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감격하는 이유/ 안희환
내가 감격하는 이유/ 안희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사랑한다. 십자가를 자랑스러워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스럽게 고안된 처형법이 십자가 처형인데 그 처형에 사용된 십자가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성격이 괴팍하기 때문일까? 아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함 받을 길을 열어놓으셨기에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십자가 자체에 어떤 매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구원의 역사 때문에 십자가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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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부활 사건이 필수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기가 막힌 진리의 말씀들을 가르치셨다고 하더라도 십자가에 죽으신 후 땅에 묻혀 한 줌의 흙으로 사라지고 말았다면 예수님은 더 이상 우리의 구원자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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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감동과 도전을 줄지언정 그 이상의 것을 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이순신 장군이 훌륭하고 세종대왕이 존경 받을만 하지만 그 분들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놀라운 일들을 해줄 수 있을까? 특별히 우리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어찌 해결해줄 수 있을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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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사라져버렸다면 그 분이 훌륭하고 위대한 분일 수는 있어도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수는 없다. 자신도 죽음을 이기도 못한 채 한 줌의 흙으로 사라져간 처지에 어찌 우리의 죄를 씻어주며 어찌 우리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예수라면 우러러볼지언정 믿을 수는 없다. 존경할지언정 우리 인생을 온전히 맡길 수 없다. 예수는 그저 과거에 살았던 한 인물이었을 뿐 그 이상은 아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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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살아나셨다. 생명의 주님이시기에 죽음 따위가 예수님을 돌무덤 속에 잡아둘 수 없었다. 무덤 주위를 굳게 지키던 로마의 용맹한 군사들도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 앞에 죽은 자처럼 되고 말았을 뿐이다. 거대한 돌무덤 역시 주님이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처럼 다시 사심으로써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이제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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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언트라고까지 불린 거대한 뇌종양이 내 머릿속에 생겨 수술을 하게 되었을 때 수술 대기실에 누워있는 내 마음은 극히 평온하였다. 두려움도 불안도 초조함도 내 안에서 꿈틀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의사가 수술 전 날 세 번에 걸쳐 이번 수술이 위험하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한 의사의 말보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서 믿을 수 있는가? 그가 죽고 사라진 분이 아니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계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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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수님이 좋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해 기꺼이 물과 피를 쏟으시고 죽으실 만큼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이 좋을 수밖에 없다. 나는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한다. 죽음마저 이기고 다시 사셔서 함께 하신다고,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을 날이 갈수록 더 신뢰할 수밖에 없다. 부활절을 맞아 금천구 연합새벽예배를 드리면서, 부활절 예배에 말씀을 전하면서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른다. 아니 그 감격은 날마다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