있었다.
제집 아내가 곁에 있는데도 오늘은 이 아이, 내일은 저 여자, 번갈아 가며 성폭행을 하던 중국의 인신매매꾼! 우리와 함께 있던 열여덟의 어린 여자애가 반항을 한다고 해서 스파나(스패너-공구의 북한말)를 자궁에 넣었다 뺐다 하던 두발 가진 짐승! 처녀애의 두 다리에선 붉은 피가 줄줄 흘러 내렸고 인간으로서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고 말 할 수 없는 야만적 행위들이 날마다 반복되었다.
일주일만에 채소를 사러 시장을 다녀와 보니 작은 딸이 없어졌다. 주인집에서는 그냥 "모른다"로 일관했고 큰딸을 찾기는커녕 작은 딸까지 잃어버린 나는 1997년 10월 20일부터 화룡 시내 시장과 골목이란 골목은 다 찾아 다녔다. 나아가 용정이면 용정, 연길이면 연길...연변 땅 곳곳을 이 잡듯 뒤집고 다녔으나 잊어버린 딸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중국에서 벌어진 일들은 모두가 후에 알게 된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시치미를 뚝 떼던 주인집에서 어린 내 딸을 흑룡강에 팔아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나에게 한 조선족 남자가 다가 왔다. 애초부터 나를 살펴왔다면서 자기 집에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는 조건으로 4000원에 팔려간 딸을 찾아서,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었다. 길거리에서 만난 남자...한편으로는 팔려간 딸을 도로 사준 남자...억이 막히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그 남자의 집에서 우리 모녀는 머슴과 같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밭에 나가 농사일을 했고 밤에는 소 외양간에서 쥐들과 소와 엉켜 잤으며 소를 먹이고 돼지를 기르고 탈곡을 하는 등 새로운 주인집의 농사일을 도맡아 했다. 그래도 모녀가 함께 있는 것이 좋았고 맏딸을 찾을 때까지 죽어도 헤어지지 말자고 늘 다짐하군 했었다.
어느 날부터 주인집 역할에 남편의 역할까지 도맡아 하던 그 남자, 나보다 열 살이나 이하인 조선족 남자는 주변 야산에 밭 한 쌍 반(중국의 단위-한국 5000평)을 개간할 것을 '명령'했고 술만 마시면 우리 모녀를 주어 패는 활극을 연출했다. 어떤 때는 나와 단 둘이 산에 올라가 힘을 겨루자는 해괴한 제의를 하고는 "내가 이기면 네 딸을 데리고 살고, 지면 너와 살겠다"고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잦아 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달려들어 나의 젖꼭지를 물어뜯으며 발광을 부리던 인간! 자식을 찾아야 하는 의무감만 없었더라면 열두 번도 더 목매달았을 가련한 나의 신세!
1999년 5월 어느 날, 밭일을 하고 들어와 TV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우악스런 젊은이들이 떼로 달려들어 우리 모녀를 끌고 가려 했다. 죽기를 각오한 필사의 몸부림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도망칠 수 있었으나 두 달 후인 7월 2일 밤 11시, 자고 있던 우리 모녀를 다시 덮치려 드는 인신매매꾼들을 피할 재간이 없었다. 기회를 엿보아 딸과 함께 창문으로 달아나려는데 어둠 속에서 내민 예리한 칼날이 가슴을 수~욱~파고드는 것 이였다. 피 흐르는 아픔보다도 소리치면 죽여 버리겠다던 인간들이 더 무서웠고 이런 인간들에 의해 또 다시 어디론가 팔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피 흐르는 상처를 봉합하지도 못 한 채 화룡시 소가자에 끌려갔고, 그곳에서 중국 돈 만원에 내몽고로 팔려 가는 신세가 되었다. 억울하고, 분하고, 하늘 끝에 올랐다 땅으로 뚝 떨어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는 우리모녀의 심정엔 아랑곳없이 인신매매꾼들을 우리를 팔아 넘겼다. 그리고는 화룡 복동이란 곳의 길목을 지키다가 우리 모녀를 다시, 돈을 주고 사간 사람들의 손에서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결국 싸움이 났다. 기회를 틈타 달아나는 우리 모녀를 판 놈, 사간 놈들이 개 무리처럼 뒤쫓아 왔다. 그러는 와중에 주민들의 신고로 화룡시 행정대 공안원들이 개입했고 우리 모녀는 공안국 구류장을 거쳐 1999년 8월 10일 화룡 교두를 통해 북한의 무산군 보위부로 강제 압송되었다.
