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겪은 판자촌 생활(37) 우리는 난장판의 삼총사였다 / 안희환
어린 시절의 내 눈에 천막교회는 무척 커보였다.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하면서 그 교회가 얼마나 초라하고 작은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지만 아무튼 좁은 방안에서 살던 어린 내 눈에 천막교회는 참 넓은 공간이었던 것이다. 내가 처음 교회가 갔을 때 그 교회에는 의자가 없이 방석을 깔고 예배를 드렸는데 그 예배당은 운동장으로 보였다.
그때 목사님의 아들들 중에 둘째와 셋째는 쌍둥이였는데 나와 동갑내기 친구들인지라 사이좋게 지냈었다. 그 쌍둥이 둘은 종종 으르렁대며 싸웠는데 나는 그 싸움 덕분에 반사이익을 얻곤 했었다. 둘이 싸우고 나서 서로 내 지지를 구하는 바람에 내 주가가 상한가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편 들어주는 쪽이 유리해지니까 말이다.
아무튼 그 친구들과 함께 예배당을 휘젓고 다니며 놀았는데 예배당 끄트머리에 쌓아놓은 방석 더미는 뛰어오르기 참 좋은 곳이었다. 우리는 돌아가면서 사이좋게 그 위로 뛰어오르곤 했었다. 방석이 많이 망가지고 찌그러지곤 했지만 그것은 절대로 우리 때문이 아니다. 방석을 만든 사람이 방석을 너무 부실하게 만든 탓이다. 올라타도 망가지지 않도록 만들 것이지. ^0^
방석을 가지고 노는 또 하나의 방식은 한손에 방석을 잡고 방패로 삼은 후 다른 손으로 방석을 표창처럼 날리는 것이었다. 방향만 잘 잡고 힘 조절만 잘하면 방석은 예배당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잘 날아갔다. 물론 목표는 저쪽 벽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이었지만 말이다. 우리 삼총사가 그렇게 놀기 시작하면 예배당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었다. 물론 그렇게 놀다가 살그머니 사라지면 청소는 어느 누군가의 몫으로 떨어졌을 것이고.
시간이 좀 지난 후 성민교회는 교회 안에 장의자를 들여놓았다. 아무래도 쭈그리고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의자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방석은 자취를 감추었고 에너지가 넘치는 우리 삼총사는 예배당 안에서 놀 수 있는 새로운 꺼리를 찾아내야만 했는데 그것은 장의자 밑으로 기어 다니거나 그 위로 넘어 다니는 것이었다.
한 명이 술래가 되면 나머지는 도망을 다니는데 술래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서 의자 뒷받침 부분을 밟고 뛰어다녔다. 그러다 삐끗하는 순간이면 바닥에 굴러 요란한 소리를 내곤했는데 아픈 상황에서도 술래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다시 도망을 치곤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굴러 떨어지고도 심하게 다치지 않은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이런 우리들 때문에 교회 학교 선생님들은 골치 아파했었고 종종 소리를 치면서 윽박지르곤 했었다. “이놈들아. 여기가 운동장인줄 알아?”. 우리는 일제히 대답했다. “예”. 물론 속으로 대답한 것이다. 겉으로 대답했다가는 꿀밤을 맞을 터이니. 가끔 꿀밤을 맞기도 했는데 우리는 그 시련을 잘 극복해 나갔다.
이렇게 난리를 피던 내가 조용해진 것은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처음으로 교회에 전도사님오신 나이든 여자분 때문이었다(40대 가량). 그분은 가장 떠드는 고학년의 나를 총무로 세워주었는데 회장도 임원도 없던 시대에 총무는 유일한 임원이었다. 졸지에 총무가 된 나는그때부터 나는 다른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며 다녔다. 왜 떠드느냐고 호통도 치고. 지금 생각하니 피식하고 웃음이 나온다.
아~ 감투에 약한 철부지 아이여. 그때 그냥 더 놀았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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