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환 주일설교

세상에 도전하는 사람이 되자 다니엘 3:1-12(2002. 7. 21 주일오전예배 설교)

안희환2 2012. 4. 28. 23:19

세상에 도전하는 사람이 되자 다니엘 3:1-12(2002. 7. 21 주일오전예배 설교)

 

1.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육십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2.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을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게 하매

3. 이에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여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 앞에 서니라

4. 선포하는 자가 크게 외쳐 이르되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로 말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하시나니

5.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6.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하였더라

7.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자 곧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엎드려 절하니라

8. 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9.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이르되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

10. 왕이여 왕이 명령을 내리사 모든 사람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엎드려 금 신상에게 절할 것이라

11.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음을 당하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2.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이거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흐름이라는 것이 있음.

강물도 흘러감.

바다도 흘러감. 해류.

 

죽어있는 것들은 그 흐름에 떠내려 감. 어쩔 수 없음.

 

그러나 살아있는 것들은 떠내려가지 않음. 얼마든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함. 살아있는 것의 특징임.

 

신앙도 마찬가지임.

세상에 흐름이라는 것이 있음. 죄악으로 흘러감. 이기주의로 흘러감. 음란으로 흘러감. 탐욕으로 흘러감. 생명력이 없는 교인들은 그런 흐름에 떠내려감. 그러나 살아있는 신앙인은 거슬러 올라감.

 

주일을 철저히 지키면서 사업을 하는 회사가 있다. 그 회사의 물건을 판매하는 점포를 운영하려고 하면 주일에 장사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여야 한다. 회사에서 점포를 담당하는 직원이 사장에게 주일에 장사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선뜻 점포주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사장님께서 그것만 양보한다면 일 년에 약 100개의 점포를 개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사장은 그 작원에게 물었다. "주일 지키는 일을 계속 고집하면 일 년에 몇 개 정도의 점포가 개설될 것 같은가?" 그 직원은 약 10개 정도가 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사장은 "그럼 10개만 개설하도록 하게."하고 이야기하였다. 주일을 어기면서 100개의 점포를 운영하여 많은 연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주일을 지키면서 10개의 점포만을 운영하여 적은 연보를 드리는 것이 더 옳고 좋은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음.

 

여러분은 세상의 흐름 따라 주일을 범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 따라 주일을 지키는가?

 

세상의 흐름은 예배가 아닌 다른 것들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게 함.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런 흐름을 거슬러 감. 믿음이 자라면서 공예배를 드림. 새벽기도도 함. 영적으로 더 강해짐. 더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됨.

 

성경은 말씀한다.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10)

 

세상의 흐름에 굴복하는 자가 아니라 도전자가 되시기를 바란다. 떠내려가는 자가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는 자가 되시기를 바란다.

 

설교 제목. 세상에 도전하는 사람이 되자.

 

 

1. 느브갓네살의 어리석은 행동

 

1) 우상을 만드는 느브갓네살왕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오자. 오늘 본문에 보면 느브갓네살은 몇 가지 면에서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첫째로 그는 우상을 만들어 세우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1.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육십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죄악 중에서 우상숭배하는 죄악을 가장 싫어하신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제쳐두고 인간이 자신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20)

실제로 우상숭배하는 개인이나 가문, 나라는 철저하게 망하고 만다. 귀신을 섬기고 잘된 사람 본적이 있는가? 우상 숭배가 흥행하는 나라 중 잘사는 나라가 있는가?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제쳐두고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 앞에 빌고 있으니 잘된다면 그것이 기적일 것이다. 그리니 우상숭배하는 행위야말로 어리석은 것 중에 어리석은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벨론의 왕인 느브갓네살이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돈이 남아돌아 주체할 수가 없는지 금으로 엄청난 크기의 신상을 만들어 우뚝 세워놓은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절대 권력자.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임. 그러나 그런 느부갓네살에게도 두려움이 있음. 뭔가 의지할 대상이 필요함. 그렇기에 우상을 만든 것이다.

