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겪은 판자촌 생활(31) 파리가 끄는 마차 / 안희환
파리라고 하는 작은 생물은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물론 긍정적인 의미에서라기보다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연관성이지만 말이다. 파리는 모기와 더불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일순위를 겨루는 작은 생물이 아닌가?
보통 파리하면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하찮은 존재라는 의미이다. 오죽 하면 파리 목숨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너무나 어이없이 쉽게 죽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파리 목숨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귀찮은 존재라는 의미이다. 여름 날 낮잠을 청하는데 달려드는 파리의 존재는 그야말로 짜증을 유발하는 존재임을 누구나 겪어보았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파리는 귀찮은 존재라기보다는 하찮은 존재였으며, 한 면에서는 내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였다. 지금부터 조금은 잔인하게 들릴지 모를 이야기를 할 것인데 마음 약한 사람이나 임산부는 글 읽기를 자제해 주시기 바란다. 그래도 꼭 읽어야겠다는 분들은 그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질 각오를 하고 읽으시길 바란다. ^0^.
앞서 말했듯 어린 시절의 내게 파리하면 즐거움을 연상케 한다.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 먼저는 단순하게 파리 잡는 재미이다. 손바닥을 편 채 팔을 휘둘러 파리를 잡곤 했는데 손바닥 안에 조그만 파리가 들어와 있는 느낌을 참 좋아했었다. 그것도 일종의 성취감 아닌가? 또 파리채를 휘둘러 파리를 잡으면 우수수 떨어지는 파리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파리 입장에서야 청천벽력이며 생명이 끝장나는 절대절명의 순간이었을 텐데 그것을 즐기는 어린 시절의 나를 보면 사람의 잔인성이 이런 건가보다 하는 생각도 든다. 대상이 파리로 끝났기에 망정이기 그것이 점점 확대되어 나가면 그 대상이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끔찍한 생각도 들고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잡은 파리를 쓰레기통에 버리던 나는 보다 효과적인 즐거움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파리를 방바닥에 한참 동안 놔두는 것이다. 그러면 방바닥은 새까맣게 모여든 개미들로 북적거린다. 어디서부터 기어왔는지 엄청난 수의 개미들이 파리를 분해하여 제 집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다 보면 시간가는 줄을 몰랐었다.
파리를 가지고 노는 나의 수준은 점점 엎그레이드 되어 갔다. 날개를 뗀 채 기어 다니는 파리를 보는 일, 그리고 급기야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찾아내었는데 그것은 파리가 끄는 마차를 만드는 것이었다. 아주 가는 철사로 마차 모양을 만든 후 날개를 자른 파리의 꽁무니에 마치를 끼워놓으면 날지 못하는 파리는 온 방에 마차를 끌고 돌아다니게 되는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파리들에게 나는 재앙 자체였던 것 같다. 내 내면 깊은 곳에 잔인함이 자리 잡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섬뜩해지기도 한다. 물론 지금도 손바닥을 휘둘러 파리를 잡기도 하고 파리채를 휘둘러 파리를 죽이기도 한다. 더 나아가 에프킬라를 잔뜩 뿌려서 파리들을 집단 사살하기도 한다.
그러나 날개를 뜯어낸다거나 날개 뜯긴 파리의 꽁무니를 꿰뚫어 가는 철사로 만든 마차를 끌게 한다거나 하는 것은 그만두었다. 파리가 개미의 밥이 되는 것을 즐겁게 보던 마음도 사라졌는데 그러고 보면 어른이 아이보다 덜 잔인한 면도 있는 것 같다. 또 변한 것이 있다면 어릴 때보다 어른이 된 지금 파리를 더 귀찮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안희환판자촌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망간 연 찾아 삼만 리 / 안희환 (0) | 2006.05.02 |
---|---|
개구리 몸 분리하기 / 안희환 (0) | 2006.05.02 |
땅따먹기의 종말 / 안희환 (0) | 2006.05.02 |
병공장와 철공장, 그리고 공터 / 안희환 (0) | 2006.04.29 |
크라운 산도 하나의 상처 / 안희환 (0) | 2006.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