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돈을 놓아두었는데 가져가지 않던 소년이
일부러 돈을 놓아두었는데 가져가지 않던 소년이
함경도 어촌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다. 1913년 어느 날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40척의 고기잡이배가 한 척도 돌아오지 않았다. 큰 폭풍에 모두 침몰된 것이다. 소년의 가족은 그 많던 재산을 희생자의 가족인 피해자들에게 나눠주고 빈손으로 동네를 떠났다. 할아버지는 삼년 후에 돌아 가셨다. 아버지는 장전으로 가족을 데리고 가서 산 속에 들어가서 산간을 일구며 화전민 생활을 시작했다. 장남인 김치선(1899-1968)의 영특함을 안 같은 마을의 서당 선생인 김응보 옹은 자신이 김치선을 돌보겠노라고 했다.
그런 어느 날 리터 영(영재형, 榮在馨, Lither Lisger Young, ?-1949)선교사가 함경도 서호리를 방문했다. 리터 영 선교사는 함흥에 있는 자기 선교 본부에 김치선을 데려다가 사환 노릇을 시키며 공부를 시켰다. 소년은 온갖 궂은일을 감당했다. 추운 겨울에 맨손으로 빨래까지 했다. 너무 힘이 들어 운적도 많았다. 선교사는 종종 소년이 알 만한 곳에 돈을 놓아두었다. 소년의 정직성을 시험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소년은 한 번도 그 돈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소년은 주인의 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함흥에 있던 영생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방학 중에 함흥에 있는 영생고등학교 곁의 신창리 교회에서 날마다 새벽기도를 드렸다. 그런 어느 날 밤중에 ‘불이야 불이야’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리터 영 선교사가 교장으로 있던 때에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관사의 문을 밖에서 닫아걸고 불을 지른 것이다. 순간 지혜를 발휘한 김치선은 이불을 물에 흠뻑 적셔 가지고 몸에 둘둘 감고 창문을 깨고 들어가서 영재형 선교사 내외를 구해내었다. 그러나 리터 영 선교사의 부인은 그 화재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하나님 곁으로 일찍 돌아가고 말았다. 상심한 리터 영 선교사는 잠시 마음의 안정을 위하여 캐나다에 귀국하여 머물렀다. 그러는 중에도 김치선의 생활비와 학비를 꾸준히 보내 왔다. 연희전문학교를 마친 김치선은 일본 고베 신학교를 거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석사, 달라스 신학교에서 한국인 최초의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소년이 1944년부터 남대문교회 담임목사를 지낸 김치선 목사이다. 일제 말기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함부로 새벽 기도를 드리지 못하던 때에도 그는 앞장서서 성도들과 함께 새벽 기도를 드렸다. 당시에 백범 김구도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김치선 목사는 김구의 둘째 아들인 김신의 결혼 주례도 맡았다. 김신은 나중에 공군참모총장, 주중 대사, 교통부장관 등을 지낸 인물이다. 김치선 목사는 안양대학교의 창설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