 

2) 사람들로 하여금 우상에게 절하게 함

 

둘째로 느부갓네살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상에게 절하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2.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을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게 하매

3. 이에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여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 앞에 서니라

4. 선포하는 자가 크게 외쳐 이르되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로 말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하시나니

5.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느브갓네살은 바벨론의 최고 권력자이다.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는 인권이니 기본권이니 하는 것이 인정되지 않는다. 왕은 원하는 대로 자기 나라 안의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도 있고 형벌을 가할 수도 있다. 왕의 말은 법과 같은 효력을 발휘하기에 사람들은 감히 그 말을 거역할 생각을 못한다. 느브갓네살은 자기에게 있는 그와 같은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신하들이 우상숭배를 위한 예식에 참석하도록 하였으며, 백성들에게도 우상에게 엎드려 경배할 것을 명한 것이다.

 

힘이 있다는 것은 나쁜 것만은 아님.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되면 좋음.

그런데 그 힘을 가지고 엉뚱한 방향으로 사용하니 문제임. 나라를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가니 문제임.

 

3) 절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함

 

셋째로 느브갓네살은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자를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6.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하였더라

 

풀무는 용광로의 다른 말이다. 쇠를 녹이는 곳이다. 근처에 가 있기도 힘들만큼 불이 뜨겁게 타오르는 곳이다. 그런데 느브갓네살은 자신이 만든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자를 그 풀무불 속에 던져 넣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엄청난 권력을 이용해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일을 위해 사용하면 좋을 텐데 미련하게도 우상숭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우상숭배하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강요와 위협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겐 커다란 짐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란 이야기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들어오는 여러 가지 압력 때문에 고난을 겪을 때가 많다.

 

폴리캅은 늙은 나이에 로마의 군병들에게 붙잡혔다. 로마의 관원은 폴리캅에게 말했다. “예수를 부인하지 않으면 화형을 시키겠다”. 폴리캅은 예수를 부인하고 살길을 택하지 않고 순교의 길을 택했다.

 

오늘날 우리들도 수많은 우상숭배의 문제들과 부딪히며 살아간다. 사람들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을 신처럼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날 물질은 곧 신이다. 사람들은 돈돈 하며 산다. 그 돈을 위해서 신앙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라고 부추긴다. 이것은 대단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현 세상은 돈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조차 예배는 잘 빠지면서 돈 생기는 곳은 반드시 가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어떠한가? 우상숭배, 즉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더 우선시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세상 속에서 어떤 삶의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고 있는가?

 

 

2. 느브갓네살의 명령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오늘 본문에서는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삶의 태도를 세 가지로 보여주고 있다.

 

1) 우상에게 절하는 사람들

 

우상숭배의 압력 속에서 보이는 첫째 태도는 세상의 흐름에 쉽게 굴복하는 태도이다.

 

7.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자 곧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엎드려 절하니라

 

이들은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바벨론에서 어려움 당하지 않고 속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현실주의자들인 것이다. 신상이 참 하나님이 아니면 어떻단 말인가? 왕 앞에서 절하는 시늉만 하고 아무도 없을 때 오줌이라도 싸주면 될 것 아닌가? 아니 이렇게 엄청난 크기를 금으로 만들었으니 절을 받을 가치가 있지 않은가? 평생 가야 보지도 못할 액수의 금을 마음껏 볼 수 있으니 절을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만약 왕의 눈 밖에 났다가 풀무불 속에 들어가면 큰일 아닌가? 이럴 땐 무조건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최고야.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간다. 많은 크리스찬 젊은이들이 군대에 가서 신앙을 버린다. 교회 가지 말라고 하는데 억지로 가다가 고달픈 군대 생활하느니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조금 있던 신앙까지 다 까먹고 제대할 때는 완전히 폐인이 되어 나온다.

 

어떤 젊은이들은 대학가서 망쳐진다. 선배들이 술 한 잔 주며 마시라는데 튈 필요가 뭐 있겠는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럴 때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제일이라며 주는 대로 받아 마신다. 어디 젊은이들뿐인가?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직장의 회식 자리에서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는다. 동료 따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간다. 하지 말아야할 말을 한다. 혼자서 표시내면 왕따를 당하니까 그냥 두리뭉실 묻어 넘어가는 것이다.

