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은혜 주신다는 배짱 갖고 설교하라”
하나님께서 은혜 주신다는 배짱 갖고 설교하라”
정용섭 목사가 묻고, 박영선 목사가 답하다
▲박영선 목사가 대담에 앞서 발언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설교의 대가’ 박영선 목사(남포교회)와 ‘설교 비평가’ 정용섭 목사(대구샘터교회)가 21일 오후 서울 잠실동 남포교회에서 세 번째 대담을 개최했다. 두 목회자는 지난 5월 11일과 6월 4일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설교란 무엇인가’, ‘한국교회 설교,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두 차례 대담을 펼쳤다.
지난 두 차례와 달리, 이번 대담은 사회자 없이 진행됐다. 정 목사가 질문하고 박 목사가 답변하면, 다시 정 목사가 보충 설명하는 형식이었다. 이날 두 목회자는 ‘설교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큰 주제로 ‘설교자가 된 계기’, ‘설교자의 소명이란’, ‘설교자의 지성과 영성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좋은 설교자 양성을 위해 교회와 신학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을 묻고 답했다.
박영선 목사는 청중들을 향해 “어딘가 분명해지고 싶고 확인하고 싶은 막막한 그 사이에 있을 텐데, 여러분들의 자리는 길 잃은 자리가 아닌 두 벽의 사이, 그 안에 들어 있다”며 “못 알아 들으리라 예상하고 있지만, 마음껏 이중창을 하듯 (두 사람이) 성경 속에서 같은 고백과 소원들을 이렇게 저렇게 관점을 달리하여 서로 묻고 대답하는 가운데 넓이와 깊이와 크기를 체험하고, 이미 그 속에 (여러분들이) 있음을 아는 귀한 시간 되시길 바란다”고 서두를 열었다. 다음은 정용섭 목사의 질문과 박영선 목사의 주요 답변 요약.
정용섭 목사(이하 정): 성서와 강해, 텍스트에 집중해 오셨는데, 다 열리고 아셨는지, 아직도 알 것과 궁금한 것이 많으신지.
박영선 목사(이하 박): 언제부턴가 설교에 컨텍스트(context)와 텍스트(text)라는 단어를 도입하게 됐다. 우리 말로 적당한 단어가 없었다. 적당해서 쓰는 게 아니라 분명하게 표현할 단어가 없다는 뜻이다. 텍스트를 알기 위해선 컨텍스트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내용물이 담겨 있는 그릇 같은 것이다. 그릇이 내용물을 만드는 게 아니라 (내용물이) 그릇에 담겨 있고, 더 가면 둘이 분리되지 않는다.
텍스트를 찾는다고 하면 보통 한국이나 교회사의 유산에서는 형식과 진심으로 분리돼 있다.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진심이 있어야 했다. 형식의 반대어는 내용이어야 하는데, 한국적 유산에서 알게 된 것은 그 반대말이 진심이었지 내용이 아니었다. 내용을 지칭할 단어가 없다.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이 ‘사심 없이’이다. ‘죄를 버리고’라는 부정적 표현으로밖에 내용을 설명할 길이 없다. 회개하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확인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보라. 구체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것’보다 훨씬 적극적·긍정적이고 내용을 딱 지정해 주는 단어나 개념이 없다.
이처럼 텍스트를 논하려면 성경이 어디에 담겨 있는지를 봐야 한다. 텍스트는 시간과 공간에 담는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문학적 장르가 역사서이다. 이스라엘이라는 구체적 민족의 역사 속에, 신약이라는 교회사 속에 텍스트를 담는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컨텍스트이다.
▲박영선 목사는 “모세를 세운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였지, 모세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며 “‘아무 이름도 없는 사람’, 기독교가 증언하고 싶은 게 이것인데, 우리는 세상이 인정하는 것과 혼동돼 유능해지고 검증받고 싶어한다”고 했다. ⓒ이대웅 기자
컨텍스트를 보면 이스라엘 역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못난 짓들,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현실이 등장하는데, 다 컨텍스트이다. 구약 기록의 목적은 ‘이스라엘과 유대는 이렇게 망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붙잡고 놓지 아니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신약도 잘한 이야기는 없고 못한 이야기만 있다.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한 운명이 되지 않게 우리를 붙들어 매는 어떤 힘을 성경은 ‘인격자, 창조자, 구원자, 심판자’라고 이야기한다. 그분이 우리 인생과 역사와 세상에 대해 목적을 갖고 있고,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 텍스트이다.
