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겪은 판자촌 생활(18) 동네 개들의 제왕이던 검둥이 / 안희환
어릴 적 우리 집에서는 여러 종류의 개들을 키웠고 그 숫자도 만만치 않았는데 그 중 기억나는 개가 있다. 그 개는 잘 생긴 개도 아니었고 특별히 이름 있는 종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똥개 취급할 수도 없었던 것이 그 개의 행동과 태도에는 왠지 모를 기품이 서려있었기 때문이다. 그 개의 이름은 평범했다. 검둥이.
검둥이가 우리 집에 오게 된 배경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아주 어린 새끼였을 때 우리 집에 누군가가 갖다 주었고 나는 그 녀석과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워낙 색이 까맣다 보니 어떤 이름을 지을까 하는 고민도 없이 검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그 녀석도 불만인 눈치가 없이 검둥이라 부를 때마다 반갑게 꼬리를 치는지라 그냥 검둥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잠시 충청남도 서산에 계신 큰 아버지댁에 가게 되었고 검둥이와는 눈물의 이별을 해야만 했다. 큰집 누나들이 잘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처럼 검둥이가 보고 싶어 몸살을 앓았다. 꿈을 꾸어도 검둥이 꿈을 꾸었다. 그리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게 되던 날 내 마음은 얼마나 기쁨으로 가득했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를 기다리던 것은 건강하게 더 자란 검둥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덩치는 조금 더 커졌는데 다리 하나를 절뚝이고 있었다. 안양천 옆 뚝길에서 지나가던 차에 치어 다리를 절게 된 것이다. 절뚝이는 검둥이를 보고 슬퍼하던 그때의 내 모습이 눈에 선하다. 누가 보면 부모님이라도 돌아가신 줄 알았을 것이다.
아무튼 검둥이는 다리를 저는 와중에서도 잘 자랐다. 그러나 체구가 어느 정도 자라더니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나는 검둥이가 다리를 다쳤기 때문에 더 이상 못 자라는 줄 알고 마음 아파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종자 자체가 크게 자라는 종류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무튼 달릴 때 절뚝이는 것만 빼면 아무 문제없는 내 사랑 검둥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덩치 큰 개 한 마리가 지나가다가 우리 검둥이와 시비가 붙었는데 검둥이는 절뚝이는 다리를 가지고도 뒤로 물러서지를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달려들어 상대의 목덜미를 물었는데 덩치 큰 놈은 창피도 모른 채 소리를 질러대며 도망을 갔다. 세상에 이럴 수가.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검둥이를 더 이상 가련하게 여기지 않게 된 것이 말이다.
그 후로도 나는 수차례에 걸쳐 검둥이의 싸움 광경을 목격했는데 동네의 사납다고 소문난 개들도 검둥이 앞에서는 꼬리를 내리는 것이었다. 검둥이는 차차 동네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개가 되었고 절뚝인다고 놀려대던 아이들도 검둥이를 보면 쓰다듬어 주기 시작했다. 검둥이가 싸울 때 옆에서 구경만 했던 내가 공연히 신이 났었다.
그 녀석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갑자기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개도 오래오래 살면 좋으련만 정이 깊이 들면 늙어서 죽어버리니 속상하다. 절뚝이면서도 당당했던 검둥이는 내게 용기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었던 좋은 스승이었다. 핸디캡은 극복하면 되는 것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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