 

교인들의 우상숭배는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남편이 우상이다. 남편을 사랑하거나 정말로 좋아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남편이 하나님보다 앞서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우선시되는 모든 것이 우상 아닌가? 창조주는 하나님뿐이신데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우상숭배라고 할 때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편을 하나님보다 더 잘 섬기는 것은 명백히 우상 숭배인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남편을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남편이 없을 때 더 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실 아닌가? 남편을 아주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것은 아닌데 남편이 무서워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것도 우상숭배이다. 아마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분은 반문을 할지도 모른다. “남편이 무서워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는데 그게 왜 우상 숭배입니까?”.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남편 말을 더 어려워하니 우상숭배인 것이다. 하나님은 주일성수하라고 하시는데 남편 말 듣고 주일을 범하니 남편이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는 것 아닌가? 매를 맞더라도 주일을 지키며 기도한다면 결국은 남편까지도 하나님이 구원하실 수 있을 텐데 남편한테 끌려 다니다가 자기 신앙만 쭉정이 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어떤 사람은 아내가 우상이다. 아내를 신주단지 모시듯이 한다. 오해하지 말라. 이것은 아내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오히려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다만 아내가 너무 중요시되어 하나님보다 앞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녀들이 우상이다. 자녀를 위해서는 많은 돈을 사용한다. 그런데 헌금에는 인색하다. 자녀들을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그런데 예배드리는 시간엔 그렇게 인색할 수가 없다. 자녀 생각하는 것의 반의 반 만큼이라도 하나님을 생각할까? 학원이나 학교를 챙기는 것만큼이나마 자녀들이 예배드리는 것을 챙길까? 내가 보기에 많은 교인들이 생각을 잘못하고 있다. 내가 자녀들에게 정성을 쏟는 만큼 자녀들이 잘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여러분이여. 자녀를 정말 잘 키워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자녀를 정말 잘 키우는 방법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신앙인으로 서는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 행동과 사고를 모방한다. 이것은 이제 새삼스러울 것이 없을 만큼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사람의 일생은 어버이에 대한 모방의 도정이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그에 대한 거역의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버이가 아무리 못나고 못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또 그 자녀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대개 인간의 역정은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모의 영향권을 벗어날 만큼 충분히 성숙하고 인생의 경험을 쌓았다고 자부할 만큼의 나이가 됐어도 막상 양자택일의 결정적 순간에 부닥치면 부모의 행동패턴을 따른다는 분석도 나와 있다. 결국 아이들은 부모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에 몸에 배는 것이다.

 

그런데 부모가 신앙생활을 엉터리로 하면 자녀들은 어떻게 되는가? 따라하는 것이다. 반대로 부모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 어떻게 되는가?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자녀들의 삶의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도우셔야 자녀가 잘된다고 하면 그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신앙을 갖도록 하는 것이 부모의 할 일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라도 부모 자신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녀가 우상이 되고 있으니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공부라는 우상

 

친구라는 우상

 

사랑하는 여러분. 절대로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세상과 타협하지 마시라. 현실과 타협하지 마시라. 그저 환경 따라 여건 따라 이익 따라 우상에게 쉽게 절하는 여러분이 되지 마시라.

 

어떤 교인들은 연예인이 우상이다. 레이디가가 같은 가수가 우상이다. 음란하건 말건, 동성애를 조장하건 말건, 피를 흘리며 인육을 먹는 퍼포먼스를 하건 말건.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쿨하고 진보적이란 소리를 듣는 게 좋은 모양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결국은 하나님보다 문화가 앞선 것이다. 연예인이나 문화가 우상이 된 것이다.

 

2) 절하지 않는 자들을 참소하는 사람들

 

우상숭배의 압력 속에서 보이는 첫째 태도는 세상의 흐름에 쉽게 굴복하는 태도라고 했다. 둘째 태도는 우상숭배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을 참소하는 것이다.

 

8. 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9.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이르되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

10. 왕이여 왕이 명령을 내리사 모든 사람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엎드려 금 신상에게 절할 것이라

