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겪은 판자촌 생활(15) 눈이 배꼽까지 차 오르던 날엔 / 안희환
초등학교 시절 신문을 돌릴 때 나를 힘들게 하던 것들 중 하나는 날씨였다. 우선 비가 내리던 날이 힘들었다. 장마가 져서 집이 잠기는 때에 학교에 피난 간 상태에서도 멋모르고 좋아하던 철부지였는데 막상 신문을 돌리는 중에 비가 내리니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다. 한 손엔 우산을 들고 다른 손으론 신문을 든 채로 닫힌 문을 열려면 그야말로 곤욕스러웠다.
그런데 겨울이 되면서 비가 내리는 날보다 더 힘든 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눈을 참 좋아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으며, 내린 눈으로 하얗게 변해버린 세상이 참 예쁘다는 생각도 했었다. 눈을 굴려 눈사람을 만드는 재미에 더해 눈을 뭉친 후 그것을 네모로 잘라서 눈집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기도 했었다. 에스키모인처럼 말이다. 그때의 재미란...
그런데 신문을 돌리기 시작한 나에게 눈은 더 이상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었다. 눈 내린 날 신문을 돌리는 시간은 다른 날보다 훨씬 길었으며 한쪽에 무거운 신문 뭉치를 든 상태에서 균형을 잡지 못한 몸은 곧잘 넘어지곤 했다. 눈싸움 하느라 뛰어다니다 넘어졌을 때는 괜찮았는데 신문돌리다가 넘어졌을 때는 몸도 마음도 아팠다. 눈 위에 미끄러져가는 신문뭉치는 마치 또 다른 나처럼 여겨졌었다.
한번은 눈이 정말 많이 내렸다. 내가 신문을 돌리던 구역 중 한 집은 조경을 하는 집이었는데 나무들이 심겨진 사이로 난 길은 푹 파인 곳이기에 눈이 너무 많이 쌓였다. 다른 때도 눈 내린 날 그 집을 가려면 곤욕스러웠는데 눈이 워낙 많이 내린 그날은 그야말로 앞으로 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 쌓인 눈 사이로 내 몸이 묻히는데 거의 배꼽까지 눈이 차오르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눈이 참으로 무거운 것임을... 신발로 들어간 눈은 녹아버렸고 발을 다 적시고 있었다. 발은 거의 얼기 직전이었다. 간혹 가다가 바지 사이로도 눈이 들어오는 것을 차가운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누군가를 원망했던가? 눈이 악마라도 되는 듯이 저주했던가? 눈가에 흐르던 것은 눈물(눈 녹은 물)이었던가 눈물(눈에서 나온 물)이었던가?
나는 지금도 엄청나게 눈이 내리는 날엔 옛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쌓인 눈은 어른의 허벅지 정도밖에 되지 않는 높이였다. 아직 어린 초등학생이었기에 배꼽 근처까지 차 오른 것일 뿐... 이전의 나처럼 신문을 들고 눈길을 헤치는 아이가 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 마음 한 구석에 구름이 낀다.
가난이 죄는 아니다. 그러나 가난이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특별히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 때의 아이에게는... 물론 고난을 겪으면서 강해지고 깊어지고 지혜로워지지만 그것은 결과론적인 측면이다. 현재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 결과를 들이밀고 현재의 힘겨움을 참아내라고 강요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라 생각한다.
'안희환판자촌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에 물리고 기뻐하다 / 안희환 (0) | 2006.03.15 |
---|---|
시궁창에 버림 받은 신문 뭉치 / 안희환 (0) | 2006.03.15 |
양말 한 켤레의 행복 / 안희환 (0) | 2006.03.15 |
시장 바닥에 앉은 초등학생 / 안희환 (0) | 2006.03.07 |
시장 바닥에 앉은 초등학생 / 안희환 (0) | 2006.03.07 |