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환판자촌생활

가물치 사냥을 시작하다/ 안희환

안희환2 2006. 9. 15. 09:38

어릴 적 겪은 판자촌 생활(72)/ 가물치 사냥을 시작하다/ 안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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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돈을 벌기 위해 가물치의 먹이로 쓰이는 개구리를 사냥하는 나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내게는 가물치에 대한 묘한 감정들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두 가지 감정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인데 하나는 두려움이다. 내가 던져주는 개구리들 가운데는 제법 큰 놈도 있는데 가물치란 놈이 무섭게도 그것을 꿀꺽 삼켜버리는 것이다. 또 하나의 마음은 미움이다. 사실 개구리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왠지 가물치가 미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의 위력에 굴복한 우리들은 개구리 사냥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고 수많은 개구리들을 포획하였다. 요즘 개구리가 많이 보이지 않는 현상에 대해 많은 책임감을 느낀다. 내가 잡은 개구리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자식들을 낳고 그 자식들이 또 자식들을 낳았더라면 지금쯤 개구리들이 얼마나 많이 번창했을까? 환경을 강조하는 오늘날 깊이 반성해야할 대목이다.


다시 가물치로 돌아와 보자. 나는 가물치에게 개구리들을 상납하다가 문득 가물치에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해냈다. 그것은 개구리를 잡는 방법에서 따온 것이다. 개구리를 잡으려 할 때는 강아지풀을 주로 이용했는데 파리 크기 만한 끄트머리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을 뜯어낸 후 그 끝부분을 개구리 앞에서 움직이면 개구리가 벌레인 줄 알고 덥석 무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개구리가 잡히는 것은 아니다. 벌레인줄 알고 물었던 강아지풀이 사실은 벌레가 아님을 알았을 때 개구리는 입을 벌리고 강아지풀을 뱉어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뱉어내기 직전에 강아지풀의 줄기를 확 잡아당겨야 한다. 덥석 무는 바로 그 찰나에 강아지풀을 잡아당기면 개구리는 입을 벌릴 사이도 없이 바깥으로 끌려나오는 것이다.


나는 동일한 방식을 가물치에게도 활용하기로 했다. 가물치는 강아지풀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고 강아지풀의 길이가 웅덩이에 미치지도 않으니 다른 미끼를 써야했다. 그 미끼는 바로 개구리였다. 나는 개구리의 허리를 끈으로 꽁꽁 묶은 후 그 끈을 긴 작대기에 매고 낚시를 하듯이 끈에 묶인 개구리를 웅덩이에 집어넣었다.


곧 이어 퍽 소리가 나면서 가물치가 개구리를 물었다. 곧이어 개구리를 묶었던 부분에는 개구리 반 토막만이 남아있었는데 나는 가물치의 이빨에 대해 더 큰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반 토막 남은 개구리야 내가 기필코 복수해줄게.’ 가물치 사냥도 개구리 사냥처럼 잡아당기는 순간이 중요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가물치가 개구리를 무는 동시에 줄을 잡아당겨야만 하는 것이다.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나는 드디어 가물치를 잡아낼 수 있었다. 개구리를 무는 순간 잡아당긴 줄 끄트머리에 가물치가 매달려 나온 것이다. 허공을 가로지른 가물치는 웅덩이 옆의 바닥으로 떨어진 채 파닥거렸는데 물고기치곤 꽤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잡았다는 흥분도 잠시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놈에 대한 처리문제 때문이다.


이미 가물치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나로서는 파닥거리는 가물치를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밖에 떨어져있는 가물치를 내버려두었다가는 큰아버지가 그것을 보실 테고 그러면 우리는 죽은 목숨이 된다. 개구리 잡은 현상금이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나는 차마 손을 대지 못한 채 신발을 벗어 가물치를 때려주었다. 여러 차례 얻어맞고 기절한 가물치를 나무판자등의 도구를 이용하여 다시 물속에 던져주었다.


나는 그 가물치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직까지도 모른다. 살아있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아마 건강하게 돌아다니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그 후로도 가물치 사냥은 계속되었다. 잡혀나온 가물치는 같은 운명을 겪어야만 했다. 먹지도 않을 것 왜 그렇게 잡으려 안달이었는지 모르겠다. 큰아버지가 가물치 키우는 것으로 성공하지 못한 데에는 내 책임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