11.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음을 당하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2.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이거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갈대아 사람들른 바벨론 본토 사람들이다. 반면에 유다 사람들은 갈대아 본토 사람이 아니다. 예루살렘을 도성으로 둔 유다에서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이다. 이제 함께 바벨론에 살기는 하지만 사실은 소속이 다른 것이다. 아마 여기에서부터 갈대아 사람들의 감정이 작용을 한듯하다. 비록 한곳에 살지만 소속이 다른 유대인들이 못마땅한 것이다. 더구나 자신들처럼 왕의 말을 듣고 절해야 하는데 절하지 않는 모습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왕을 찾아왔고 왕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풀무불 속에 넣겠다고 한 왕의 말을 상기하면서 왕에게 고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습이 세상과 성도와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산다. 그리고 성도들도 세상 속에서 산다. 그런데 문제는 소속이 다르다는데 있다. 성도의 소속은 세상에 살아도 세상이 아니라 천국인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3). 이렇게 소속이 다르니 세상은 성도를 향하여 색안경을 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않고 전혀 다른 삶을 살 때 세상은 성도들을 향하여 더욱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여. 갈대아 사람들이 고소한 요지가 무엇인가? 다 우상에게 절하는데 유대인들만 절하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 남들 다하는데 유독 성도만 안할 때, 세상의 흐름을 다 따라갈 때 유독 성도만 따라가지 않을 때 세상은 그것을 못마땅해 하는 것이다. 때로는 조롱하고 때로는 비웃고 때로는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때로는 훼방을 치는 것이다. 따라서 정말 문제는 세상에서 신앙의 열정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 고난당하는 것은 영광된 축복이 있는데 그것이 어찌 문제가 되겠는가? 성경은 말씀한다.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5)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세상의 참소와 공격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여러분이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증표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

 

성경에 보면 사단이 욥을 참소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욥은 많은 고난을 당한다. “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1).

 

여러분이여. 욥이 죄가 많아서 사단에게 공격을 받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욥은 오히려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2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3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4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1).

 

그리고 바로 이점 때문에 사단의 참소를 당한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이야 내버려두어도 사단이 마음대로 끌고 다니니까 상관이 없지만 욥만은 도대체 꼼짝을 안하니까 넘어뜨려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특별히 고난이 많은 분들은 잘 들으시라. 죄가 있다면 죄 때문이니 철저히 회개하시라. 그런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 고난이 자꾸 오면 기뻐하시고 감사하시라. 사단이 마침내 여러분을 위험인물로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러나지 않고 승리하면 큰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공식처럼 기억해두면 좋은 것을 하나 알려드리겠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도전하는 자는 고난과 시련을 겪을 것이지만 반드시 하나님이 갚아주신다고 하는 점이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성을 재건할 때 얼마나 많은 비웃음이 있었는가? 얼마나 많은 참소가 있었는가? 말과 행동으로 얼마나 많은 공격이 있었는가? “1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을 비웃으며 2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3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4).

 

“7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8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9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10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11 우리의 대적은 이르기를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희 중에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12 그 대적의 근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고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4).

 

그런데 포기하거나 뒤로 물러나지 않고 기도하면서 계속 성을 지었을 때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주시지 않았는가? “27 예루살렘 성곽이 낙성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28 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 들과 느도바 사람의 동네에서 모여 오고 29 또 벧길갈과 게바와 아스마웻 들에서 모여 왔으니 이 노래하는 자들은 자기를 위하여 예루살렘 사방에 동네를 세웠음이라 30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케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을 정결케 하니라”(12)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때로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고난과 어려움이 생기고 비난과 공격을 받다보면 신앙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싶은 생각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시라. 그 모든 것들 속에서 다만 올 것이 왔다하고 생각하시기 바란다. 살아있는 신앙을 증명할 기회가 왔음을 기억하시라. 하나님이 곧 갚아주실 때가 가까웠음을 기억하시라. 세상을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하더라도 묵묵히 이겨내시는 능력 있는 성도되시길 축원한다.

 

3)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사람들(세상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

 

우상숭배의 압력 속에서 보이는 첫째 태도는 세상의 흐름에 쉽게 굴복하는 태도라고 했다. 둘째 태도는 우상숭배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을 참소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이는 태도이다. 세 번째 태도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태도이다. 다 절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인물은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이다. 이들은 알려진 대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다. 사람은 그 친구를 보면 안다고 신앙의 사람 다니엘을 친구로 둔 젊은이들 답게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추상같은 느브갓네살왕의 명령을 거역하였다. 그 때문에 참소를 당하게 되었고 죽음의 위협 앞에 놓이게 되었다. 이들은 세상의 흐름에 굴복하지 않고 도전한 자들이다. 이들은 땅에 발을 디디고 살지만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이들은 사람들의 이목과 인기에 관심이 있지 않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 자들이다. 믿음의 소수요, 창조적 소수인 자들이다.