열 명의 여자들을 감방에 가두어놓고 옷을 벗겼다. 가슴띠(브래지어)며 팬티까지 모두 벗겨 놓고는 손을 몸과 90도 방향으로 들게 했다. 그리고는 각자 60번씩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게 했다. 그러면 여성들의 자궁이나 항문 속에 숨겨두었을지 모를 돈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다음에는 머리검사라는 것을 실시했다. 머리핀을 빼게 하고는 이 잡듯이 머리카락을 흩어 나갔다. 유방이 큰 여성은 따로 불러내어 이리저리 흔들어대며 무엇을 숨기지 않았나 살펴보는 것이었다.
우리들 중 임산부가 한 명 있었는데 “똥뙈놈”(중국인을 비하하여 부르는 말)의 씨를 받아왔다고 구두 발로 배를 걷어차는 것이었다. 한 여인은 태어난 지 두 달 밖에 안 된 어린애를 안고 있었는데 역시 뙈놈의 씨라고 두꺼운 책으로 머리를 내려치는 것이었다. 보는 사람의 입에서조차 "악!"하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때 우리모녀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미국놈의 바지"라면서 빼앗아 버렸다. 결국 우리는 속내의 바람으로 보위부에서 무산군안전부 단련대로 가게 되었다. 썩은 밀가루에 호박을 넣은 죽 한 사발을 먹고 낮에는 강제노동을, 밤에는 군인 식 제식훈련을 해야 했으며 잠자리에 누워서도 빈대와 벼룩, 이들의 성화를 받아야 했다.
1999년 8월14일, 나는 배추 모 심는 일을 하다가 경비가 느슨한 틈을 타 도망을 쳤다. 퉁퉁 부은 다리를 끌고 산길 60 리를 달려 길을 헤매다 또 다시 두만강 물에 뛰어들었다. 장마철이라 사품치는 물살이 내 몸을 허공 들어올렸다. 정신을 잃고 한참을 물에 떠밀려 갔던 것 같다. 눈을 떠보니 어떤 집에 누워 있었고 곁에는 조선족 할머니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로는 두만강 하류(중국 쪽)에서 논일을 하던 조선족 청년이 시체인 듯이 떠내려가는 나를 발견하고 건져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또 한번의 탈북을 강행했고 저주스러운 북한을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큰딸의 행적은 알 수 없고, 작은 딸은 작은 딸 대로 북한의 노동단련대에서 고생을 하고...살았다고 생각하니 자식들을 다 팽개치고 나만 산 것 같아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하나밖에 없던 나의 남동생은 1999년 8월, 누이를 찾는다고 중국으로 나 왔다가 북한 보위부 특무들에게 걸려 북한으로 끌려갔으며 중국 생활 중, 남조선 사람의 도움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정치범으로 분류,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는 곳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내가 노동단련대에서 도망친 후, 그곳에 남은 어린 딸은 엄마를 대신해 모진 매질과 중노동을 강요당했다 한다.
그렇게 나에게 차례 진 고통마저도 두 어깨에 짊어졌던 열여덟의 막내딸이 끝끝내 두 번째 탈북에 성공했고 중국 용정시에서 살고 있던 나를 찾아왔다. 사람들은 "끝끝내"라는 말을 쉽게 하지만 열여덟 어린 나이에 엄마를 찾는다고 두만강을 다시 건넜고 강을 건너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딸을 납치한 인신매매꾼들에게 붙들려 도문에서부터 단동으로, 단동에서 다시 심양으로, 문자그대로의 천로역정을 헤쳐 온 딸애의 이야기를 생각할 때면 하도 가슴이 떨려 지금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곤 한다.
그렇게 우리 모녀는 다시 만났다. 그러던 2000년 7월, 우리는 또다시 탈북여성들을 찾아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다니는 조선족 납치꾼들에게 납치되었다. 죽어도 안간 다거니, 공안에 넘긴 다거니...마을 한 복판에서 난투극이 벌어졌고 우리 모녀는 다시 화룡시 변방 구류장에 두 번째로 갇히게 되었다.
운명의 7월 25일을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날이다. 중국으로부터 또 다시 강제 북송된 우리 모녀는 곧바로 청진집결소로 이송 되였다. 이제는 영락없이 죽었구나! 하면서 끌려간 청진 집결소 감방에서는 정말로 우리모녀를 죽이려고 작심 한 듯이 무리 지운 빈대가 꾸역꾸역 달려들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빈대가 배꼽이며 손가락 짬을 후비고 들어가 피를 빨아먹는가 하면 귀 구멍이며 입 언저리를 막논 하고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파고들었다. 자고 일어나면 온몸에서 팥알만 한 빈대들이 후둑 후둑 떨어졌다.
