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겪은 판자촌 생활(36) 판자촌 아이의 천막교회 추억 / 안희환
판자촌에 사는 아이답게(?) 나는 어릴 때부터 천막교회에 다녔다.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있는 성민교회였는데 절반은 벽돌로 지어졌고 뒷부분은 천막으로 지어진 교회였다. 그 교회의 목사님은 전종수 목사님이셨는데 우리 집이 어려울 때 많은 도움을 주시곤 하셨다. 쌀이 다 떨어진 것을 알면 나와 동갑내기 친구인 아들을 시켜 자전거로 쌀을 갖다 주시곤 하셨다.
사실 내가 교회에 다닌 것인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우리 어머니께서 믿음이 좋으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우리 4남매가 신앙생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셨는데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교회를 나간 측면이 있다. 특별히 추운 겨울 날 걸어서 한참을 가야하는데 자발적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서 교회에 가는 아이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두 번째 이유는 교회 선생님 때문이었다. 참 이상한 것이 교회 선생님들은 다른 어른들보다 친절하고 자상했다. 질문하느라 귀찮게 해도 일일이 대답을 해주었고 가끔 맛있는 것을 사주기도 했고 만날 때면 따스하게 웃으며 영접해 주기도 했다. 그런 선생님들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
세 번째 이유는 교회 안에 점차로 친구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 동네와 떨어져 있는 곳이기에 동네 친구들은 거의 없었지만 교회에서 새로 사귀게 되는 아이들과 친해지면서 교회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었다. 그 중 목사님의 두 아들은 쌍둥이인데 나와 동갑이라 무척 친해졌다. 나중에는 동네 아이들을 교회에 데리고 가기 시작했는데 판자촌의 아이들 여러 명이 나와 같은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네 번째 이유는 교회에서 주는 간식 때문이었다. 사실 그때는 교회도 많이 어려웠던지라 매주 간식을 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주 드물게 간식이 나왔다. 그러나 드물게라도 나오는 간식이 어디인가? 간식을 거의 먹을 수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특별히 성탄절에 한 봉지씩 주어지는 과자 봉지에는 화려한 과자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 행복감이란 ^0^
일단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교회를 빠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믿음이 잘 자란 것도 아닌 것 같다. 다른 초등학생들도 그랬을 것 같지만 교회는 내게 있어 새로운 놀이터의 하나였을 뿐이다. 특별히 예배 시간에 떠드는 것은 상당히 재미가 있었는데 여러 사람들의 주목을 확실하게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성경공부 시간에 딴 짓하면 선생님이 이름을 불러주었고, 기도 시간엔 눈 뜨고 다른 아이들이 기도를 제대로 하는지 감시하였으며, 가끔은 기도하느라 눈 감고 있는 다른 아이들의 머리통을 때려준 후 시침을 떼기도 했었다. 그때는 교회가 정신없어진다. ㅎㅎㅎ 지금도 그 당시에 나를 가르쳐주셨던 선생님들을 만나면 그때 내가 얼마나 악동이었는지는 구구절절 늘어놓으신다.
어른이 된 지금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그 천막교회를 가본다. 성민교회는 교회를 이전하여 건축하였지만 성민교회 있던 자리에는 다른 교회가 들어와 있는데(서부제일교회) 교회의 외향은 내 어릴 때의 모습을 상당 부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갈 기회가 되면 그 교회가 새로 지어지기 전에 사진을 여러 장 찍을 생각이다. 내 추억의 놀이터를...
'안희환판자촌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구슬치기의 귀재였다 / 안희환 (0) | 2006.05.05 |
---|---|
우리는 난장판의 삼총사였다 / 안희환 (0) | 2006.05.04 |
강인한 꼬리뼈를 향하여 충성!! / 안희환 (0) | 2006.05.04 |
대박을 꿈꾸던 자치기 / 안희환 (0) | 2006.05.04 |
도망간 연 찾아 삼만 리 / 안희환 (0) | 2006.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