 

사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람들은 대다수가 믿음의 소수자들이었다.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사람들이다.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께 굴복했던 자들이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무모할 만큼 세상에 도전했던 사람들이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상을 태워버렸고 그 덕분에 마을 사람들에게 죽을뻔하였다. “25 이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비의 수소 곧 칠년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26 또 이 견고한 성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취하여 네가 찍은 아세라나무로 번제를 드릴찌니라 27 이에 기드온이 종 열을 데리고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행하되 아비의 가족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28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바알의 단이 훼파되었으며 단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 29 서로 물어 가로되 이것이 누구의 소위인고 하고 그들이 캐어 물은 후에 가로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30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찌니 이는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단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6)

 

엘리야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우상과 대항하였다. 그는 적진의 한복판에서 담대하게 참하나님을 가리자고 제안하고 우상의 추종자들을 조롱한다. “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한 송아지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놓지 말라 26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찌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왕상 18).

 

그는 결국 기도 응답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한다. “32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번 그리하라 하여 세번 그리하니 35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왕상 18).

 

여러분이여.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아합왕이 바알신 추종자다. 왕비인 이세벨은 바알을 퍼뜨린 주동자다. 백성들도 다 우상으로 기울었다. 이젠 그렇게 사는 것이 대세다. 하나님을 섬기면 100% 왕따다. 그러나 엘리야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의 흐름이 아니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살아계신 하나님을 백성들 앞에 드러내고야 말았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누구인가를 기억하라. 언제까지 세상에 굴복하겠는가? 이제는 주님을 위해 세상에 끌려 다니지 말고 세상에 도전하라.

 

예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 밸리고교의 한 한인 학생이 3만 달러 이상의 장학금을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갔었다. 아버지는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의류업체 공장에 다니면서 삯바느질로 아들을 공부시켰다. 그런데 이런 어려운 형편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여 하버드 대학에 장학생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어려움도 많고 유혹도 많았을 텐데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그는 "놀고 싶을 때, 공부하기 싫을 때, 나는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자신이 어떻게 하는 것이 먼저 떠난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것인가를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길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는 것이라 여기고, 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새벽까지 공부하고, 아침 일찍이 일어나 열심히 공부했던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해야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할까를 깊이 생각하면 된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를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 아버지를 슬프게 해드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세상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굴복하지 않는 여러분이 되길 축원한다.

 

 

3. 세상에 도전하는 자의 특징

 

사랑하는 여러분. 이쯤에서 다시 한번 질문을 드린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여러분은 세상에 굴복하는 자인가 아니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세상에 도전하는 자인가? 세상에 도전하는 자는 그 특징이 있는데 여러분은 그 특징을 보이고 있는가?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란다.

 

1)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염두에 둠

 

첫째로 세상에 도전하는 자는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염두에 둔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왕보다 하나님을 더 생각하였다. 관원들의 이목보다 하나님을 더 생각하였다. 백성들의 판단보다 하나님을 더 생각하였다. 자신의 출세나 이익보다 하나님을 더 생각하였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욱 염두에 둔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따라간다. 세상에 좋은 것이 많은 것 같아서 열심히 쫓아다닌다. 그러나 쫓아다닌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얻어진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결국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 중에도 세상에 푹 빠져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긴 해도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세상을 살아간다. 기도하라고 해도 기도하지 않는다. 성경 읽으라고 해도 성경 읽지 않는다. 전도하라고 해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소리로 여긴다. 충성과 봉사는 남의 일이다. 심지어는 예배조차도 소홀하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축복 역시 자신과 상관없는 것이 되고 자기 혼자 끙끙거리며 살아가는 고아 같은 처지가 된다. 하나님이 아버지신데 고아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 기억하시라. 세상 쫓아다녀봐야 별거 없다. 사람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기에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정말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부디 여러분은 세상에 굴복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에 도전하는 자가 되시라.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욱 염두에 두고 사시기를 바란다.

 

2) 거룩한 왕따를 두려워하지 않음

 

세상에 도전하는 자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첫째로 세상에 도전하는 자는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염두에 둔다고 했다. 둘째로 세상에 도전하는 자는 거룩한 왕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왕따가 무엇인가? 집단 따돌림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치명적인 상처를 준다. 정신병이 걸리게 만든다. 자살까지도 가능하게 만든다. 왕따를 당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 왜 거룩한 왕따라고 했는지 아는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당하는 왕따이기 때문이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거룩한 왕따를 당했다. 왕에게, 관원들에게, 그리고 백성들에게... 더 이상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는 처지인데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한 왕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들은 왕따를 당하면서도 움츠려있지 않고 당당하다. 왕따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나머지 모든 사람들을 왕따시키고 있는 것 같다. 세상에 도전하는 모습이 아닌가? 멋지지 않은가?