그 텍스트가 기적으로, 꾸중으로, 때로는 자유로 주어지지만, 이는 어떤 개념이 아니라 ‘인격자’이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이런 식의 설명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표현이다. 추상적 단어가 아니라 인격이다. 윤리 중에 선택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것을 요구하시고 당신이 만드셨고 그것을 우리의 영광으로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텍스트이다. 하나님과 분리되면 어떤 명분도, 신비도, 가치도 다 거짓되게 되는 것이고, 이를 구별해 내는 것이 설교자의 몫이자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니겠는가.
정: 박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저도 모르게 빨려 들어간다. 회중들은 알지 못하지만 전하고 싶은 경험들을 하셨는지, 지금도 준비하시면서 그런 느낌이 오시는지.
박: 말씀드린 대로 성경의 장르는 역사이고, 역사는 시간과 공간 속에 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컨텍스트를 주심으로써 컨텍스트 자체가 텍스트는 아님을 증명하고, 그 텍스트는 컨텍스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순종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순종이 하나의 덕목으로써 가치를 갖고 명분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시는가? 시간과 공간 속에 우리를 담아서, 시간과 공간을 깨신다. 그것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기적이다. 기적을 행하시는 이유를 이렇게 이해해 보라. 시간과 공간을 주고, 전후와 좌우가 있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체화시키셨다. 우리의 경험을 구체화시키지만, 구체화된 것이 한계가 아니며 그 속에서 무한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성경이다.
▲질문하는 정용섭 목사. ⓒ이대웅 기자
성경에 시도 때도 없이 기적이 나오고 예언이 나온다. 기적은 인간적 파격이요, 예언은 시간의 파격이다. 동화를 보면 저주를 걸기도 풀기도 하는 마법이 등장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해피엔딩을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해피엔딩을 만들 수 없다는 걸 인류는 역사 속에서 경험하고 확인했다. 시간과 공간에 붙잡혀 있어 구체적이지만, 그것을 넘어서 내용을 담아야 한다. 성경은 시간과 공간 속에 우리를 넣어 경험케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마음대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신다.
동정녀 탄생을 보라.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피조물을 만드신, 모든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 시간 속에 들어오시는데, 시간 속에 들어 있는 피조물의 뒷순서로 들어올 수 있다고 증언하는 것이다. 처녀 탄생을 믿느냐의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이 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성취가 뒤에 들어오는지를 봐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어떤 문제의 해결, 주문, 기술이 아닌 ‘성품’으로 표현하신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함이 풍부하신, 그것이 텍스트이다. 여러분이 인생에서 마주치는 모든 도전과 위협과 자책 등이 이에 대한 답을 찾아가게 만든다. 이것이 아니면 답을 찾을 수 없다. 깨우치고 나면 매우 놀랍고, 두려움을 갖게 되고, 경이롭다. 하나님의 현존 앞으로 우리를 붙들고, 우리의 존재와 인생을 그런 감격과 경외심으로 붙잡으신다.
정: 여러 차례 말씀하셨지만, 설교자가 되신 계기와 소명이 있으신지. 저는 그것이 한순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소명이 지속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도 설교를 준비하면 성서의 텍스트가 제게 말을 건다. 그걸 소명이라 생각하고 전한다. 그냥 말을 거는 게 아니라, 질문을 해야 말을 건다.
박: 제게는 예수를 믿은 게 하나의 유산이다. 어느 날 철이 들고 보니 굉장히 많은 부분을 유산으로 받았음을 알게 됐다. 저는 모국어처럼 예수를 믿었다. 외국어는 문법부터 배우지만, 모국어는 그냥 듣고 말한다. 예수를 중간에 믿은 사람들과 유산으로 가진 사람들의 사명은 다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