어느 곳인들 다르랴만 한 달 여 동안 우리가 감금되어있었던 청진집결소는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거의 한달 간 우리모녀는 창가에 박쥐처럼 매달려 자는 둥, 마는 둥 했으니, 창가는 창가대로 모기들의 성화가 말이 아니었다. 도무지 한 달 밖에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평생 목격할 수 없는 일들도 목격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가 갇혀 있던 감방에 임신 8개월 여성이 있었는데 조산한 아이, 그래도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생명을 담요에 싸서 그냥 버리는 것이었다.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그냥 내 동댕이쳐 있던 산모는 어디론가 끌려갔었다. 또 다른 여인은 중국에 들어가 얼마가 성폭행을 당했는지 매독에 걸려 자궁이 썩고 있었는데 아침저녁으로 당번이 정해져 여인의 자궁을 소금물로 닦아 내군 했었다.
8월 30일, 우리는 평양의 보위부로 호송되던 중, 호송병들이 조는 틈을 타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청진 역에서 성인 "꽃제비"로 두 달러를 보냈다. 2000년 10월 20일은 우리 모녀가 다시 북한을 탈출한 날이다. 또 다시 눈물의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 화룡시 숭선마을의 택가라는 사람을 만나 벼랑꼭대기의 산 막 집을 임시 거처로 삼았고 택가가 하라는 대로 밤이고 낮이고 호박씨를 까서 그에게 바쳤다. 어느 날, 택가가 산 막으로 찾아와 산동성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팔려 가는 가부다~생각하니 세상에 우리 모녀처럼 불행한 사람들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한국말을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산동성의 한족들이 우리를 죄인 마냥 감시하며 열차에 태웠다. 조양천 역에서 또 한번의 기회가 왔다. 한족들이 무슨 일 때문인지 서로 싱갱이를 하며 우리들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는 것이었다. 화장실 가는 척 하며 달아난 우리는 왜서인지 제2의 고향처럼 느껴지던 용정으로 숨어들었다. 그렇게 숨어든 용정에서 얼마를 더 보내다가...2001년 3월에 둘째를 데리고 산동성의 교주로 들어갔다. 교주 시내의 제노라하는 노래방에 주방아줌마로 들어가 월급도 받게 되었다.
어느 날 북조선 처녀들이 다섯 명이나 아가씨로 노래방에 팔려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딸이라면 딸 같은 애들인데 매일처럼 중국의 색마들에게 유린당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도망칠 수 있는 방법과 개구멍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도망치는 날과 거의 같은 시기에 얼마간 모아두었던 돈으로 잡지 광고를 냈다. 중국 조선족들이 발간하던 송화강 잡지에 "김춘애 어머님께서 큰딸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란 짤막한 문구와 연락처를 남겨 두었다.
광고를 낸지 두발이 지났을까. 기적처럼 큰딸이 나타났다. 기뻐서인지, 슬퍼서인지, 가슴이 아프다 못해 온 몸에 경련이 일었다. 우리 세 모녀가 한 지붕 밑에 모였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울었다. 아픔과 슬픔과 지나온 모든 치욕을 눈물로 씻어 버릴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고 울었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또 울었었다.
눈물이 마를 새 없이 나는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이번에는 중국공안에 잡혀서가 아니라 제 발로 두만강을 건넜다. 북에 남겨둔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아들을 찾아야겠다는 생각, 인제는 아들까지 함께 모여 사람다운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각오 하나로 북으로 들어가 아들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2003년 3월 6일, 북한에 있는 아들을 찾아 중국으로 데려왔다. 아빠는 죽었단다. 꽃제비라고 평양시 간리 9호 보호소에서 고생하던 아들을 품에 안던 날에는 웬일인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딸들을 만날 때 눈물샘이 영원히 막혀 버린 것 같았다.
6년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6년여의 세월이지만 나에게는 40대의 머리를 파뿌리로 만든 세월이었다. 그 통한의 6년여를 뒤에 남기고 아들과 두 딸을 데리고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2003년 6월 10일은 그렇게 우리 가족이 새 삶을 찾은 날이다.
글을 마무리하자니, 저 세상의 남편께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든다. 당신만의 아내였던 나, 김춘애가 본의는 아니라고 하지만 색마들에게 끌려 다녔던 순간들이 있었음을 용서받고 싶다. 자식들을 찾고, 자식들을 살리겠다고 그랬다지만 다 자란 자식들 앞에서 눈길 둘 곳 못 찾을 때가 허다하다.
죽어서 남편을 만나면 소복단장하고 끓어 앉을 생각이다. 저 세상에 가서라도 남편께 다시 사는 순정을 바치고 싶다. 그리고...나처럼 고생 많았던, 지금도 저 중국과 3국을 떠돌며 눈물과 한숨의 삶을 사는 내 고향의 여인들을 위해 늘 기도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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