 

여러분이여. 사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상당수가 거룩한 왕따였다.

 

어느날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신다. 노아는 그 말씀에 순종하는 덕에 확실한 왕따가 된다.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셨고 노아는 어떻게 순종하였는가?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15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16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찌니라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20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21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6). 120년간 묵묵회 방주짓는 노아는 완전히 정신병자에 노망자 취급을 받았을 것 아닌가?

 

예레미야 역시 거룩한 왕따였다. 예레미야는 탄식한다. “18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아무 말에도 주의치 말자 하나이다 19 여호와여 나를 돌아 보사 나로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옵소서 20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선한 말씀한 것을 기억하옵소서”(18). “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20).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때로 혼자 될 수 있다. 때로 외로워질 수 있다. 때로 말 그대로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것이라면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이야말로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도전하는 자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부디 여러분은 세상에 굴복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에 도전하는 자가 되시라. 거룩한 왕따 당할 때 당당하시기를 바란다.

 

2) 생명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함

 

세상에 도전하는 자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첫째로 세상에 도전하는 자는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염두에 둔다고 했다. 둘째로 세상에 도전하는 자는 거룩한 왕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셋째로 세상에 도전하는 자는 생명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시한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왕의 명령을 분명히 안다. 우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 속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쇠도 녹이는 그 뜨거운 불 속에서 자신들의 몸은 녹아져 내릴 것이다. 세상사는 사람 중에 고통을 즐기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생명을 버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라면을 끓이다가 국물을 바지에 쏟아도 난리를 피우는 우리 아닌가? 그런데 풀무불 속에서 타죽어야 한다니... 온 몸이 녹아내려야 한다니... 그저 이번 한번만 눈 딱 감고 우상에게 절을 해버려? 그러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그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 도전하는 자의 특징 중 하나인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보다 소중히 여기는가? 예수님은 그러셨다. “47 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26)

 

바울 역시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우선시하였다. “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

 

이 땅에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러 온 선교사들이 그러했다. 이 땅에서 땅끝까지 선교사로 나가는 이들이 또한 그러하다.

 

 

결론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

 

세상에 도전하는 자의 특성은 무엇인가?

 

첫째로 세상에 도전하는 자는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염두에 둔다고 말씀을 드렸다. 자신보다도, 가족보다도, 출세와 성공보다도, 이익보다도, 세상 사람들의 이목보다도 하나님을 더욱 염두에 두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둘째로 세상에 도전하는 자는 거룩한 왕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들의 뭐라 할까 너무 신경쓰지 마시라. 같이 어울려주지 않을까봐 두려워하지 마시라. 하나님을 위해서 홀로 되는 것이라면 당당하시라.

 

셋째로 세상에 도전하는 자는 생명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시한다고 했다. 생명보다 우선시된다면 다른 그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최우선에 놓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미국의 명문대학을 졸업한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들 중 피트라는 젊은이는 신혼 여행도 포기하고 에콰도르 선교에 나섰다. 다섯 명의 선교사는 아내들을 후방에 남겨둔 채 경비행기를 타고 단 한 명의 기독교인도 없는 아우카 인디언 마을로 떠났다.

 

1956. 1. 2. 피트 선교사는 아내에게 긴급무선을 쳤다. "흥분한 인디언들이 몰려오고 있다. 기도해 달라." 그 후 연락이 끊겼다. 이튿날 구조대원과 가족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다섯 명의 선교사들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복음을 거부한 인디언들에게 순교 당했다. 20대의 선교사부인들은 울부짖으며 한 가지 다짐을 했다. "남편들이 이루지 못한 과업을 우리가 완수하자." 아내들은 모두 아우카 마을로 이사해 복음을 전했다.

 

40여년이 지난 후 그 마을은 '복음의 땅'으로 변했다. 선교사를 살해한 다섯 명의 인디언들 중 네 명이 목사가 됐고 1천여 명의 주민들이 모두 신자로 변했다. 하나님은 생명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우선시했던 그들을 통해 큰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이다.

 

부디 여러분은 세상에 굴복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에 도전하는 자가 되시라. 생명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시 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설교 제목. 세상에 도전하는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